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항 이후 교회와 학교가 설립되면서 이 두 곳이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다. 인천 역시 교회와 학교가 음악 활동의 중심지였는데, 다른 도시와 차이점이 있다면 외국 군함의 입항과 함께 항구에서 울려 퍼지는 군악대의 연주 소리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우선 '교회'는 서양음악의 보급 및 활동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선교사'는 서양음악 전달자 및 음악교사로서의 역할을 하였으며, 찬송가의 반주 악기인 '풍금'은 서양의 평균율이라는 음감각과 화음감이라는 음감을 심어주었고, 교회에서 찬송가를 익힌 신자들은 후에 서양음악 애호가와 청중으로 발전을 하게 된다.
-'인천근현대문화예술사연구'(인천문화재단 刊)에 수록된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의 '서양음악의 수용과 인천' 중에서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에 의해 설립된 내리교회(인천 중구 내동)는 우리나라의 첫 개신교회다. 예배당에서 찬송가가 불리고, 이후 교세가 번창하면서 교회 안의 찬양이 민간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1892년 24세의 미북감리교회 여선교사 마거릿 벵겔(Magaret J. Bengel)은 제물포(인천)의 여성 선교를 위해 담당 선교사로 파견된다. 제1대 전도부인(한국 개신교 초기의 유급 여성 사역자)으로 황해도 곡산 출신의 미망인 백헬렌도 파견돼 벵겔과 함께 본격적인 여성 선교를 시작한다.
당시 우리나라 여성 대다수는 글자를 몰랐다. 이에 벵겔은 전도부인 강세실리아에게 한글과 찬미가를 가르치게 했다. 벵겔은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온 아이들이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엄마들보다 더 빨리 깨우치고, 찬미가도 잘 부르는 모습을 봤다.
그로 인해 아이들만을 위한 교육 선교를 구상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학교인 인천 영화학당(현재 영화초등학교)이 그해 문을 열었다.
'영화 백년사(1892~1992)'(이성삼 박사 집필·영화학원 刊)에 따르면, 1890년 한국에 온 벵겔은 이화학당의 메리 스크랜튼(Mary F. Scranton) 여사의 총애를 받아 1891년부터 이화학당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성악과 오르간을 가르쳤는데, 주로 성악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처럼 음악적 소양이 풍부했던 벵겔이 1892년 영화학당 설립 후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음악 교육을 했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또한 '영화 백년사'에는 아펜젤러가 쓴 '대한그리스도인회보' 1900년 7월18일자를 인용해 그해 6월23일 개최된 영화학당 방학식 모습을 묘사한 구절이 있다. 글에선 당시 방학식이 폐회 찬미를 부르면서 마무리되었음을 알려준다.
벵겔 등 여성 선교… 최초의 초교 영화학당 문열어
1900년 전후 일제가 허용한 서양음악 학교서 교육
한국전쟁 끝나고 우리나라 첫 '메시아' 전곡 연주회
이처럼 1900년을 전후한 인천에선 교회와 학교에서 자연스럽게 서양음악(합창)을 접할 수 있었다. 이후 일제 시기의 일본 통치자들은 의도적으로 우리 음악을 탄압했다. 때문에 교회와 학교에선 찬송가와 함께 일제가 허용한 일부 서양 음악을 교육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제 시기와 해방 이후까지의 시대 상황은 '합창의 도시, 인천'의 토대가 됐다. 이를 바탕으로 한국전쟁 후 인천에서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활동했으며 '그리운 금강산'을 작곡하는 최영섭(92), 국내 합창 음악의 거장으로 불리는 윤학원(83) 전 인천시립합창단 예술감독 등은 '인천 합창 문화'의 결실이다.
최영섭은 내리교회 찬양대를 이끌며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시아'를 수차례 지휘했고, 윤학원 또한 변성기 이전까지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를 부르는 등 자연스럽게 합창을 접한 후 음악인의 길을 걸었다.
한국전쟁 후에 처한 혼란기에 인천에선 우리나라 최초의 '메시아' 전곡 연주회가 개최된다. 내리교회 성가대는 '메시아'를 번역해 전곡을 부르기로 한 거였다. 전쟁 후 빈곤과 함께 혼란한 상황을 종교로 극복하자는 취지에서 계획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성가대원인 이선환에 의해 전곡 악보가 3권(총 1천200여권)으로 만들어졌다.
악보는 1954년 2월부터 6개월에 걸쳐 등사 원지에 철필로 일일이 그려 등사기로 인쇄해 완성됐다. 악보의 완성 후 성가대원들은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으며, 이 같은 노력으로 그해 성탄절을 앞두고 역사적인 연주회(지휘·김춘하)가 열렸다.
제2회 연주회가 이듬해 열리는 등 제3회 연주회까진 매해 개최된 가운데, 제3회 연주회의 지휘를 최영섭이 맡았다. 이후 해마다 연주회를 여는 게 여의치 않아지면서 최근까지 30회 정도의 연주회를 선보이고 있다.

교회 성가대와 학교 합창단 외에 인천 지역에서 발족한 합창단의 역사는 19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비록 내리교회 성가대원이 주축이 되긴 했지만 그해 인천시합창단(지휘·최영섭)이 발족했다.
1958년 창단한 호산나합창단은 1957년 인천 기독교 사회관 고등부 합창단으로 창단해 이듬해 호산나합창단으로 명칭을 바꿨다. 초대 지휘자는 권경호였다. 2005년 호산나동문합창단이 창단해 명맥을 잇고 있다.
1966년에는 대한어머니회 합창단이, 2년 후에는 샤론합창단이 창단했다. 인천남성합창단, 인천장로성가단, 한국부인회합창단은 1971년 창단하며, 인천YWCA합창단(1974년), 로고스합창단(1976년), 인천여성합창단(1977년)으로 이어지고 있다.
1978년 시민회관서 '기금 마련' 역사적 연합연주회
이를 통해 기금이 마련된 가운데, 이듬해 12월22일 인천시민회관에선 내리교회와 중앙감리교회, 제3장로교회, 송현성결교회로 구성된 연합성가대와 인천시립교향악단의 '메시아'가 울려 퍼졌다.
1981년 인천시립합창단이 창단한 가운데, 시립합창단은 2016년부터 인천합창대축제를 열고 지역 합창단과 시민의 만남을 이끌어내고 있다. '인천 합창 문화' 또한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부터 코로나19로 인해 모임이 규제를 받다 보니, 아무래도 함께 모여서 노래하는 합창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공연보다는 내실을 다지는 시기로 삼은 지역 합창단들은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올 때 보다 큰 음악적 감동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인천 합창의 역사와 발전 과정은 그 자체로 '인천 문화'이다. 이는 진정한 의미의 지역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김영준기자 kyj@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