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경기도·인천지역 '백년가게'를 소개합니다.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이 기사를 클릭했다면 조금은 실망하실 수도 있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보통의 사람들이 오랜 기간 일군 귀한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코로나19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모든 소상공인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이 글을 씁니다.

*백년가게란? - 중소벤처기업부가 100년 이상 존속을 돕고자 지정한 30년 이상 업력(국민 추천은 20년 이상)의 소상공인 및 소·중소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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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재 대표 2021.3.4 /디지털콘텐츠팀 제공

#양복으로 맺은 미군과의 인연

오산 공군기지와 맞닿아 있는 평택시 신장동에 가면 영어로 된 간판이 즐비한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집니다. 이곳 상점 대부분의 주요 고객이 '미군'인 점을 고려하면 이국적이라기보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겠죠. 오늘의 주인공은 이 지역에서 40년 넘게 양복점을 운영하고 있는 이인재 대표입니다. 한국인을 상대로 해도 어려운 게 장사라고 하는데, 그는 언어와 문화는 물론 크고 작은 취향까지 다른 외국인들에게 '맞춤 양복(장)'을 만들어주며 오랜 기간 가게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인재 대표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뒤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10대 때부터 송탄(평택)에 위치한 양복점에 취직해 옷 만드는 일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에게 처음 주어진 역할은 심부름 같은 허드렛일이었습니다. 고생길의 출발점이었던 것이죠.

"처음에는 심부름을 하면서 다림질하고, 손바느질하는 하는 걸 배웠어요. 손가락에 골무를 끼우고 헝겊에 바느질하는 연습을 많이 했죠.(웃음) 일이 손에 익으면서부터는 셔츠, 바지, 상의를 만들고 재단하는 걸 하나하나씩 배웠어요. 이렇게 배워서 1979년에 제 가게를 처음 연 거죠."

자신만의 상호를 단 가게를 연 뒤로는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미군들 사이에서도 "옷을 잘 만든다"는 입소문이 퍼지면서 손님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옛날에는 바느질도 직접하고, 다리미도 연탄불로 데워 사용해야 하니까 하루에 만들 수 있는 옷이 적었죠. 상의는 1장, 바지는 많아야 4장 밖에 못 만들었어요. 그래도 손님이 몰려오면 일은 해야 하잖아요. (미국에) 간다고 그러니까. 한 번은 일주일 동안 잠을 자지 않고 일 해봤어요. 그쯤 되니까 뭘 먹어도 소화가 안 되더라고요.(웃음) 참 열심히 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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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들과 함께한 이인재 대표 젊은 시절. 2021.3.4 /디지털콘텐츠팀 제공

#미국에서 전해진 부고 소식

올해 67살이 된 이인재 대표는 영어로 손님들과 직접 의사소통을 합니다. 직접 가게를 방문하는 손님 뿐만 아니라, 이메일을 통해 들어오는 주문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영어 회화는 물론 작문까지 두루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처음에는 영어를 할 줄 아는 판매 사원을 뒀는데, 저도 가게를 하면서 영어를 배웠어요. 제가 초등학교만 나왔는데,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를 봤어요. 사람은 꾸준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서 4년제 대학교까지 나왔죠."

이 대표의 양복점에는 손님들의 흔적이 가득 남아 있습니다. 유리를 얹은 탁자에는 미군들의 명함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미군들이 이 대표가 만든 옷을 입고 찍은 기념사진도 곳곳에 걸려 있습니다.

한국에서 근무할 때 이 대표와 인연을 맺고 미국으로 돌아간 이들이 이따금 양복 제작을 의뢰하는 이메일을 보내기도 합니다. 이런 인연이 30년 넘게 이어지기는 경우도 있다고 하네요.

"해병대 근무하셨던 분인데, 30년 전에 저희 양복점에서 옷을 해 갔어요. 그분이 미국으로 돌아가서 군 제대를 하고 사업을 하게 됐는데, 꼭 봄과 가을에 한국으로 나와서 옷을 열 벌씩 했거든요. 나중에는 이메일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옷을 만들어 보내주기도 했는데, 어느 날 부인한테 이메일이 온 거예요. '자기 남편이 주문하고 혹시 안 가져간 거 있느냐고.'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까 '돌아가셨다'고 하더군요." 손님들을 추억하는 그의 눈시울이 이내 붉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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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안고 있는 젊은시절 이인재 대표. 2021.3.4 /디지털콘텐츠팀

#아흔까지 남은 20년

이인재 대표가 처음 양복점을 할 당시만 하더라도 이 일대에 50곳 넘는 양복점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많이 줄어 10곳 남짓입니다. 이 대표도 가게 규모를 줄여 지금 자리에 10년 전쯤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렇게 양복점들이 자꾸 사라지고 있어서 일까요. 그의 꿈은 '90살까지 양복점을 운영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지역에 터를 잡아 가게를 일구며 자식 넷을 키웠고, 지금은 손주 8명을 둔 할아버지가 됐습니다. "앞으로 90살까지 하는 게 목표인데, 한 20년 남았죠. 여기 상인회 분들 중에 가장 나이 많은 분이 85세예요. 우리 업이 오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고, 산을 좋아해서 많이 다니거든요. 건강에는 문제 없죠.(웃음)"

말 그대로 수십 년 동안 양복 만드는 일을 하고 있는 이 대표는 여전히 옷을 만드는 일에서 가장 큰 '성취감'을 느낀다고 합니다. 힘든 점을 묻는 질문에는 간혹 옷을 받아본 손님들이 만족하지 못한 일을 떠올리며 외골수의 면모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손님들에게는 손해를 감수하고 옷을 새로 만들어줄 정도로 본인이 하는 일에서만큼은 완벽을 추구하는 그입니다.

"맞춤 옷은 체형을 다 확인하잖아요. 옷 입는 사람이 편하다는 장점이 있죠. 앞으로도 저희 가게 방문해서 옷을 맞추는 모든 분들이 만족할 수 있게끔 성의껏 노력하겠습니다. 잘 해드릴 테니까 편한 마음으로 오시기만 하면 됩니다."

*평택 에이큐양복점 주소: 평택시 쇼핑로 6-2 1층. 영업시간: 오전 10시 ~ 오후 8시(화요일 휴무). 양복, 양장, 드레스 등 예복 취급. 제작 기간 2주 소요.

/배재흥기자 jhb@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