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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82세가 된 김점선(가명) 할머니는 수원 영통 A아파트에 1998년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성남 태평동 단독주택에 살던 김 할머니가 수원의 첫 신도시 '영통'에 분양한 아파트를 사는 데 들인 돈은 단 몇 천 만원 수준이었다고 했습니다.

장맛비와 뜨거운 햇볕이 공존하는 7월의 어느 날 김 할머니는 같은 아파트에 거주하는 할머니, 할아버지 50명 가량과 함께 관리사무소를 찾았습니다. 이날은 전날 밤새 내린 비가 무색하게 햇빛이 쨍쨍한 무더운 여름 날이었습니다.

할머니는 "백화점처럼 사무실을 꾸며놓고 에어컨 아래 앉아 있는 연놈들을 작살내러 왔다"고 했습니다.

이 단지의 관리사무소에는 리모델링 동의서를 받고 있는 주민 3명이 있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3층 사무실을 즉각 폐쇄하라', '노인정 무시하는 동대표는 각성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관리사무소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이들의 단체행동은 곧 출동한 경찰에 의해 막혔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산됐죠.

김 할머니와 함께 관리사무소 진입을 시도한 목순덕(가명) 할머니는 "리모델링 한다는 현수막은 치렁치렁 달아 놓고, 경로당에서 리모델링 반대한다는 현수막을 붙여 놓으면 관리소에서 다 떼간다. 멀쩡한 아파트에 무슨 리모델링이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김점선 할머니는 "리모델링하면 지하 3층까지 주차장을 판다는데 그러면 재건축을 하지 무슨 리모델링을 하냐. 건물에 금이라도 가고 천장이 무너져 내리면 주민들도 반대 안하겠지만 집이 너무 멀쩡한데 왜 리모델링을 하려 그러냐. 돈을 2억 넘게 내야 하는데 곧 죽어도 그 돈은 없다. 내년에 죽을지 올해 죽을지 모르는 노인들한테 이 삼 년은 나가 살라고 하는데 그게 말이 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습니다.

A아파트 주위로 이미 리모델링을 결정한 단지가 여럿입니다. 800가구 규모 B단지는 시공사 선정을 완료했습니다. A아파트와 마찬가지로 1997년 말에 입주를 시작한 단지입니다. 앞서 이달 초엔 A단지와 규모가 비슷한 1천600가구 가량의 C단지도 시공사를 정했습니다. 이들 단지는 내후년부터 이주를 시작합니다. 

완공은 이르면 2026년. 인접 단지가 잇따라 리모델링 사업에 들어가자 A단지에 사는 노인들의 불안은 높아져만 갔습니다.

A아파트 경로당에 모인 노인들은 지난 5월부터 단지 내에 '리모델링 결사반대'라고 적힌 현수막을 걸기 시작했습니다. 적게는 1주일 길어도 2주일 내에 현수막은 철거됐습니다. 관리사무소의 허가를 받지 않는 불법 현수막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이들이 리모델링을 반대하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돈이 없고', '갈 곳이 없어서'라고 합니다.

리모델링 사업을 위해서는 세대당 2억원에서 3억원 가량의 투자와 2~3년 동안 이주할 주택이 필요합니다. 

5월을 기준으로 1년 전과 비교했을 때, 경기도 평균 전세 가격은 8천만원 넘게 올라 3억4천만원을 넘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전셋값이 높아지고 있어 전셋집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게 노인들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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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영통의 한 아파트단지에 노인들이 붙여 놓은 '리모델링 반대' 현수막 밑에 노인이 쉬고 있는 모습. /신지영 기자 sjy@kyeongin.com

리모델링은 리모델링 주택조합 설립→시공사 선정→안전진단→건축심의→사업계획승인→착공의 순서로 이뤄집니다. 

시공사 선정까지 진행된다면 사실상 사업이 본궤도에 오른 것으로 봅니다. 경기도에서 리모델링 조합이 설립된 아파트는 모두 62곳(4월 기준).

실제로 리모델링 움직임이 있는 곳까지 합치면 100곳 이상의 단지가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재건축은 안전진단에서 낮은 등급(D·E)을 받아야만 가능한데 비해 리모델링은 재건축의 허들인 '안전진단'을 쉽게 넘을 수 있어 의지만 있다면 추진이 쉽습니다.

리모델링은 아파트 소유주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얻으면 추진이 가능합니다. 30%가 반대해도 사업이 이뤄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수원 영통은 수인분당선이 지나고 인덕원선이 예정된 노른자 땅으로 꼽힙니다. 

영통 아파트들은 리모델링만 된다면 투자금보다 더 많은 수익을 거둘 것으로 전망됩니다. 실제로 지난해 초만 해도 2억원 대에 거래되던 A아파트 시세는 리모델링 기대감이 반영된 최근엔 5억원까지 치솟았습니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부동산 가격 상승, 지자체가 마련한 리모델링 지원 정책, 인접한 단지 뿐 아니라 분당과 같은 도내 대표 신도시들의 리모델링 추진 사례까지 리모델링이 안 될 이유는 없고 해야 할 이유만 남아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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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모델링 대상인 경기도 한 노후 아파트 전경 /경인일보DB

고양 일산, 부천 중동, 안양 평촌, 성남 분당, 군포 산본으로 대표되는 1기 신도시가 지어진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이 지역의 아파트 단지는 모두 리모델링 기준인 준공 15년을 충족합니다. 상업·교통·교육 인프라가 완성된 1기 신도시에 부족한 건 단 하나 '신축'입니다. 리모델링이라는 귀결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A아파트 노인정에 모이는 노인이 50명 가량이라고 합니다. 1천800세대에 달하는 A아파트에서 이 노인의 숫자는 극히 소수라 할만 합니다. 자식이 없었던 김 할머니는 몇 년 전 남편을 떠나보내 홀로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눈을 감고도 노인정을 찾아갈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동네, 단지 조경된 나무가 여름이면 얼마만큼 풍성하게 잎을 품는지 그리고 언제쯤 가지치기를 할지 보지 않고도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훤합니다.

김 할머니는 요즘 밤에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숨이 끊어질 때까지 살거라고 생각했던 이 집에서 떠나야 할지 모른다는 그 불안감 때문입니다. 1기 신도시 계획인구는 110만명이 넘고, 준공부터 거주해왔던 당시 중년 세대는 이제 노년으로 접어들거나 이미 고령층이 됐습니다.

늙은 '1기 신도시'에 거주하는 노인 인구는 최소 수십 만 명으로 추산됩니다. 신도시이기에 이 노인들 대부분이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으며, 이 구축 아파트는 곧 리모델링의 대상입니다.

리모델링 광풍이 수도권 구축 아파트를 휩쓸고 있습니다. 그 열기 속에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어 보입니다.

/신지영기자 sjy@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