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세상의 이치들이 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그렇다. 제 아무리 유명한 아동 전문가가 쓴 육아책을 읽고, 백번 천번 강의를 들으며 자세한 설명을 듣는다 해도 알 수가 없다.
아이를 만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아이가 없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또 다른 세상은 어른을 눈 뜨게 하고 깨닫게 한다. 그래서 직접 아이를 경험해보지 않으면 가슴으로 이해할 수 없다.
시흥의 어른들도 마찬가지다. 다세대 주택이 밀집된 골목에 줄지어 주차된 차량들이 아이들의 시야를 가리고 자칫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봐야 그 위험을 알 수 있었고, 제대로 된 놀이터가 없는 공원은 방과 후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더욱 방황하게 만든다는 것을 담배 연기 자욱한 공원의 모습을 봐야 알 수 있었다.

몰랐다면, 차라리 편하게 살 수 있었겠지만 알게 된 이상 움직이지 않고는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다. 적어도 시흥의 어른들은 이제 그렇게 됐다.
지금부터 들려줄 이야기는 아이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시흥 어른들의 놀라운 '성장기'다.
열두번째 이야기 - 어른도 자란다
어린이도서관을 없애자고요?
임병택 시흥시장은 정왕동에 있는 어린이도서관을 없애자는 공무원들의 제안에 어리둥절했다. 이유를 물으니, 이용률이 너무 낮아 다른 시설로 전환하는 게 효율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임 시장은 그 길로 정왕동에 갔다. 학교 수업이 끝난 아이들 이 삼삼오오 동네 어귀마다 놀고 있었다. 정작 아이들이 있어야 할 동네의 어린이도서관과 공원에는 아이들이 없었다. 동네를 한바퀴 돌아보니, 담배 연기가 곳곳서 피어올랐고 마작, 태극권 등을 하며 큰 소리로 떠드는 어른들로 공원이 점령됐다.
동네를 배회하는 아이들을 보고 나니, 그나마 아이들 공간이라고 만들어 둔 어린이도서관을 없애는 결정을 할 수 없었다. 그러면 이 아이들은 어디를 가야 하는 걸까, 한숨부터 나왔다.

도서관을 없앨 게 아니라 도서관을 더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큰솔공원 한 귀퉁이에 덜컥 아이들을 위한 건물을 올리는 정책을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초선 자치단체장인 임 시장의 1호 정책이 됐다.
정치셈법으로 보면 영리하지 못하다고 타박 받기 딱 좋다. 어린이는 투표권이 없어서 그런지, 어린이 정책은 늘 후순위로 밀린다. 신경 쓸 필요성도 잘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효율성 때문에 어린이도서관마저 없어질 위기 놓인 아이들
정왕동 직접 찾아 동네 배회하는 아이들 본 임병택 시흥시장
오히려 더 만들기로 결심하고 1호 정책으로 설계비부터 편성
다문화 사업 물색하던 어린이재단에 운영 맡기고 지원 약속
그런데 취임하고 첫 추경(추가경정예산)에서 임 시장은 설계비부터 꽂아(?)넣었다.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해서다. 정왕동 직접 찾아 동네 배회하는 아이들 본 임병택 시흥시장
오히려 더 만들기로 결심하고 1호 정책으로 설계비부터 편성
다문화 사업 물색하던 어린이재단에 운영 맡기고 지원 약속
차곡차곡 아이들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임 시장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단순한 도서관이 아니라, 정왕동 아이들과 부모들이 편안하게 와서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은데, 공직 사회에 맡기기엔 그 역할을 맡기기엔 특유의 경직성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던 차에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서 다문화 첫 사업을 시행할 지역을 물색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임 시장은 무릎을 탁 쳤다. 도서관을 없애자는 말에 정왕동을 달려갔던 것처럼, 정왕동 지도를 싸 들고 서울에 있는 재단 본부에 찾아가 이제훈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회장을 만났다. 이미 짓고 있는 건물 외관은 고칠 수 없지만, 건물의 쓰임을 일임하겠다고 제안했다. 시흥시는 정왕동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면 어떠한 지원이든 하겠다면서, 대한민국 최고 아동전문가들이 우리 아이들을 맡아 달라고 읍소했다.
서로의 진심이 통했다. 담배연기만 자욱하던 정왕동 큰솔공원에 시흥다어울림아동센터가 아이들을 품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방과후에 동네를 배회하지 않아도 됐다. 언제나 두 팔 벌려 환영해주는 어른들이 곁에 나타났다.
정말 궁금했다. 임 시장은 왜 정왕동 아이들에게 이렇게까지 공을 들일까.

미안해서 그래요. 미안해서…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그의 표정은 정말 미안함이 가득했다.
"저도 초등학생 자녀들이 있어요. 우리 아이들은 코로나 시국에 학교를 못 가는 대신 학원도 가고 부족한 것들을 채우면서 지내잖아요.. 그런데 다른 아이들이 그렇지 못하는 걸 직접 눈으로 보니까 정말 미안했어요"
코로나19 때문에 학교·학원도 못가는 아이들에 미안한 마음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은 생각
같은 마음·생각 가진 시흥의 어른들, 이제 행동하기 시작하다
몰랐다면 모를까… 알게 된 이상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은 생각
같은 마음·생각 가진 시흥의 어른들, 이제 행동하기 시작하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야기를 발굴해서 연재를 이어나가는 나의 마음도 미안함에서 비롯됐다. 몰랐다면 모르겠지만, 알게 된 이상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 그것이 미래세대인 아이들을 위해 어른인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 같았다. 그리고 나 같은 평범한 어른보다 조금 더 실질적인 무엇을 할 수 있는 어른이 같은 마음이라는 데 묘하게 가슴이 벅찼다.
그리고 임 시장과 같은 시흥의 어른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있다는 소식이 귀에 전해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공지영 기자 jyg@kyeongin.com
*기자 개인 사정(병가)으로 인해 고르지 못하게 연재를 이어 나간 점, 머리 숙여 양해를 구합니다. 앞으로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담아 성실하게 독자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 안전하고 즐거운 추석 명절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