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공황장애와 우울증 등을 겪다 극단적인 선택을 한 노동자들이 있다. 이들을 떠나 보낸 가족들의 마음에는 한이 서렸지만, 세상을 떠난 근로자와 그의 가족들을 위로해야 할 근로복지공단에 이들의 안타까운 선택은 단지 '사건'일 뿐이다.
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의 오락가락하는 업무상 질병 판정 사건 처리는 이미 세상과 작별한 노동자들에게도 적용되고 있다.
'현대차 책임연구원' 故 이찬희씨
질병판정위, 유족급여 신청 불승인
지급신청 7개월 뒤에야 판단 내려
근로복지공단 경인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지난 7일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 디자인센터에서 일하다 극단적 선택으로 목숨을 끊은 고 이찬희 책임연구원(1월19일자 7면 보도=과로사 호소에 은폐 의혹까지… 촛불 든 현대차 동료들) 유족이 신청한 유족급여 지급 청구를 불승인했다.
오승탁 금속노조 현대자동차지부 남양연구소위원회 의장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다 극단적 선택을 한 고인에 대해 회사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았고, 공단도 고인의 죽음을 제대로 살피지도 않은 채 비상식적이고 시대적 요구에도 역행하는 판정을 내렸다"고 규탄했다.
이씨가 극단적 선택을 한 뒤 판정까지 걸린 시간은 딱 1년5개월 만이다. 유족급여 지급 신청 시점부터는 7개월이 지난 뒤에야 판정이 나왔다.
업무 스트레스로 생 마감한 강씨
의료기록 없어 재해인정 못 받아
지난 2020년 인천광역시 산하기관에서 일하다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한 강모(사망 당시 38세)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강씨는 신장암 진단을 받았지만, 제때 치료를 받지 못했다.
강씨의 아내는 "신장암 진단을 받아 입원한 병원에서 사흘 만에 퇴원했다"며 "병원에선 퇴원을 허락할 수 없다고 했지만, (개발 관련)업무가 과중해 출근을 해야 했다. 퇴원 당일 바로 출근하는 모습을 보고 정말 안쓰러웠다"고 말했다.
강씨의 나이 불과 38세였다. 잠든 후에야 사라지는 팔다리 저림 현상까지 갑작스러운 신체 변화와 일일 10시간이 넘는 과중한 업무가 강씨를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았다는 가족들의 주장이다.
또한, 강씨의 신장암을 치료하던 주치의도 강씨가 결석 수술을 받은 이후 업무상 이유로 제대로 입원 치료를 받지 못했고 신장암 수술도 업무상 이유로 늦어졌다는 소견을 밝혔다.
결국 강씨는 생전 동료들에게 스트레스를 호소하고 인사팀 면담에서도 어려움을 토로했지만, 이로 인한 신체 변화와 정신적인 피폐에 대해 의료진에게 진찰 받진 않았다.
강씨를 심의한 질판위는 강씨 업무 강도가 일반적인 건설공사에서 보편적인 상황이고 업무 스트레스에 따른 신장암 악화 관련성이 낮은 데다, 강씨가 유서를 통해 금전적 문제만 언급하고 업무상 스트레스는 호소하지 않았다는 의견을 담아 산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령을 보면 업무상 사유로 인한 정신적 이상 상태에서 자해행위를 했다는 것이 의학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등을 업무상재해로 인정한다.
가장 잃은 가족들 슬픔만 더 키워
유사사례 정반대 판정 결과 비난
강씨는 진료 기록이 없어 의학적으로 인정할 근거가 없는 일명 '과로자살' 노동자였다. 공단 질판위는 대법원 판례인 '업무 관련성 추정의 원칙'을 저버리고 그의 극단적 선택과 업무환경의 '인과관계 없음'으로 판정했다.
이 때문에 공단 질판위는 판정의 원칙뿐 아니라 일관성마저 내팽개쳤다는 비판을 받는다.
두 사건을 모두 맡은 김용준 법무법인 마중 대표변호사는 "아프면 치료를 받고 쉬어야 하는데 극단적 선택을 하고 난 뒤에도 유족들이 산재보험의 수급 범위에 포함되지 못하는 비극을 겪고 있다"며 "공단 질판위가 사용자 측의 의견만 대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관련기사 3면([직무유기 근로복지공단·(中)] 판정 통보 '긴 시간' 노동자·유족의 후유증)
/손성배·이시은기자 so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