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에 조선의 신여성이 있었다
한경미 감독이 찾아 노력 끝에 수원시립미술관 사진 기증
동서양이 어우러진 제법 독특한 고전 흑백사진.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그의 전남편 김우영, 독립운동가 서영해, 단란한 펠리시앙 샬레의 가족이 한 프레임에 담겼다.
샬레의 외손녀가 간직한 가족 앨범에서 발견된 이 사진은 낡은 활자로만 존재하던 나혜석의 1920년대 파리 유학 시기를 눈앞에 선명하게 펼쳐냈다.
그리고 마침내, 이들을 찍은 사진 네 장이 95년의 세월이 흘러 수원에 도착(2023년 8월8일자 15면 보도=한경미 감독, 나혜석 사진 수원시립미술관 기증… 선공개·복원 각 2장)했다.
모든 일은 전화 한 통에서 시작됐다.
"Allo?(여보세요?)"
"Dans cette maison, la peintre coreenne Rha Hye-seok vivait dans les annees 1920. Je cherche des traces de son passage(1920년대, 한국의 화가 나혜석이 이 집에 살았어요. 저는 그 흔적을 찾고 있어요)."
"Je ne suis pas sur, Madame. Mais je vais aussi verifier(잘 모르겠는데요. 하지만 저도 한번 알아볼게요)."
호기심 많은 프랑스인의 성향은 막연하게 던진 질문에 역으로 실마리를 잔뜩 들고 나타났다. 네 장의 사진과 파리 근교 르 베지네 지역의 어느 전원주택이 그 증표다.
'나혜석 머물던 집' 문패 걸고 특정일 외부 공개 의향 비쳐
먼저 수화기를 집어 든 주인공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경미(61) 감독. 지난해 수원시립미술관에 나혜석의 파리 유학 시기가 담긴 사진을 기증한 인물이다. 낯선 이야기를 무시하지 않고 전화에 응답한 프랑스인 중 하나는 브뤼노 푸셰(68)씨. 나혜석이 파리에서 유학할 당시 머물던 집의 현재 소유자다.
프랑스에 거주하며 나혜석을 집요하게 파헤치던 한경미 감독. 그리고 한국의 유명 화가가 자신의 집에 살았던 역사를 자랑스러워 하는 푸셰씨를 지난달 25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와 르 베지네에서 만났다.
■ "레베지네하고 하는 곳"… 예술과 자유를 꿈꾸던 조선 여인의 2층 방
지난 1927년 나혜석이 파리에서 증기기관차를 타고 도착했을 르 베지네. 한경미 감독과 함께 파리 오베르역에서 RER 열차를 타고 샤튜-크루아시역에서 내렸다. 전원주택촌으로 이뤄진 이곳은 파리에서 40분밖에 걸리지 않았으며 한적한 분위기를 자랑했다.
흑백사진 속 주인공들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사진에 담겼던 배경은 여전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푸셰씨가 마중나왔다. 우거진 나무와 활짝 핀 꽃들 사이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자 대규모 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택 뒤편에는 철길이 놓여 있어 주기적으로 열차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 집은 파리 상라지르 정류장에서 전차로 25분간밖에 아니 걸리는 파리 가까운 시외니 별장 많기로 유명한 레베지네(르 베지네)하고 하는 곳에 있다. 시외니 만치 수목이 많고 이 집 정원도 꽤 넓다. 정원에는 높은 고목이 군데군데 서 있고 푸른 잔디 위에는 백색 화초가 피어있다(1936년 4월 '삼천리')." 나혜석이 88년 전 묘사했던 풍경 그대로였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자 나혜석作 '자화상'과 비슷한 그림이 반겨줬다. 푸셰씨의 딸이 어느 도록을 보고서 따라 그렸다고 한다. 1층 거실에서는 예술품과 골동품 수집이 취미인 푸셰씨의 취향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양화풍의 액자들 사이로 일본의 전통 가면과 청나라 시기 제작된 그림책 등이 눈에 띄었다.
화구 가방을 든 나혜석이 무수히 오르고 내렸을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다.
당시 나혜석은 이 저택의 2층에 있는 어느 방에 머물렀다. 현재는 서재가 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당 공간에 들어서자 창문 너머로 기찻길이 보였다. 다만 긴 세월을 거치며 집주인도, 집 구조도 여러 번 바뀐 탓에 그때와 완전히 똑같은 형태는 아닌 듯했다. 전문가들의 현장 조사를 비롯한 보다 면밀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 푸셰씨의 환대… 언젠간 빛날 문패 '나혜석이 머물던 집'
'나혜석의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기꺼이 대문을 열어준 푸셰씨. 그가 낯선 전화를 무시하지 않은 이유는 이런 다양한 문화를 향한 깊은 관심에서 비롯됐다. 도시설계사로 일하던 그는 은퇴한 뒤 도심과 가까운 평화로운 전원주택에서 사는 게 작은 꿈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꿈에 그리던 일상을 보내던 푸셰씨는 지난 2006년 한경미 감독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고 호기심이 생겼다. 이 집이 한때 샬레가 살던 집이었다는 것과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이 머물던 집이었다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그는 '샬레'라는 이름을 이야기할 때면 양 손을 반대 방향으로 뻗는 제스처를 취했다. 무언가 또 다른 의미가 숨어있는 듯했다.
아시아 학자이자 철학과 교수였던 샬레는 한국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인물이다. 동양에서 온 화가에게 방을 내주고 한국의 독립을 위해 힘을 보탰다.
반면, 프랑스에서의 평가는 다르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던 시기, 샬레는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외교적으로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홀로코스트 등 나치의 만행과 이들에게 침공당했던 역사를 잊지 않는 프랑스인에게 샬레는 그다지 반가운 인물은 아닌 셈이다.
이런 껄끄러운 역사를 자신의 집에서 지우고 싶을 법도 하지만, 예상과 달리 푸셰씨는 흥미로워했다. 인간의 삶은 양가적이란 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어서일까. 과거 집주인의 명과 암, 그리고 한국의 역사적 인물의 흔적이 이 집에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귀중한 유산이다.
푸셰씨는 "저는 호기심이 많아서 한경미씨에게 전화를 받았을 때 '이거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며 "이곳이 한국 화가 나혜석이 살았던 곳이란 걸 알릴 수 있는 문패가 있다면 좋을 것 같다. 역사적인 장소인 만큼 특정한 날을 지정해 집을 외부에 공개할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프랑스에서는 유명 예술가 등 역사적 인물의 생가나 작업실 앞에 문패를 붙여둔다. 푸셰씨의 집에도 현지 담당자들이 나와 시찰했고, 이후 문패를 달 자격을 갖췄다는 결과를 전해 받았다고 한다. 사진과 글자를 포함한 제작 비용은 1천500유로가량.
이제 공은 '나혜석의 나라'로 넘어왔다. 프랑스 르 베지네 푸셰씨의 집 대문 앞에 붙을 나혜석의 이니셜 'Rha Hye-seok'이 반짝일 날이 머지않았다.
■ 나혜석 사진들 빛을 보게 한 한경미 감독, "내 피사체는 주류에서 벗어났던 디아스포라"
프랑스서 활동했다면 어땠을까 그려보곤 해
이후 35년이 흐른 지금까지 그는 파리에 거주하며 프랑스인 남편과 함께 일상을 보내고 있다. 영화감독으로 메가폰을 잡기도 하고, 어학원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한다.
나혜석이란 이름을 알게 된 건 그에게 운명 같은 일이었다. 한 감독은 "2004년 잠시 한국에 갔을 때 들고왔던 '나혜석 전집'을 읽으면서 나혜석의 일생이 마음을 흔들었다. 무언가 더 알고 싶어졌다. 특히 파리에 체류했던 기록을 보고서 직접 흔적을 찾아 나섰다"고 떠올렸다.
이어 "1989년 이곳에 여성이 유학 오는 것도 흔치 않은데, 하물며 1920년대에 저보다 먼저 파리에 공부하러 온 '신여성'이 있다는 것에 끌렸다"며 "나혜석이 조선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서 화가로 활동했다면 어땠을지 떠올려 보곤 한다"고 이야기했다.
나혜석과 한경미, 한경미와 나혜석. 해외 유학이 낯설었던 시절 프랑스로 넘어와 저마다 꿈을 펼친 두 여성이 은연중 겹쳐 보였다. 그래서일까. 한 감독의 피사체들은 왠지 모르게 나혜석과 비슷한 구석이 많았다.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인정받지 못했던 인물들'. 그는 해외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며 국위선양에 이바지한 이들이 아닌, 타지에서 영원히 이방인으로 머물다 간 디아스포라를 조명하고 있다.
한 감독은 "아무런 역경 없이 평범하게 삶을 마감했다면 (나혜석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동안은 성공한 동포 위주로 알려지다 보니 프랑스로 이주한 한국인에 대한 연구도 잘 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나혜석을 비롯해 프랑스로 입양 온 한국인과 이용제(일제 식민 통치를 피해 프랑스로 이주한 조선인)씨 등을 파헤쳤던 것 같다"고 힘줘 말했다.
프랑스 파리·르 베지네/유혜연기자 pi@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