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권식씨
대곡일기를 쓴 신권식씨. 2021.12.27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

"매일같이 조반 식사가 끝나면 동리 한복판 양지바른 곳에 모여 한나절이나 별수 없는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요즈음 대화의 초점은 아산만 개발에 대해 정부에서 발표 이래 기대와 흥분으로 한나절이나 이야기로 날을 보낸다(1974.2.2)", "조반 식사 후에 모처럼 만에 마을 가 보니, 마을 마당의 화제는 남양 간척지 관게(관계)로 분분하다. 옥천 청원 등을 차자(찾아) 다니면서 간사지 논을 대여 밭기(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1977.11.9)"

"뜻 없는 歲月(세월)이 如流(여류)하는 동안 우리의 後面(후면)에 남는 것은 歷史(역사)의 記錄(기록)이다" <'대곡일기' 1962년 1월1일자 중에서>

날마다 그날그날 겪은 일이나 생각, 느낌을 적는 개인의 기록을 우리는 흔히 '일기'라고 부른다. 대수롭지 않은 한 개인의 일상쯤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역사의 흐름에서 일기는 중요한 사료로 그 존재를 드러내 왔다.

특히 일기는 전개되는 사건을 당일 기록함으로써 맥락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 어렵다. 이 때문에 사회의 변동을 파악하는 데 있어 좋은 자료가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정제된 기록보다 사람 냄새가 묻어나는 특징도 있다.

이러한 일기 가운데 반세기가 넘는 기간 농촌의 생활사를 촘촘하게 기록해 많은 이들로부터 놀라움을 자아낸 평택 '대곡일기'가 그 묵직한 존재감을 자랑하고 있다.

90세를 훌쩍 넘은 신권식씨의 삶이 온전히 녹아 있는 '대곡일기'는 평범한 농부가 쓴 결코 평범하지 않은 기록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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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보관돼 있는 대곡일기. 2021.12.27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

■ 전문가들도 깜짝 놀란 '대곡일기'의 등장


대곡일기는 국사편찬위원회의 지역사자료조사 사업 과정에 참여했던 정승모 당시 사단법인 지역문화연구소 소장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다. 지역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현장을 다니던 정 소장이 우연히 신씨를 만나게 됐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일기의 존재를 알게 됐다.

일기를 본 정 소장은 깜짝 놀랐다. 평택의 한 집성촌에서 펼쳐진 반세기의 농촌 생활상이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정 소장은 일기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근현대사 연구를 위해 공개해줄 것을 신씨에게 여러 차례 부탁했다. 개인사가 담겨 있어 선뜻 내줄 수 없었던 신씨는 정 소장의 간곡함에 일기를 내어줬다.

국사편찬위 조사 참여한 정승모 소장이 발견
연구진 "의식주 등 철저한 기록정신의 산물"


정 소장과 연구진들은 1959년부터 2005년까지의 일기를 국사편찬위원회에 보고하고, 3년에 걸쳐 경기문화재단과 함께 책으로 엮어냈다. 지난 2007년 발간된 '평택 일기로 본 농촌생활사Ⅰ'에서는 이 일기를 '철저한 기록정신의 산물'이라고 표현했다.

일기에는 경제생활과 의식주 생활, 마을생활, 인류학, 민속학 전반에 걸친 자료와 농업사, 경제사, 지역사, 생활사 등에 관련한 자료들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당시 연구에 참여한 양선아(현 전북대 쌀·삶·문명연구원 전임연구원) 연구원은 "일기가 갖는 구체성과 생생함은 구술과 비교할 수가 없다"면서 "사후적 평가가 아닌 실제 그 시대 사람이 어떻게 사회를 바라봤는지 파악하기에 더없이 좋은 자료였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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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권식씨의 집에 보관돼 있는 대곡일기. 2021.12.27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

■ 산업화 시대 농촌의 변화 고스란히 담겨


전문가들은 대곡일기를 두고 "한국 근현대사를 두루 아우르는 총체적인 생활사와 지역사 자료"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1955년 평택으로 내려와 한평생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사는 신씨의 일기는 지역의 역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사는 "1950년대 이후 농촌생활의 날 것 그대로가 적혀 있다. 지역에서 신씨가 새마을지도자, 이장 등 중요한 직책을 갖고 활동하면서 마을의 변화를 세세하게 기록했고, 농촌 마을이 시간이 지나며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산업화가 이뤄지던 1970년대 전후로 가장 눈에 띄는 지역의 변화를 꼽는다면 남양 간척지 조성사업과 아산만 관개수로의 개통을 들 수 있다. 신씨가 사는 평택 청북읍 고잔리는 바닷물이 들어오던 곳이었다.

지금은 이를 막아 개간한 간척농지가 많이 분포해 있는데 이것의 토대가 된 남양 간척지 조성사업은 경지의 확장과 정리, 관개시설 정비 등의 농업기반시설을 새롭게 조성했다.

대곡일기 새마을운동으로 실시된 마을 하수구공사(1973)
1973년 새마을운동으로 실시된 마을 하수구 공사 모습. /신권식씨 제공

1973년 남양 방조제 공사를 끝마치고 마을까지 아산만 관개수로가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지역에는 개발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일기의 한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매일같이 조반 식사가 끝나면 동리 한복판 양지바른 곳에 모여 한나절이나 별수 없는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요즈음 대화의 초점은 아산만 개발에 대해 정부에서 발표 이래 기대와 흥분으로 한나절이나 이야기로 날을 보낸다(1974.2.2)", "조반 식사 후에 모처럼 만에 마을 가 보니, 마을 마당의 화제는 남양 간척지 관게(관계)로 분분하다. 옥천 청원 등을 차자(찾아) 다니면서 간사지 논을 대여 밭기(받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1977.11.9)"

일기는 이처럼 1974년부터 1990년까지 남양 간척지 조성과 관련해 신규 간척농지의 분양, 경지정리사업의 전개 과정, 관개수로 개통 이후 농사 상황 등 농업과 사회상의 변화가 자세히 기록돼 있어 당시 모습과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 일기, 기록 그 이상의 가치


원래도 기록하던 것을 좋아하던 신권식(93)씨가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때는 한국전쟁 이후부터였다. 피난민 틈에 끼어 서울에서 대구로 걸어 내려가던 그 시절, 신씨는 눈으로 보이는 것은 다 적었다. 어떻게 밥을 먹었는지, 보고 느낀 것은 무엇인지, 지역의 풍토는 어떤지 등.

하지만 단순히 기록하기 위해 남긴 일기가 적에게 정보를 알려주기 위한 간첩 행위는 아닌지 추궁당하면서 신씨는 당시 썼던 일기를 모두 빼앗기고 말았다.

38.신권식씨혼례2(1956년 4월 30일)
대곡일기를 쓴 신권식씨의 혼례 모습. /신권식씨 제공

그렇게 중단됐던 일기가 다시 쓰이기 시작한 것은 평택으로 내려와 결혼하고 난 뒤인 1956년부터이다. 비록 그때의 일기는 분실돼 1959년 이후의 일기들만 보관돼 있지만 지금도 계속해서 일기를 쓰고 있으니 60여 년이 훌쩍 넘는 세월을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셈이다.

신씨에게 일기는 거창한 의미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아버지가 이런 삶을 살았다는 것을 자식들에게 알려주고 싶어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썼다"며 "일기를 쓰면서 이것이 어떤 가치를 가질 거라는 기대심리 없이 하루하루 생활을 남긴 것"이라고 웃어 보였다.

'1959~2005년분' 3년에 걸쳐 책으로 엮어내
남양 간척지 조성 등 당시 모습 '날것 그대로'
신권식씨 "유용하게…" 평택박물관 건립 기증


최근에는 평택박물관 건립을 위해 일기를 기증하기도 했다. 영원히 보관되기보다는 사회가 유용하게 쓰길 바라며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신씨는 "매일 일기를 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 하루의 삶을 그대로 쓰는 것뿐이다. 이제는 일기를 쓰는 것 자체가 기록을 남기는 것에서 나아가 습관이 됐다"며 "내 일기가 여러 사람이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이 되고, 사회에서 가치 있게 생각해주는 것이 고마울 따름"이라고 했다.

06.신권식 일기
대곡일기. 2021.12.27 /지역문화연구소 제공

대곡일기가 세상의 빛을 보고 난 이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연구를 위해 신씨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것이 바로 이 일기가 가지는 의미와 가치이다.

양 연구원은 "대곡일기는 가족사, 일상사, 지역사 등 근현대사에서 일반 국민이 어떤 경험을 하고 어떻게 전개됐는가를 장기적인 시간 변동 속에서 구체적으로 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며 "역사적 과정을 겪으면서 보여주는 현장감은 우리가 이 시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토대"라고 평가했다.

/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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