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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7월6일자 매일신보. 당시 신문 사진 설명을 그대로 옮긴다. '인천내리(內里)에서 습격을 당한 중국인이 가구를 버리고 달아난 형적. 무참히 파괴된 중국인 가옥.' /출처:국립중앙도서관 대한민국 신문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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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년 전 한반도에 터를 잡은 화교들의 삶은 절대 녹록지 않았다. '화교'라는 호칭보다는 다른 경멸의 호칭으로 더 자주 불렸다. 이 땅의 엄연한 정주자임에도 한국사회의 배척 대상이 되곤 했다.

일제의 농간에 억울한 희생양이 되며 '화교배척사건'을 겪었다. 해방 이후에는 토지 소유권을 제한받았고, 매번 거주 허가도 받아야 했다. 납세 등의 의무는 대한민국 '국민'과 같았지만 '국민'이 누리는 복지 등의 혜택에서는 소외됐다. 차별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화교는 무역, 농업, 공업 등 20세기 초 조선에서 다양한 영역에 걸쳐 경제 활동을 했다. 임금이 적어도 조선인이나 일본인보다 성실하게 일했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조선에서 상당한 경제적 세력을 형성했다.

"중국서 조선농민 다수 경찰 피살"
경제력 약화시키려는 일제 기만술
1931년 '화교배척사건' 비극 발생
그런 화교들에게 1931년 커다란 비극이 닥쳤다. 그해 7월 중국 길림성에서 조선인 농민 다수가 중국 경찰에게 피살당했다는 국내 언론의 오보가 전해지면서 인천에서 중국인 배척운동, 이른바 화교배척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인천부 용강정(현 인천 중구 인현동) 중화요리점을 시작으로, 이 일대 화교가 경영하는 각종 상점과 가옥이 조선인 수천 명의 공격을 받았다. 인천뿐 아니라 서울과 평양 등 전국적으로 조선인들이 화교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 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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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의 피해는 컸다. 당시 조선총독부가 집계한 피해 현황을 보면 전국에서 119명의 화교가 숨지고 2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인천에서는 7명이 숨지거나 다치고 방화와 기물 파손 등 24건의 물질적 피해가 있었다. 다른 지역보다 피해 규모가 작았지만, 이 사건으로 많은 화교가 조선을 떠났다.

화교배척사건 발생 1년 전이었던 1930년 10월 일제의 국세조사에 따르면 국내에 거주 중인 화교는 9만1천783명이다. 조선 내 외국인 가운데 일본인 다음으로 숫자가 많았다. 1931년 사건 발생 이후 화교 수는 전년도의 40% 수준인 3만6천778명까지 급감했다.

화교배척사건은 이보다 4년 앞선 1927년에도 있었다. 만주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을 중국 관헌이 탄압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지만, 당시 익산에도 차이나타운이 존재했다.

익산에서 벌어진 화교 습격은 빠르게 진압됐지만, 인근 전주와 군산으로 퍼져 20명에 가까운 화교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후 충청도와 경기도까지 화교 습격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일주일 동안 곳곳에서 화교들의 피해가 이어졌다.

사실 중국에서 조선인이 탄압을 받았다는 소식은 일제가 흘린 거짓 정보였다. 조선에서 일본 상인들을 위협할 정도로 경제적 세력을 키운 화교가 일제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는데, 화교에 대한 조선인들의 분노를 유발해 자연스럽게 화교의 경제력을 약화하기 위한 기만술이었던 셈이다.

화교들은 중국의 공산화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중국으로 갈 수 없게 됐다. 결국 뿌리(중국)도 국적(대만)도 아닌, 삶의 터전이 있는 대한민국을 정착지로 택했다. 중국에서 건너온 1세대 화교와 달리, 한국에서 나고 자란 2~3세대 화교들은 한국말을 쓰고 한국 문화에 익숙한 삶을 살아왔다.
120년간 '부동산 취득 제약' 겪어
영주권 부여한지 20년 밖에 안돼
그동안 정책·법률적 대상서 소외

그러나 한국 정부는 화교를 외국인 집단 중 하나로 여길 뿐이었다. 화교들이 가장 많이 제약을 받은 것은 '부동산 취득'이었다. 해방 이후 한국 정부가 수립되고 한동안 화교들의 토지 소유권이 인정됐지만, 1961년 외국인토지법이 시행되면서 제동이 걸렸다.

특히 1968년 개정된 외국인토지법에 따르면, 외국인들은 거주 목적 토지 200평 이하, 상업 목적 토지 50평 이하로만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화교들이 한국에서 생계 활동을 이어갈 방법은 작은 중화요릿집 등 소규모 상점을 운영하는 것이 전부였다. 이 같은 규제는 1999년이 되어서야 사라졌다.

화교에게 영주권이 부여된 시기도 2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전까지 화교들은 한국에 살고 있어도 주기적으로 한국 정부로부터 거주 허가나 재입국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화교가 유학을 위해 잠시 해외로 나갔다가 거주 허가 신고 시기를 놓쳐 여행자 신분으로 한국, 대만, 중국 등을 떠돈 사례도 있었다.

화교들은 정기적으로 한국 법무부 출입국사무소를 찾아가 허가 신고를 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30년 넘게 겪어야 했다. 한반도에 화교가 들어온 지 120년이 지난 2002년이 되어서야 이들에게 영주권이 부여됐다.

송승석 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는 "영주권이 있어도 '국민'의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국가의 정책적·법률적 대상에서 사실상 배제돼 있다는 것이 현실"이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화교는 줄곧 규제의 대상이었고, 소외와 배제의 존재였다. 아직도 화교를 진정한 우리 구성원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김성호·한달수기자 dal@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