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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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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얼마 서 있는 가운데 예술인 아파트가 가장 높게 솟아 있다.
동마다 채색을 달리하여 유난히 눈에 띄었다.
예술인 아파트 입주 안내가 수없이 날라오던 장본이 바로 저 아파트다.
유수한 예술인들이 신청을 했다고 어느 시인이 크게 떠들던 말이 머리를 스쳤다.

<구인환 소설 '춤추는 낙조' 중에서>

 

새마을운동 정신에서 출발한 예술인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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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 아파트 조감도. /이기원 감독 제공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경제와 사회·문화 전반에서 근면·자조·협동 정신과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바탕으로 전개됐다. 

 

그 시절 예술인들은 소위 잘나가는 일부를 제외하고 자생적으로 살아갈 여건이 좋지 않았다. 이에 영화계 이신명 감독과 심우섭 감독, 이기원 감독을 비롯해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예술인복지재단을 만들었다. 재단의 1차 목표는 예술인들의 '내 집 갖기'였다.

이기원 감독은 "서울의 전셋값으로 지방에 가면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시작했다"며 "당시 반월지구에 공단을 만들고 서울 인구 분산 정책의 특혜 등이 있어 안산에 아파트를 짓게 됐다"고 설명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삼익건설이 1984년부터 공사를 시작했고 1986년 본격적인 입주가 이뤄졌다. 

복지재단 만들어 13개동 1458가구 최초의 20층 아파트 건립
우여곡절끝 1986년 입주 '환경미화지구' 관광·견학 오기도

예술인 아파트는 13개동 1천458가구로 지어진 최초의 20층 아파트다. 원래 14개동이었는데, 쾌적한 주거환경을 위해 1개동을 줄였다고 한다. 네모 반듯한 복도식 아파트가 양쪽으로 줄지어져 있고, 중간에는 타워형 디자인을 채택했다.

단순히 거주에 목적을 두는 것이 아니라 창작공간으로 활용하자는 것이 건립 취지였다. 이 때문에 미적으로도 남다른 모습을 자랑했다. 회색빛 아파트로 가득한 곳에서 동마다 분홍, 초록 다양한 색을 발코니 난간에 칠했다. 최초의 환경미화 지구라고 해서 관광도 오고, 주택 견학도 왔다는 것이 이 감독의 이야기이다.

아파트는 예술인들의 편의성을 위해 서울까지 가는 10여 대의 전용 버스와 당시만 해도 드물었던 전화도 40대 갖췄다. 복합상가인 스타프라자는 입주민의 편리한 생활과 은퇴한 예술인들의 일자리 창출을 돕기 위해 지어졌다.

 

그들만의 삶과 낭만이 있었던 곳

예술인복지재단에서 결성한 예술인주택추진위원회는 분양을 담당했다.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산하 문화예술인들에게 공문도 보내고, 광고도 하며 입주율을 높이고자 했다. 결과적으로는 애초 취지처럼 예술인에게 모든 가구가 분양되지 않았다. 하지만 문학·방송·영화·미술 등 다양한 분야의 예술인 1천여 명이 입주해 이목을 집중시켰다.

 

1986년에 입주해 지금까지 예술인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장석훈 촬영감독은 "늦게까지 일을 하고 들어오다 보면 서로의 아파트에 불이 켜져 있을 때가 있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없이 그 집으로 향했다"며 "응접실에서 커피를 마시기도 하고, 라면도 끓여 먹으며 새벽까지 마작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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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 아파트 완공 전 현장. /이기원 감독 제공
 

단지내 무대서 공연행사… 지역문화예술 본격 태동 마중물
'야심찬 공동체 공간' 시행착오… 시간 흐르며 대부분 떠나

1988년 즈음에는 아파트에 차가 200여 대 정도밖에 없었다. 장 감독은 종종 동료들을 태워 서울 사당에 내려주곤 했는데, 이들이 고마움에 장 감독의 차량 좌석에 몰래 돈을 끼워 넣어 우연히 청소하다 발견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한 아파트에 모여 살았기 때문에 생긴 그들만의 추억이다.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아파트인 만큼 단지 내에 무대도 만들었다. 이 무대에서는 다양한 공연행사가 열렸고, 인근 공원에서는 영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당시 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면 예술인아파트 무대에서 하는 공연을 보는 인파들이 엄청났음을 알 수 있다. 일반 세대가 점차 늘어나면서 무대는 사라지고 주차장이 됐지만, 아직도 그때를 추억하는 이들이 많다.

 

아파트, 안산 문화예술의 태동이 되다

예술인 아파트로 인해 문인, 국악, 영화를 포함한 다양한 예술인이 안산에 터를 잡고 살게 됐다. 이곳의 예술인들은 안산의 문화예술이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된 중요한 마중물 역할을 했다.


1988년 당시 한국문인협회 안산지부를 시작으로 1990년에는 국악협회 안산지부, 영화인 협회 안산지부,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안산지부(이하 안산예총) 등이 잇달아 인준·가입됐다. 특히 안산시로 승격한 지 4년 만에 안산예총이 정식으로 인준받은 것은 경기도 내에서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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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 아파트 무대에서 공연하는 모습. /이기원 감독 제공

이들의 활동에는 지역종합예술제인 '별망성예술제'도 빼놓을 수 없다. 예술인 아파트에서는 지역민을 위해 예술인 친선의 날을 열었는데, 이것이 이후 안산예총에서 주최하는 별망성예술제로 바뀐 것이다.

이와 함께 예술인들은 단원예술제, 상록수영화제 등의 문화제도 만들었으며, 안산지역의 다른 문화제가 성공적으로 치러지는 데 이바지하기도 했다.

안산 시사에서는 외지에서 온 예술인들이 안산의 역사와 문화, 지금까지 길들여지지 않은 민속과 풍습을 찾아 나섰고, 안산의 문화예술 활동은 시 승격을 전후한 시기에 전통문화 사업을 주축으로 한 문화원과 예술인 아파트를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구성된 예술인들의 활동이 시발점이 됐다고 해석하고 있다.

 

쉽지 않았던 시도, 의미 있었던 도전

예술인 아파트는 정신적으로는 풍요롭지만, 경제적으로는 힘들었던 예술인들을 위해 야심차게 만들어진 공동체 공간이었다. 하지만 아파트를 만들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주 활동 무대인 서울에서 지방으로 오려는 예술인이 많지 않았고, 예술인과 일반 주민들 간의 의견 차이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여러 이유로 아파트에 거주하던 예술인들 대다수가 떠나갔다.

이 감독은 "예술인들이 갖는 생각은 어떻게 보면 가상의 세계이다. 예술인 아파트는 그런 이들이 현실에 들어와 창작에 매진할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며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흩어진 게 아쉽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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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인 아파트에서 열린 ‘반월주민과 예술인 친선의 날’. /이기원 감독 제공

이제는 이름만 남은 보통의 주거단지가 됐지만, 이곳에서 만들고자 했던 문화예술 공간과 공동체로서의 다양한 시도는 분명 의미가 있고 눈여겨 볼만하다. 또 이곳에서 삶을 살아온 이들에게는 단순한 거주지를 뛰어넘는 잊을 수 없는 공간이기도 하다.

장 감독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이곳에서 젊은 시절을 보낸 만큼 정도 많이 들고 애착도 있다"면서 "자녀도 키우고 영화 생활도 한 이 아파트는 나의 역사를 함께 지내온 곳이다"라고 말했다.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