인천시립박물관 '청일전쟁 130년, 다시 재(再)보다'
1894~1895년 조선 지배권 놓고 양국 개입
동학농민운동 진압 위한 군대 파병이 계기
'日 승전' 朝, 淸과 동등한 자주국 지위 얻어
원인·전개과정·결과 다루는 다양한 유물들
당시 역사적 상황·처했던 입장 재조명 기회
올해는 1894년 발발해 이듬해까지 이어진 청일전쟁 130년인 해다. 청일전쟁은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과 동아시아 맹주를 자처한 중국이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조선 땅'에서 벌인 전쟁이다. 19세기 동아시아 질서 재편의 시발점이기도 하다.
청일전쟁은 1894년 1월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청과 일본 두 나라가 각각 한반도에 군대를 파병하면서 촉발됐다. 왜 동학농민운동에 청과 일본이 개입했을까. 10년 전인 1884년 김옥균 등 급진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은 '톈진조약'을 체결해 조선에서 양국 군대를 철수시키고, 추후 조선에 파병할 경우 서로 통지하기로 했다.
1894년 6월 청은 조선 정부 요청으로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파병하며 일본에 알렸고, 일본도 자국민 보호를 빌미로 군대를 보냈다. 같은 해 6월11일 전주성을 점령하고 있던 농민군은 조선 정부와 화약을 맺고 해산했고, 조선은 청과 일본에 철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일본은 7월23일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했으며, 이틀 뒤 서해 풍도 앞바다에서 청의 군함을 공격하고 고승호를 격침시켰다. 이어 일본은 충남 성환(천안)에서 청군을 제압한 후인 8월1일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인천항(제물포)과 개항장 일대는 일본군 주요 상륙 거점이자 병참기지였다.
일본은 평양전투와 압록강 하구에서의 황해해전에서 승리하며 주도권을 잡았고, 다롄만과 웨이하이 등을 점령하며 전쟁에서 이겼다. 전쟁의 결과가 1895년 4월 중국의 리훙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한 '시모노세키조약'이다. 일본은 청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반도와 부속도서, 타이완을 할양받았다.
조선은 청과 동등한 자주국 지위를 얻었지만, 본격적으로 일본의 지배권 아래 놓이게 됐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남의 나라 전쟁터로 우리 땅을 내어준 조선 민중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다.
때마침 인천시립박물관에서 오는 10월27일까지 기획 특별 전시 '청일전쟁 130년, 다시 재(再)보다'를 개최하고 있다. 청일전쟁의 원인과 전개 과정, 전후 변화 등을 '1부 - 착각' '2부 - 사실' '3부 - 전후사정'으로 나눠 총 550여 점의 유물과 자료, 영상을 전시하고 있다.
전시 유물 대부분은 인천시립박물관이 모아 소장한 것들이다. 그만큼 인천은 청일전쟁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이번 인천시립박물관 기획 특별 전시에서 눈에 띄는 유물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청일전쟁의 단면을 소개한다.
■ 조선 땅에서 벌어진 전쟁
청일전쟁 관련 자료는 대부분 일본에서 나왔다. 당시 일본은 전쟁을 소재로 한 출판물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주요 장면을 나열한 석판화, 채색접시 등도 시중에 유통됐다. 철저히 일본의 시각으로 국내외에 선동하고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됐다.
이 가운데 '대일본해륙군조선상륙지도'(1894년)는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하는 모습을 묘사한 석판화다. 5척의 거대한 군함에서 내린 병사들이 위용을 과시하며 상륙하는 장면을 과장해 표현했다. 시립박물관 전시에선 실제 상륙 사진도 전시했는데, 이 석판화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일본 종군 화가가 그린 '일청전투화보'(1894~1895년) 속 평양전투 당시 평양의 한 민가를 일본군이 막사처럼 쓰고 있는 그림에서는 유린당한 당시 조선인들의 실상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백성의 집이었을 초가집에서 일본군 군인들이 야영하고 있고, 조선인 인부도 보인다.
전시를 기획한 시립박물관 관계자는 "전투가 일어난 평양성은 거의 폐허가 돼 한동안은 경제적으로도 굉장히 어려웠다고 한다"며 "일본군이든 청군이든 군인들이 지나간 곳의 민가들은 전부 폐허가 됐다"고 설명했다.
■ 청일전쟁이 일어나기까지
1882년 신식 군대와의 차별에 반발한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으로 조선은 청에 군대를 요청했다. 청이 군사적으로도 조선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다. 1884년 일본의 지원으로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도 청이 개입해 '삼일천하'로 끝났다.
조선은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했고, 10년 후 지배층의 수탈과 외세 침탈에 항거한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청과 일본의 대립은 동학농민운동을 계기로 군사적 대결로 번진다. '정한론'이 대두되던 일본은 오래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시립박물관 야외에 전시된 '화방공사조난비'는 임오군란 당시 일본 공사를 지낸 하나부사 요시모토 일행이 인천 월미도를 통해 조선을 탈출하기 전 인천도호부관아에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고자 1934년 세운 비석이다.
조선의 강제 개항을 주도한 하나부사를 기념한 비석은 일제 침략의 상징물로 여겨져 해방 이후 쪼개진 채 땅에 묻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인천도호부관아가 있는 문학초등학교 인근 신축 공사장에서 발견돼 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
■ 보드게임까지 만든 강제병합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전쟁을 통해 국가 발전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이 생겼다. 일본인들이 국민 의식을 갖게 되고 군국주의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됐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의 확장을 경계한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이른바 '삼국 간섭'으로 일본은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했다. 이는 1904~1905년 러일전쟁의 씨앗이 됐다.
일본 신문들은 보드게임의 일종인 '쌍육'판을 독자에게 부록으로 주곤 했다. 이번 전시에서 공개한 '일출신간조선쌍육'(1911년)은 일본 교토히노데신문이 신년 부록으로 제공한 것이다. 2개의 주사위를 던져 '강제병합' 칸에 먼저 도착하면 이기는 게임으로 정한론, 청일전쟁 등 일본이 조선을 강제로 병합하는 과정이 담겼다. 아이들이 즐겨하던 게임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왜곡된 역사 교육을 보여주는 자료다.
■ 근대 도시 모습 갖춘 인천
인천은 1883년 개항 이후부터 외세의 각축장이었는데, 청일전쟁 이후 일본이 인천 개항장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다른 나라 조계와 조선 땅으로 세력을 넓혔고, 상권을 확장했다. 철도 등 근대적 교통 수단과 통신 등이 구축되기도 했다.
일본의 식민지 거점 도시로 점차 변모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현재 많은 이가 떠올리는 개항장 풍경은 이때부터 형성한 것이다.
인천항은 미곡 수출(수탈)의 중심지가 됐으며, 인천미두취인소(쌀 선물 거래소) 같은 투기장이 성행했다. 정미업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수탈의 상징인 30㎏짜리 '인천가등정미소 포대'(1929년)는 청일전쟁이 '서막'에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최근 국제 정세와 맞물려 130년 전 동아시아 질서를 재편한 청일전쟁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