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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흐르지만, 사람은 시간에 뿌리를 박고 줄기를 뻗는다. 시간을 양분 삼아 뿌리로, 줄기로, 가지로 삶은 뻗어나간다.

우리가 근대문화유산을 발굴하고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전통문화유산에 비해 근대문화유산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근대문화유산에는 찬란한 과거의 영광뿐 아니라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과 한국전쟁의 상흔, 산업화 시대를 헤쳐온 선배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지금 우리의 일상이 선배들이 일궈놓은 토대에서 나온 것인 만큼 근대문화유산만큼 우리 사회의 모습과 나아갈 방향을 잘 설명해줄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다.

경인일보는 경기도의 근대문화유산을 통해 과거와 현재가 소통하는 대화의 장을 만든다. → 편집자주
1987년 8월 31일
미 육군 2사단 소속 중령 존 휘트만은 평소 알고 지내던 당시 동두천시 광암동 동장에게 낡은 태극기 하나를 꺼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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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에 소장된 피난민 태극기.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

한국전쟁에 참전하셨던 아버지가 한 피난민에게 받은 태극기라고 간략하게 소개한 태극기. 이미 음양陰陽을 뜻하는 태극 무늬에서 양陽에 해당하는 붉은 색 염료는 빛이 바라 흑백 필름으로 비춘 모습같이 보였다.

우리가 흔히 쓰는 태극기에 비해 태극 무늬는 크고 상대적으로 건곤감리乾坤坎離가 작게 그려져 있어 태극기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곳에서 제작된 것이 아닌, 누군가가 직접 그려서 만든 태극기로 보였다.

또 앞면만 채색됐다는 점에서 공식적인 행사나 선체 등 밖에 걸기 위해 제작된 태극기가 아니라 액자와 같은 것에 넣어져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는 태극기였다.

존 휘트만 중령이 전달해줄 때 아버지로부터 들었다는 간단한 사연 외에 특별한 내력이 전해지지 않았던 낡은 태극기는 '피난민 태극기'라는 이름으로 2002년 5월 동두천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이 개관할 때 다시 기증돼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평화의 소중함을 알리고 있다.
태극기의 꿈
그간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유추해보자면, 피난민 태극기는 한국사의 아픈 기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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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19일 한국인들이 흥남철수기간 중 상륙주정(LST)에 승선하고 있는 사진이다. 사진 왼쪽에는 소달구지에서 고깃배로 소유품을 수송하는 한국인들이 있다. /전쟁기념관 아카이브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인 1950년.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며 가까스로 전세를 반전시켰지만, 10월부터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의 양상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됐다. 1950년 12월 전세가 불리해진 유엔사령부는 흥남 철수 지시를 내렸다.

당시 함흥-흥남 일대를 제외한 함경도 전역이 중공군에 넘어간 상태였기 때문에 육로로 철수하지 못하고 해로를 통한 철수를 결정했다. 그 날의 참상은 영화 '국제시장'으로 잘 알려졌다.

그나마 운이 좋은 사람은 이날의 철수작전으로 생명을 구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1950년 12월, 흥남 철수 지시
따라가지 못한 A씨, 1년뒤 다시 남한행 시도
美 조지 휘트먼 소위에게 건넨 태극기 한 장
인공기로 국기 바뀌기 전부터 간직 '유추'

그 중 하나였던 피난민 A씨 흥남철수에 따라가지 못했하고 1951년 9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에 와서 다시 남한행을 시도한다. 그는 목숨을 건 남한행에 앞서 태극기를 품에 안았을 것이다. 미 해군함정에 구조되면 꺼내 보일 심상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피난민 A씨는 미 해군 조지 휘트먼 소위에게 발견됐다. 휘트먼 소위는 당시 원산만 부근에서 작전 중이던 메킨버그호에 선원이었다. A씨는 고마운 마음에 부적처럼 쥐고 있던 태극기를 선물로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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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 전경.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

북한은 이미 1948년 7월 태극기를 폐지하고 인공기로 국기를 교체했다는 점에서 '피난민 태극기'는 많은 비밀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알려진 바가 모두 사실이라면, 북한지역에 거주하던 피난민 A씨는 인공기로 국기가 바뀌기 전부터 공을 들여 제작한 태극기를 집안에 걸어두고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 모두가 후퇴한, 인민군이 점령한 흥남에 남아 소중히 간직하던 태극기에 목숨을 건 피난길에 오르지 않았을 까 하는 상상을 해볼 수 있다.

피난민 A씨에게 태극기는 자신이 지키고 싶었던 것이자, 자신을 지켜준 소중한 것이었을 것이다.

유달리 큰 태극 무늬에 미뤄 일장기로 제작됐다가 태극기로 재탄생됐을 수도 있다는 전문가의 의견도 있는데, 그렇다면 이 태극기 한 장은 일제강점기를 넘어 한국전쟁의 비극까지 목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피난민 태극기는 새살이 되어
시계를 돌려 2021년 10월 전쟁의 상처와 긴박한 기억이 깃든 '피난민 태극기'는 경기도 등록문화재 1호가 됐다. 피난민 태극기는 당시 긴박했던 역사적 비극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태극기의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높은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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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태극기마을 입구. 사시사철 태극기를 게양해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

현존하는 태극기 중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데니 태극기와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게양 태극기, 미 해병대원 버스비어 기증 태극기, 동덕여자의숙 태극기, 남상락 자수 태극기, 대한독립만세 태극기 등이 있다.

김구 서명문 태극기와 한국광복군 서명문 태극기, 유관종부대원 태극기, 경주 학도병 서명문 태극기 등 1890년 추정본부터 한국전쟁기에 걸쳐 수십종의 태극기가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비록 국가문화유산으로 등재되지 않았지만, 동두천 피난민 태극기의 의미는 그에 못지 않게 특별하다. 피난민 태극기에 담긴 평화에 대한 염원이 지역 곳곳에 영향을 미치며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2021년 10월 경기도 등록 문화재 1호 선정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에 소장 전시
중앙역 인근 벽화마을에 울리는 자유의 화음
버려진 캔 뚜껑 재활용 등 이목 집중 시켜

피난민 태극기가 소장된 동두천 자유수호평화박물관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노르웨이 육군 야전병원 자리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투·의료를 지원한 각국의 활약상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구성,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 중에 격전지인 동두천에서 힘을 합쳐 지키려 한 자유와 평화의 가치를 되새겨볼 수 있다.

특히 평화를 향한 염원이 담긴 피난민 태극기가 자리하면서 가치를 더욱 빛내고 있다.

박물관 밖에서도 평화의 메시지는 쉽게 발견된다. 동두천 중앙역 인근 태극기 벽화 마을이 대표적인 사례다. 10여분 남짓이면 둘러볼 수 있지만, 사시사철 태극기가 게양돼있고 평화를 상징하는 여러 벽화가 동두천 특유의 모습과 함께 어우러져 피난민 태극기가 품은 평화의 메시지와 화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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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 태극기마을의 태극기 벽화. 장명월씨를 비롯한 마을 주민이 빈 캔 등을 이용해 태극기를 만들었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

40여년 전부터 장명월(82)씨를 비롯한 마을 주민은 누구의 조언이나 지원도 없이 태극기 벽화를 만들었다. 태극기를 통해 동두천이 겪은 아픔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키자는 의미였다.

특히 캔의 뚜껑 부분을 재활용해 만든 태극기 모양의 벽화나 꽃과 정물이 형상화된 그림 등은 보는 이로 하여금 평화에 대한 다양한 생각과 느낌을 이끌어내고 있다.

/김성주·조수현기자 ksj@kyeongin.com, 일러스트/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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