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의 경기만 일대는 간석지(해안에 퇴적물이 쌓여 생긴 개펄)가 넓게 발달했다.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에는 이 간석지를 소규모 간척사업을 통해 농경지나 염전으로 이용했다.
시흥 일대의 갯벌은 경사도가 평탄하고 점토와 모래가 적절하게 섞여 있어 염전 바닥을 단단하게 다지는 데 유리한 토질을 갖고 있다. 소금판이 단단해야 물의 침투가 적고, 수분 증발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또 주변에 큰 강이 없어 민물이 섞여들지 않아 해수의 염도가 높기도 했다. 한여름에도 비가 적고 일조시간이 길며, 봄가을은 건조하고 일조량이 풍부한 시흥의 기후도 염전이 발달하는 데 중요한 조건이 됐다. 지리적으로도 인천항과 가깝고 서울 등 소비시장으로의 유통이 원활할 수 있었다.
보통 염전은 겨울을 지내고 봄부터 소금 생산을 준비한다. 3월 말쯤이 되면 소금이 나오기 시작하는데 4~6월 사이 소금이 가장 많이 나온다. 네모 반듯하고 서글서글하게 생겨 단맛이 나는 소금은 염부들의 술안주가 됐을 만큼 맛이 좋았다.
시흥염전은 일본인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다. 하지만 해방 이후 한국전쟁 뒤에는 북측 실향민과 지역민들이 이 소금밭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소금 수요가 급증하면서 생산량도 함께 늘었다.
산업화의 바람이 시흥에도 불던 시기, 염부들의 기억에서 1970~1980년대 소금은 그래도 '잘 팔렸다'는 기억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는 갯골에 멍텅구리배(해선망어선)를 대면 질통으로 알소금을 날랐고, 이후에는 포장해서 배로 실어 날랐다.
그러다 작은 화물열차인 가시렁차가 생겼고 하얀 소금 포대를 가득 싣고 가까운 역까지 소금을 날랐다. 소금은 전국으로 팔려나갔고, 소비도 그만큼 많았다고 염부들은 떠올렸다.
국영기업 설립 이후 무탈 기원 '소금제' 지내
'사라지던 문화' 갯골생태공원 조성 일부 보전
시흥염전의 소멸에는 소금의 경쟁력 상실이 원인이 됐다. 소금 자체의 가격 하락이 큰 이유였는데 국토개발계획과 더불어 외국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소금이 들어오자 경쟁력이 떨어진 것이다.
당시 활동한 염부들 역시 "당시 소금 가격이 싸니까 인건비가 안 나온다고 했다"며 "외국에서 들어온 소금이 한국 소금의 반값밖에 되지 않아 타산이 안 맞았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사라져 가던 염전 문화는 시흥 갯골생태공원이 만들어지면서 일부 보전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소금 창고이다. 소금 창고는 소금을 저장하는 것은 물론 생산의 마지막 공정을 수행하는 기능을 갖췄다. 운반과 보관이 편리하도록 소금 결정지 인근에 만들었는데, 당시 이 일대 소금 창고는 수십 동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
염부 차태봉(70)씨는 염전 길이 온통 하얀 소금으로 쌓여 있던 때를 기억했다. 소금이 만들어지면 목도로 창고까지 날랐는데, 어깨에 메는 목도에 소금을 한가득 담으면 100㎏가량 됐다고 한다.
실어나른 소금이 마치 산처럼 쌓여 있던 창고. 현재 갯골생태공원에 남아있는 소금창고 2동은 우리나라 천일염전 소금창고의 원형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시흥의 천일염전은 전성기에 약 661만㎡에 이르렀고, 품질 좋은 소금을 생산해내는 천일염의 대표 생산지로 유명했다. 1963년에는 소금 생산과 매매를 하는 국영 기업체 대한염업 주식회사가 설립됐고, 이후 소래염전이 사라지기 전까지 회사에서는 한 해 동안 무탈하게 소금을 거둘 수 있게끔 고사를 지냈다. 이른바 '소금제'이다.
염전이 없어지고 한동안 다른 일을 하다 2003년부터 갯골생태공원에서 다시 염부의 삶을 살고 있는 김연순(77)씨.
소금제를 지내던 회사는 없어졌지만, 다시 염전을 꾸리게 되면서 동료들과 함께 단출한 고사를 지내게 됐다. 특별할 건 없었다고 한다. 첫 소금이 나면 그저 돼지머리와 막걸리 등을 올려놓고 절을 하며 풍요와 건강을 기원했다.
그러던 2018년 이곳에서 다시 소금제가 열리게 됐다. 시흥에코뮤지엄, 시흥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등은 예전 염전 문화를 복원하고 시민들과 함께 공유·계승하고자 소금제를 열었다. 그동안 잊힌 시흥염전의 염부들도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소금제 키트를 나눠주고 온라인으로 고사를 지냈다.
강석환 전 시흥시지속가능발전협의회 사무국장은 "소래염전이 폐염된 지 20년이 넘었지만 소금제를 통해 예전에 같이 일했던 동료를 만나고, 염부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에 고마워했다"며 "이것이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염전의 문화는 근현대사에서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며 "이 문화가 복원돼 계승해 나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먹고 살기 위해 농사를 짓고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염전 일을 하면서 살았던 거지."
염부는 임시직이 많았다. 현재 갯골생태공원에서 염전 일을 맡은 염부 김연순씨와 차태봉씨도 모두 17살 나이에 지금의 '아르바이트'와 같은 '작업수'로 시작했다. 추운 겨울에는 소금을 낼 수 없었으니 계절적 실직상태에 있다가 3월부터 다시 소금 내는 일을 시작했다.
힘든 염전 일에 빠듯했던 당시 생활도 떠올렸다. 차씨는 "어렸을 때 외상으로 쌀을 받아다 먹고 염전 일한 월급을 타면 갚아주곤 했다"며 "그만큼 먹고살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오분 대기조' 같은 생활도 일상이었다. 염부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차씨는 "저녁에 물을 넣고 새벽에 일찍 나와서 물을 뺐다. 아침에 또 물을 퍼대고 오후 5시 반에 소금을 거두는데, 소금이 많이 나오면 오후 9~10시가 돼도 다 못 끝냈다"며 "소금창고 안에 촛불 켜놓고 일을 했다"고 전했다.
그는 "비가 오는 날이면 더 했다"며 "대기하고 있다가 빗방울이 떨어지면 물을 다 빼서 집어넣었다"고 전했다.
폐염 이후 돌고 돌아 다시 염전으로 왔다.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이렇게 염전이 남아있는 것이 그들에겐 감사한 일이다.
차씨는 "정년 퇴임을 하고 4년 전부터 다시 염부일을 하게 됐을 때 소금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며 "소금 내는 거 보면 내 인생은 여기서 마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소금이 사양길이긴 하지만 이때까지 염전이 있었으니 동네를 떠나지 않고 살았던 것"이라며 "삶의 터전이고 직장인 염전은 다닐 수 있을 때까지 다닐 계획"이라고 밝혔다.
60년 가까이 소금 내는 일을 하는 김씨 역시 "이 일은 남 일이 아니라 내 일처럼 하는 거"라며 "소금밭에서 떨어지지 않는 나에게 소금은 내 인생의 전부"라고 말했다.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