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홍문은 '수원 8경' 중 하나로 꼽힌다. 엄밀히는 화홍문의 수문 7곳을 통해 쏟아지는 물보라와 어우러진 '화홍관창'의 모습을 8경 중 하나라 말한다.
가족과 연인의 나들이 장소는 물론, 밤의 비경이 미려해 한 데 모여 있는 방화수류정·용연과 함께 경기도의 대표 관광 코스로도 각광을 받는 '화홍문의 물보라'는 사실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장마철 취수원인 광교저수지에서 수량을 댐을 통해 방류할 때가, 평소에 졸졸 흐르는 물줄기가 철철 넘치는 물보라로 변하는 거의 유일한 순간이다.
지난해 10월 선정된 경기도 등록문화재 11건 가운데 수원에 있는 문화재는 2건이다. 두 문화재 모두 화홍문과 엮여 있는 문화재란 점이 흥미롭다.
수원박물관에 소장돼있는 '방화수류정 자개상'과 '수원 화홍문 기타복구공사설계도'가 포함된 '일제강점기 근대건축도면 일괄'(94점)이 도 등록 문화재로 모두 일제강점기 때 제작됐다.
■'방화수류정 자개상', '사통팔달' 수원의 숨결
'방화수류정 자개상'은 일제 강점기 때 제작된 공예품으로, 수원 화성의 주요 문화재인 방화수류정과 용연, 화홍문이 한 데 어우러진 보기 드문 자개상이다.
자개 조각을 모양대로 잘라 넣는 근대의 나전기법을 활용한 공예품으로서 마치 풍경화를 입힌 듯 상판의 회화적 문양이 정교하게 들어간 것이 큰 특징이다. 상의 네 곳 모서리와 다리에도 화려한 장식이 새겨져 있는 점에서는 이 작품을 대했던 당대 예술가들의 진중한 마음과 노고도 엿볼 수 있다.
이 자개상의 제작 연대(1910년대 중반~1936년)는 상을 뒤집으면 보이는 '이화형美'의 표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이 표식은 수원을 비롯한 대도시를 배경으로 당시 관광, 예술 산업에서 왕성하게 활동한 '이왕직미술품제작소'에서 찍은 일종의 '상표'다.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왕직미술품제작소'는 대한제국 황실의 지원을 받아 1908년에 '조선의 전통적 공예미술의 진작'의 취지로 만들어진 '한성미술품 제작소'에 뿌리를 둔다.
이를 1911년 일본인이 넘겨받아 '이왕직미술품제작소'로 이름을 바꾸고, 1922년에는 '주식회사 조선미술품제작소'로 또 한차례 사명을 바꿔 1936년까지 활동했다.
당시 일본인이 운영하면서 일본인의 취향도 자연스럽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방화수류정자개상'에서 볼 수 있는 옻칠 위에 금은 가루를 뿌려 표현하는, '마끼에 장식'이 그것을 보여준다. 전통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지는 못했지만 시대를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방화수류정·화홍문 한데 어울린 자개상
나전기법 활용해 풍경화 입힌 듯 '정교'
대도시 배경 활동 '이화형美' 상표 찍혀
조선·일본인 모두 관광 명소 인기 끌어
자개상이 제작된 시대에는 금강산과 경복궁, 광화문, 평양 을밀대 등의 인기 관광지를 배경으로 제작된 관광 기념품이 인기를 끌었다.
동시대 공예품으로 제작된 '방화수류정 자개상'에 방화수류정을 비롯한 수원 화성의 문화재가 쓰인 것은 그만큼 당대의 관광명소로 수원이 조선 사람들과 일본인 모두의 사랑을 받은 장소였다는 방증이 된다.
수원박물관에 전시된 방화수류정자개상과 그 밖에 함께 전시된 다양한 문화재를 통해 수원이 일제강점기 당시 교통의 요충지이자 관광명소로 이름을 떨쳤을 것이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미니어처 형태로 박물관 한 켠에 모습을 갖추고 있는 '수인선'이 그중 대표적이다.
수인선은 일본제국이 여주 및 이천에서 나는 쌀과 소금을 수탈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수원과 인천을 잇는 철도라는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사통팔달 수원이 해안과 내륙을 잇는 '다리'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일제의 '문화 침탈', 수원 역사의 생채기
'일제강점기 문화재 실측 및 수리 도면 일괄(94점)'은 1915년부터 1932년 사이에 만들어진 문화재 수리·보수 관련 도면이다.
광화문·불국사·경복궁·흥인지문은 물론 수원의 화성을 둘러싼 문화재인 '수원 팔달문 성곽 입구 취훼보수공사 설계도'와 '수원화홍문기타복구 설계도'도 94점의 도면에 포함돼 위상을 빛낸다.
'수원 팔달문 성곽 입구 취훼보수공사 설계도'는 1929년 제작됐다. 성문을 포위하고 있는 둥근 모양의 옹성이 일제에 의해 잘려나가는 계획이 이 도면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해 일간신문 중외일보 3월 27일 자 기사에 따르면 팔달문 옹성은 일제의 '교통 편의' 명분에 철거됐다.
이에 앞서 일제는 1913년 교통 편의를 명분으로 팔달문의 옹성문을 철거했다. 조선총독부가 당시 조선의 문화재 해체 작업의 일환으로 팔달문을 비롯 남한산성 서장대, 개성 남대문 등의 우리 문화재를 전방위적으로 부쉈는데 그 영향에서 팔달문도 자유롭지 않았던 것이다.
1929년 제작 팔달문 성곽입구 보수 설계도
외세의 입맛따라 잘려나간 문화재 '생채기'
수원화성을 대표하는 남쪽 대문인 팔달문이 외세의 입맛에 따라 무력하게 잘려나간 점에선 우리 문화재에 슬픔이 서린 역사임에는 틀림없다. 다만 이런 아픔이 담겼다 해서 사료적인 가치까지 훼손된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네스코문화유산이자 조선시대 대표 기록 문화유산인 '화성성역의궤'의 '권수' 도설과 채색본 '정리의궤'에 그려져 있는 수원 화성 도면 이후, 의궤가 아닌 수원화성이 도면으로 담긴 보기 드문 근대 건축설계도면으로서의 보존 가치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팔달문 관련, 근대 건축설계도면으로서는 이 설계도가 유일한 점에서 그 의미는 더 높다.
■동네 '명소'가 무너지니, 사람들이 손을 맞잡다
화홍문은 1922년 큰 위기를 겪게 된다. 7월 장맛비에 일부 유실되며 완파의 징후를 보였던 것이 그 다음 달인 8월에 쏟아진 폭우로 결국 무너진 것이다. 당시 일제는 이를 본체만체 했고, 이에 뿔이 난 당시 수원면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수원화홍문기타복구공사설계도'는 화홍문이 멸실된 이듬해인 1923년 3월 제작됐다. 당시 수원면민들은 조선총독부에 화홍문의 복구를 지속적으로 청원했다.
일제가 화홍문의 복구 설계도까지 제작하며 다시 살려낸 데에는 관광명소로 각광을 받는 화홍문에 대한 '경제적 계산'도 있겠지만, 결집된 수원면민들의 의지가 더 큰 역할을 했다.
화홍문은 1925년 누각을 제외한 7칸 수문의 석축이 복원됐고, 멸실된 지 10년 만인 1932년 완전히 제모습으로 돌아와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게 됐다.
1922년 장맛비에 무너진 화홍문 복구 위해
수원 면민 청원·성금 모으기 등 각고 노력
조성우 수원화성박물관 학예사는 "조선시대에 화홍문이 붕괴되는 일이 있었지만, 일제 강점기인 1922년 화홍문이 자연재해 영향으로 남수문과 함께 완전히 무너졌다"며 "1933년에 화홍문이 복구됐는데 수원 면민들의 목소리가 영향을 줬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원명소보전회'는 당시 수원면민들의 목소리를 한 데 모은 결사체 중 하나다. 1932년 5월 9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수원읍 의원이었던 차재윤을 비롯한 몇몇의 뜻있는 사람이 힘을 합쳐 수원명소보전회를 만들어 3천여원의 성금을 모으는 등 우리의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조수현기자 joeloach@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