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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수원사업장 일대 전경. /경인일보DB

"오늘 저녁 술 한잔 할까?"
"어디서?"
"나혜석 거리"

수원시 인계동 경인일보 본사 뒤쪽에는 '나혜석 거리'라는 이름이 붙여진 장소가 있습니다. 아니군요. 정확히는 나혜석 거리 인근에 경인일보가 위치 해 있다는 게 맞는 말입니다. 퇴근 무렵이면 편집국 곳곳에서 '나혜석 거리'로 가자는 대화가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대폿집 여럿이 모여 있어 청춘부터 직장인들까지 저녁이면 나혜석 거리로 모여듭니다.

나혜석 거리는 수원 출신 나혜석(1896~1948)의 이름을 땄습니다. 작가이자 화가, 무엇보다 여성 인권을 주장한 나혜석의 삶은 1948년 서울 용산구청 앞에서 무연고자로 숨질 때까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나혜석 거리 한 편에 자리잡은 나혜석 동상 아래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죠.

"비극은 가장 비극적 결말일 때 패배가 아닌 승리라고 니체가 말했듯, 이 세속적인 삶은 파멸하였을 망정 자기 시대를 정직하게 살다간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의 나혜석은 결코 패배하지 않았다"

나혜석은 '인형의 가(家)'에서 "남편과 자식들에 대한 의무같이 내게는 신성한 의무 있네.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사명의 길로 밟아서 사람이 되고져"라고 노래했습니다. 18세에 여성의 권리를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고, 여성 최초로 서울서 유화 전시 개인전을 열었고, 역시 여성 최초로 세계 일주 여행을 떠났으며, '이혼 고백서'를 대중에게 공표한 자유인 나혜석은 뒤늦게(1990년대 후반이 돼서야)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겐 '화녕전작약'이란 작품이 있습니다. 앞에 있는 '화녕전'은 수원 행궁 속 전각인 화령전을 말하고, 작약은 우리가 알고 있는 꽃 작약을 뜻합니다. 화령전 앞에 핀 작약을 묘사한 유화입니다. 이 작품의 소유자가 누구인지 아시나요? 바로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입니다.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이라고 불리는 소장품 중 박수근의 작품은 강원도 양구에 이중섭의 작품은 제주도로 김환기와 천경자의 작품은 전라남도로 보내졌습니다. 작가의 연고에 따른 배치였는데 이 중 나혜석의 작품, 그 중에서도 수원 행궁을 그린 '화녕전작약'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향했습니다.

양구, 제주도, 전라남도와 달리 수원에 '화녕전작약'을 담기 적당한 미술관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것이 이유일수도 있겠습니다. 수원에 '수원시립아이파크미술관'이 있으나, HDC현대산업개발이 수원에 6천668세대 아파트를 짓는 과정에서 기부채납한 미술관입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단견, 삼성이 현산이 지은 미술관에 소장품을 기증할 이유는 없겠다 싶습니다.

수원은 이른바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열성입니다. 이 회장의 선영이 수원에 있기도 할 뿐 더러 '수원 삼성'이란 역사를 지니고 있어서 입니다. 호암미술관을 품은 용인도 이건희 미술관을 말하고, 단원 김홍도의 도시 안산 역시 이 회장의 소장품 유치를 원하고 있습니다. 전국적으로 이건희 미술관 유치를 희망한 지자체만 10곳에 달합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낯 뜨거운 유치 경쟁'이란 말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이건희 미술관 유치는 소장품을 가져오면 지역이 발전될거라고 믿는 지역 이기주의의 표출일까요? 거인이 수집한 소장품 덕을 보려는 정치인의 표 계산일까요? 간단치 않은 이 문제를, 수원이란 지역의 눈으로 들여다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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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화성사업장 일대 전경. /삼성전자 제공

■수원의 삼성, 혹은 삼성의 수원. 삼성은 어떻게 수원으로 왔을까?

삼성전자 본사는 수원에 있습니다. 수원시를 이르러 '삼성도시'라고 부르는 것도 본사와 연구소가 소재하고 있어서입니다. 삼성 반도체 사업장이 위치한 화성·용인·평택까지 묶어 '삼성 벨트'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수원은 삼성전자로부터 매년 2천억원 내외의 법인지방소득세를 세수로 거두고 있습니다. 올해 화성·평택이 삼성전자로부터 거둘 세수는 1천400억원·700억원 수준으로 예상됩니다.

삼성전자는 1969년 수원에 처음 자리를 잡았고, 이후 용인(1983년)·화성(2000년)·평택(2015년)으로 사업장을 확장했습니다. 세수에서 보듯 삼성전자가 경기 남부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합니다. 세금 수입 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협력업체, 이들을 아우른 고용규모까지 고려하면 '절대적'이라고 할 만큼 의존도가 큽니다.

경기 남부, 그 중 수원과 삼성전자는 유독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1969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원이 인구 100만의 거대 도시로 성장하는 배경에는 바로 '삼성전자'가 있었죠. 왜 삼성전자가 수원에 오게 됐을까요?

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겠습니다. 많이 돌려야 합니다. 1961년으로 가야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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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가 수원 원천동 일대에 사업장을 조성하기 시작한 1969년 당시 모습. /경인일보DB

1961년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5월 27일 비상계엄령을 해제하고 6월 10일 '부정축재자처리법'을 공포합니다. 전 정권과 결탁한 기업의 재산을 몰수하겠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고, 삼성 이병철 회장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박 정권은 중앙정보부(중정)를 핵심 권력 기관으로 삼았는데, 당시 육군 중령이었고 후에 수원에서 7선 국회의원을 하는 이병희(1926~1997)가 중정 서울지부장을 맡게 됩니다.

중정 핵심으로 부정축재자 처리 과정에서 이병철 회장과 만난 이병희 의원은 이 일을 계기로 인연을 맺습니다. 이후에 1967년 이 회장의 삼성이 전자 산업 진출을 꾀한다는 정보를 듣고, 수원 부지 매입을 타진하게 되죠.

경인일보 전 편집국장 이창식(1930~) 국장이 쓴 '이병희 평전'에 따르면 이 회장에게 처음 추천된 땅은 현재 원천동이 아닌 서수원 지역의 천천동이었습니다. 삼성전자가 논밭을 사들인다는 소문이 돌면 땅값이 오를 것이기에 30만평에 달하는 부지 매입은 비밀리에 이뤄졌는데, 당시 천천동 땅은 계곡이 있는 오지여서 평당 350원이면 거래가 가능했다고 합니다.

최종 결정 과정에서 이병철 회장은 "공장 부지로 쓰려면 계곡을 메꿔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아. 다른 땅을 구하시오"라고 퇴짜를 놓게 됩니다. 얼마 뒤 이병철 회장과 이병희 의원이 차를 타고 수원 변두리를 둘러보게 되는데 그 때 발견한 것이 바로 원천동 일대 전답. 수원 시민에게 공급하는 쌀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옥토였는데, 이 회장이 그곳을 적지로 지목한 것입니다. 천천동보다 땅값이 비싸서 싸게는 평당 460원, 비싸게는 1천600원을 주고 일대 35만평을 매입하게 됩니다.

삼성전자의 대형 사업장이 온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천천동 주민들의 실망감은 컸습니다. 이병희 의원이 이런 사정을 전달하자 이병철 회장은 그 즈음 삼성이 인수한 성균관대학교 일부를 천천동으로 옮기기로 결정합니다. '꿩 대신 닭'으로 성대 수원캠퍼스가 탄생한 것입니다. 1969년 삼성전자, 1970년 성균관대학교 자연캠퍼스가 들어서면서 수원은 마침내 '삼성도시'의 면모를 본격적으로 갖추게 됩니다.

1969년 1월 30일자 경인일보 1면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경기도청 이전 이후 대규모 기간산업체와 공공기업체가 수원에 이전 또는 신설되고 있어 도시발전에 일대 전환기를 맞고 있는 요즘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인 전자기계공장이 수원에 세워질 것이 29일 확정되어 벅찬 내일이 약속되고 있다. 수원에 세워질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전자기계공장은 삼성재벌에서 일본 산요전기와 합작투자로 총 예산 15억원으로 투입 관내 율전동 구운동 그리고 화성군 관내 반월면 입북리 일부 지역 35만평에 세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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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월 30일자 경인일보 1면.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이 수원시에 들어선다는 내용이 1면에 보도됐다.

■글로벌 삼성, 그리고 피렌체

수원의 삼성 혹은 삼성의 수원이라는 말이 성립할까요? 전자는 성립하지만 후자는 힘들지도 모르겠습니다. 50년의 세월이 흘러 삼성은 지역 테두리에 갇히지 않는 '세계 일류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비단 국내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전 세계 모든 주요국에서 삼성 제품이 판매되고 있으며, 생산기반도 전 세계로 흩어져 있습니다. 스페인 라리가의 바르셀로나가 더 이상 카탈루냐 지역 연고팀일 뿐이 아니라 온 세계인의 클럽이듯 삼성도 수원에만 국한되지 않는 것이죠.

수원을 비롯한 경기 남부 지자체에 미치는 삼성의 영향력은 여전합니다. 필수불가결이라고 할 정도로 깊은 관계가 형성돼 있습니다. 경기 남부 지자체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이건희 미술관' 유치전의 바탕에는 바로 이런 깊은 유대감이 배경에 있다는 게 제 관찰 결과입니다.

소장품만 2만3천점, 기증한 미술품 2천300점의 감정가만 3조원에 이른다는 이건희 컬렉션을 이 지역에 유치하려는 배경에는 50년이 넘는 유대의 역사와 현재도 계속되고 있는 삼성의 경제적 지배력이 있습니다.

오랜 기간 그 지역에 머물렀다고 해서 해당 기업의 유산 모두를 지역이 독점해야 한다는 논리는 무리한 것입니다. 이건희 컬렉션을 대중에게 돌려준 의도를 고려한다면 가장 많은 대중이 가장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소장품이 보관되는 게 옳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럼에도 지역에서 이건희 컬렉션 유치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화녕전작약'에서 보듯 이 지역을 다룬 작품조차 이곳에서 구경할 수 없다는 어떤 정서적 허탈감이 바탕에 있는 것 같습니다. 작약은 바로 지금, 5월~6월 개화합니다. 작약이 만개한 화령전 앞에서 나혜석의 화녕전작약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후끈 달아오른 이건희 컬렉션 유치전을 보다 보니 지역언론으로선 유치 희망을 자연스레 가지게 되는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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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이 그린 '화녕전작약'. 수원 행궁 화령전을 배경으로 그렸다./경인일보DB

이건희 컬렉션과 소장품 기증은 이탈리아 피렌체를 문예도시로 만든 메디치가의 활동과 비교되곤 합니다. 르네상스 당시엔 도시국가 단위로 상거래를 포함한 모든 행동반경이 정해졌기에 메디치가의 활동이 피렌체의 부흥으로 이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웠습니다.

글로벌 삼성은 이제 수원 뿐 아니라 경기 남부 여러 지자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고, 행동반경은 말 그대로 전 세계에 도달합니다. 현대의 수원에 르네상스 피렌체와 같은 낙수효과를 꿈꾸기가 더 이상 어려워졌다는 의미기도 할겁니다. 다만, 이건희 미술관 수원 유치의 맥락과 역사를 이해한다면 한 번 쯤은 고려해볼만한 '옵션'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