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년간 전국 산업현장에서 일하다 병든 노동자는 4만9천875명. 이 중 근로복지공단 질병판정위원회에서 '업무상 질병'을 인정받지 못한 노동자는 10명 중 4명에 달한다.
산업재해보상보험은 공적 보험이다. 노동자는 일하다 병들면 산업재해보상보험에 기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업무상 질병 판정은 승인의 문턱이 높지도, 낮지도 않아야 하며 각계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해 공정하고 정당해야 한다.
하지만 근로자의 복지를 위해 노력해야 할 근로복지공단은 법 위에 군림한다. 일하다 병든 노동자에게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마저 무시하는 게 현실이다.
경인일보는 공단 질병판정위원회의 업무상 질병 판정 사례를 통해 제도의 문제점을 살펴보고 실질적인 대안을 모색한다. → 편집자 주
공단 질병판정위원회는 '불확실성에 대한 위험을 고려하고 사회보장제도로서 사회적 안전망의 사각지대 보호를 강화해야 한다'는 2017년 대법원 판례마저 종잇조각 취급하고 있다는 게 직업병 피해자들의 하소연이다.
골수성 백혈병에 요양급여 신청
판정위 지급불가 판정 억울 호소
신모(33)씨는 삼성전자 화성사업장 반도체 식각 공정에서 1년8개월 간 유지보수(PM) 업무를 했다. 키 180㎝에 몸무게 90㎏의 건장한 청년을 병상에 눕힌 병은 급성 골수성 백혈병이었다. 지난해 3월 발병한 뒤 항암 치료를 받고 같은 해 10월 조혈모세포 이식수술을 받았지만, 회복이 더뎌 무균실에 머무르고 있다.
3천만원이 넘는 감당 못할 치료비를 뒤로하고 병마와 싸워 이길 계획만 가지고 있었던 그에게 더 큰 시련이 찾아왔다. 지난해 말 열린 근로복지공단 서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서 위원 7명 전원이 신씨의 업무와 백혈병 발병 사이의 인과 관계가 없으므로 요양급여를 지급할 수 없다는 의견을 내놨기 때문이다. 5분 남짓한 자료 검토와 판정 각 위원별로 작성한 200자 내외 의견이 전부였다.
위원들은 신씨가 삼성 백혈병 문제가 불거진 이후 개선된 환경에서 근무했고 유해화학물질 노출 수준도 매우 낮았다고 추측하며, 업무상 노출에 따른 백혈병 발병이 아니라고 공통된 의견을 냈다.
위원회 구성에 따라 다른 결과"
신씨는 "다른 사건보다 처리 속도가 빠르고 역학 조사를 생략한다고 해서 업무상질병 승인이 쉽게 이뤄지리라 기대했다"며 "방독면 착용 없이 챔버(chamber)에 머리를 집어넣어 작업을 하기 때문에 유해물질 가스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작업자 안전 예방과는 거리가 먼 현장이었는데도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고 불승인 판정을 한 것은 부당하다"며 억울해 했다.
신씨 사건을 맡은 이종란 반올림 상임활동가(노무사)는 "신청인(신씨)이 일한 공정과 맡은 업무는 종종 업무상 질병으로 인정을 받은 선례가 있는데도 판정위원회 구성에 따라 대법원 판례마저 무시하고 들쑥날쑥한 결과가 나오고 있다"고 비판했다. → 관련기사 3면([직무유기 근로복지공단·(上)] 위원들 의견 비공개에 기준도 제각각… 편향 판정 가능성 있다)
/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