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하다 병든 노동자의 산업재해보상보험 수급 여부를 판가름하는 고용노동부 근로복지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이하 질판위)가 대법원 판례조차 무시하고 산재 피해자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며, 지연된 심의와 판정으로 각종 폐해를 낳았다.
전문가들은 2008년 출범 이후 15년 가까이 업무상재해(사고·질병) 판정을 전담한 질판위가 과중한 사건 처리 부담에 쫓기는 '날림 심의'를 지양하고, 질판위를 각 지역에 추가 설치해 직업병 노동자의 고충을 살피도록 조직 구성과 운영 등 체질을 전면 개선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스톱워치' 켜놓고 쫓기듯 판정
근로복지공단 산재보상국이 내놓은 '업무상질판위 2020년 심의현황 분석 보고서'를 보면 질판위 심의는 지난 2017년 8천715건에서 2020년 1만4천422건으로 5천707건 늘었다.
질판위는 지역본부 7곳 중 강원을 제외한 서울과 부산, 대구, 경인, 광주, 대전 등 광역 단위 6곳에 있다. 2020년 기준 경인지역 질병판정위원회는 2천840건을 처리했다. 경인지역은 서울 3천411건, 부산 3천227건에 이어 세 번째로 사건 처리 건수가 많다. → 그래프 참조
경인지역 2020년 심의 2840건 처리
회의 6분만에 1건씩 보험수급 가려
심의전 소명자료 숙지 위원 드물어
질판위 광역시·도단위 1곳도 안돼
경인 질판위 심의회의는 2020년 총 293회 열렸다. 회의 1회 당 평균 9.6건을 처리했다. 회의는 보통 1시간 안팎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불과 6분여에 1건씩 일하다 병든 노동자의 산재보험 수급 여부를 가린 셈이다.
회의 참석 수당은 20만원이다. 임상의사,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 인간공학 또는 산업위생관리 분야 전문가, 법조인 등이 생업에 종사하며 판정 위원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심의 전 소명자료를 숙지하는 위원이 극히 드물다는 게 내부의 반성이다.
수도권의 한 질판위 위원(변호사)은 "과거엔 위원장이 신속한 심의 진행을 이유로 스톱워치(초시계)를 켜고 신청인과 대리인의 진술 시간을 통제하기도 했다"며 "일하다 병든 노동자의 산재보험 수급을 판정하는 중요한 자리인데도 심의 내용을 회의 석상에서 처음 펴보는 위원들도 더러 있다"고 말했다.
공단은 신설한 강원지역본부 등 2곳에 질판위를 추가 구성할 계획이나 여전히 광역 시·도 단위에 1곳이 채 안 된다.
정혜선 가톨릭대학교 예방의학교실 교수(부천 근로자건강센터장)는 "현재 질판위는 과중하게 많은 사건을 처리하면서 업무 부담을 느끼고 있다"며 "자료를 바탕으로 각계 전문가들이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심의하기 때문에 보다 신청인 위주의 깊이 있는 심의를 유도하려면 질판위 추가 설치로 업무를 분담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 시한 어기는 사이 '골든타임' 놓치는 노동자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시행규칙을 보면 질판위 심의 결정은 업무상질병 심의를 의뢰받은 날부터 20일, 부득이한 경우 10일을 연장해 최장 30일 이내에 이뤄져야 한다. 하지만 과중한 사건 처리에 치여 법정 기준은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다.
결정 소요 기한은 법정 기한을 훌쩍 넘긴 35.3일(전국 평균)로 나타났다. 질판위 조직 확충과 더불어 질판위 판정의 질적 개선 요구에 힘이 실리는 이유다.
특히 최근 들어 직장 내 괴롭힘이나 업무상 스트레스, 과로에 따른 정신질환과 직업성 암 등 업무와의 연관성이 모호한 질환을 호소하는 노동자가 늘면서, 의학적 인과 관계뿐 아니라 작업환경 등 제반 역학관계를 살피는 전문가를 질판위 위원에 위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실제 2020년 전국의 질판위가 통합심의한 사건 중 직업성암은 477건으로 전년보다 23.6% 늘었고, 정신질환(극단적 선택)도 73건으로 23.7% 늘었다. 통합심의에도 불구하고 인정률은 67.1%에서 66.1%로 다소 하락했다.
어쩔 수 없이 법원에 불승인 판정을 뒤집기 위한 소송을 제기하고 수년간 송사를 견뎌야 하는 상황에 놓이는 당사자와 유족들을 공단 질판위가 보듬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 아픈 노동자 치료 받을 권리 실현하려면
노동계는 아픈 노동자가 치료 받을 수 있는 건강권을 보장하려면 국민건강보험과 산업재해보상보험을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적·산재 신청 상황 등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병원에서 제때 치료받을 수 있도록 두 공적 보험을 통합해 '선 보장 후 정산'해야 한다는 취지다.
작업환경 등 살피는 전문가 필요
'선보장후정산' 보험 통합 주장도
더욱이 병든 노동자 뿐 아니라 사업주와 의사가 업무상질병 신고(신청)를 할 수 있도록 신고 체계를 다양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김인아 한양대 의대 교수(직업환경의학교실)는 "독일은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건강보험에서 일정 정도 상병 수당을 우선 지급한다"며 "근로자와 사업주, 의사까지 다양한 단계에서 신고할 수 있도록 해야 예방적 조치까지 기대할 수 있다"고 전했다.
/손성배·신현정기자 god@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