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인 독일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Leipzig Gewandhaus Orchester의 시작은 17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2명으로 시작된 이 단체는 개인의 저택을 순회하면서 연주활동을 펼쳤다. 이들의 연주 소식에 주민들의 관심 또한 늘었고, 그만큼 단원과 청중도 증가하면서 더 큰 공간이 필요하게 됐다.
그로 인해 카페로 연주회 장소를 옮겼으며, 이도 부족하게 되자 1781년 직물업자들이 모여서 회의도 하고 그들이 만든 제품을 전시하고 보관하는 용도로 지어진 건물인 게반트하우스 (의복협회 회관)를 연주회장으로 사용했다.
이와 함께 단체의 상주공간인 게반트하우스를 오케스트라의 명칭으로 확정했다.
1884년이 되어서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위한 새 게반트하우스가 지어졌다.뛰어난 합주력과 그에 상응하는 음향이 어우러지면서 오케스트라의 명성은 더욱 올라갔다. 이 게반트하우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됐으며, 현재의 게반트하우스는 1977~1981년에 개축한 것이다.

우리나라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광복 직후 시작됐다. 1945년 9월 우리나라 최초의 오케스트라인 고려 교향악단이 창단했다.
2년 후 인천에서도 첫 오케스트라가 탄생했다. 인천 관현악단은 1947년 12월 인천공회당에서 창단 연주회를 개최했다. 인천 최초의 오케스트라가 창단한 순간이었다.
김기룡 단장과 박수득 악장을 중심으로 현악과 관악, 타악 주자 23명으로 구성된 인천 관현악단은 인천공회당과 애관극장 등에서 공연했다. 한국전쟁의 발발로 활동이 오래가진 못했지만, 전쟁 후 설립되는 지역 교향악단의 기반을 닦았다.
광복 2년후 23명으로 구성된 '인천관현악단' 탄생 12월에 첫 연주회
홍예문 부근 '인천공회당'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지역중심 공연 공간
시민관서 주로 활동한 '애협교향악단' 신진음악인 기회 마련 노력도
인천 관현악단이 창단 연주회를 연 인천공회당은 한국전쟁 이전 인천의 중심 연주 공간이었다. 홍예문 부근 '인천공회당'은 한국전쟁 이전까지 지역중심 공연 공간
시민관서 주로 활동한 '애협교향악단' 신진음악인 기회 마련 노력도
1923년 홍예문 부근(현재 인성여고 다목적관 자리)에 2층 규모의 붉은 벽돌 건물로 지어진 인천공회당은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 이 공간에선 현제명의 연주회를 비롯해 홍난파에게 바이올린을 배운 박종성의 연주회, 원종철 독창회 등이 개최됐다.
인천 관현악단에서 시작된 인천 오케스트라의 역사는 1953년 설립된 경기지구 육군정훈관현악단으로 이어지며, 이 악단은 1956년 창립하는 '인천음악애호가협회'의 산하 교향악단인 인천애협교향악단으로 재발족했다.
애협교향악단은 후일에 '그리운 금강산'으로 큰 명성을 얻는 작곡가 겸 지휘자 최영섭을 비롯해 박종성, 주원기 등 단원 30여명으로 구성됐다.

1957년 11월 인천시민관에서 열린 인천애협교향악단의 제4차 연주회의 지휘는 최영섭이 맡았으며, 당시 중학교 1학년생이었던 백건우가 무대에 올라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a단조'를 협연했다. 이처럼 애협교향악단은 신진음악인들에게 기회의 장을 마련해주기 위한 활동도 벌였다.
애협교향악단이 연주회를 연 인천시민관은 1957년 문을 열었다. 한국전쟁 때 함포를 맞고 인천공회당이 소실된 가운데, 휴전 이후 짓기 시작해 1천여석 규모로 개관한 것이다.
인천시민관은 1974년 인천시민회관이 문을 열 때까지 인천의 중심 공연장 역할을 했다. 콘서트와 함께 연극, 쇼, 영화 상영, 웅변대회 등 다채로운 문화행사가 열렸다.
최영섭의 활동도 인천시민관에서 이어졌다. 그는 1964년 동아방송 편곡자와 지휘자로 스카우트되어서 서울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 애협교향악단을 이끌었다. 이 시기에 인천 필하모닉이 창단했다. 애협교향악단원들은 새 오케스트라에 편성됐다. 10여회의 연주회를 연 인천 필하모닉은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모체가 되었다.

초대 상임지휘자였던 김중석과 인천시립교향악단은 1966년 6월1일 인천시민관에서 창단 연주회를 개최했다. 창단 연주회가 열린 날은 '제2회 인천시민의 날'이기도 했다.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국내 네 번째 시립교향악단이 창단하는 순간이었다.
창단 연주회의 레퍼토리는 '인천 시민행진곡'에 이어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서곡'과 '피아노 협주곡 26번', 슈베르트 '교향곡 8번, 미완성' 등으로 구성됐다.
창단 공연에 이어 보름 후 KBS 라디오에 출연한 인천시립교향악단은 방송을 통해 전국에 창단 신고도 했다.
인천시향의 첫 상주공간이었던 인천시민관은 문을 연 지 20년 가까이 되면서 노후화 또한 빠르게 진행 중이었다. 인천시향은 1974년 주안에 개관한 '인천시민회관'으로 둥지를 옮겼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인천시민회관은 1천388석 규모로, 당시로선 상당히 큰 규모의 문화공간이었다. 공간의 크기만큼이나 각종 문화예술 행사가 활발히 열렸다.
인천시향 초대 상임지휘자로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김중석에 이어 1984년 당시 한국 음악계의 원로였던 임원식이 상임지휘자로 부임해 인천시향의 비약적 발전을 이끌어냈다.
초창기 인천시향의 주 레퍼토리는 하이든과 모차르트, 베토벤의 초기 작품을 비롯해 낭만주의 전반부까지였다. 임원식이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연주하며, 레퍼토리를 확대했다. 인천시향은 일신한 연주력을 앞세워 시민의 발걸음을 인천시민회관으로 이끌었다.
필하모닉이어 1966년 시향 창단… 임원식 상임 지휘자 부임후 '비약'
집회장소되기도 한 인천시민회관 철거후 문화예술회관 1994년 개관
이 시기 인천시민회관 앞 사거리에선 5·3 인천 항쟁 등 군사 정권에 대항해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집회 장소가 되기도 했다. 1998년 무직자를 위한 쉼터로 활용되기도 했으며, 1994년 남동구 구월동에 지어진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현재 명칭은 인천문화예술회관)이 정착되면서 2000년 철거됐다. 집회장소되기도 한 인천시민회관 철거후 문화예술회관 1994년 개관
현재 시민회관 자리엔 녹지 공간과 휴게 시설을 만들어 시민 공원으로 조성했다.
1994년 개관한 인천문화예술회관으로 상주공간을 이전한 인천시향은 새 상임지휘자로 금노상을 영입했다. 이때부터 4관(管) 편성 오케스트라로 확립된 인천시향은 금노상과 함께 말러의 '교향곡 2번, 부활'을 1996년 선보였으며, R. 슈트라우스의 '알프스 교향곡'도 연주했다.
제7대 지휘자였던 정치용은 2016년 정기연주회에서 R. 슈트라우스의 '영웅의 생애'를 연주하며 인천시향 50주년을 기념했다. 정치용에 이어 2018년 10월 바통을 이어받은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 이병욱이 현재 인천시향을 이끌고 있다.

인천문화예술회관을 상주공간으로 사용하는 인천시향은 2018년 송도국제도시에 개관한 아트센터 인천에서도 매해 1회 정도 정기연주회를 선보이고 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