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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순교자 기념 순례지이자, 경기도 근대문화유산인 '파주 갈곡리 성당' 전경.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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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순교자 기념 순례지이자, 경기도 근대문화유산인 '파주 갈곡리 성당'은 파주 자웅산과 노고산 사이에 위치한 작은 성당이다.

120년의 역사를 품은 갈곡리 성당은 소박하지만 자연과 어우러진 편안한 분위기에서 순례자를 맞이하고 있다.

갈곡리 성당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꿋꿋이 신념을 지키며 살아온 이들의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구한말 천주교 박해 끝나며 마을 형성
1898년 신자들 약현본당 칠울공소 설립
신앙 공동체 이루며 옹기 만들어 생계
'위령기도에 음' 한국만의 특징 시작도

한국전쟁때 피폭… 주민들 힘모아 성당 건축
미군 기술·자본 도움… 1954년 현재 모습으로
인민군에 희생 김치호 신부·김정숙 수녀 기려
순례지 지정… 성당 중심 신앙 공동체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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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은 신념과 같이 우뚝 선 갈곡리 성당
갈곡리 성당의 역사는 천주교 박해를 피해 공동체를 이뤄 옹기를 만들며 생계를 유지했던 신앙공동체로부터 시작한다. 갈곡리 주민들이 1936년 마련한 공소가 한국전쟁 중인 1951년 폭격으로 소실되면서 지금의 갈곡리 성당이 건립(1954년)된 것이다.

총 면적 199.2㎡의 벽체, 지붕부, 종탑부로 구성된 화강암 석조건물로, 1950년대 석조 성당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1950년을 전후한 시기 성당 건축은 열주(지붕 아래 대들보를 받치며 일정한 간격으로 세워진 다수의 기둥)가 사라진 형태가 대부분인데, 갈곡리 성당도 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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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곡리 성당 내부 전경. 리모델링을 거쳤지만 1954년 건립 당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수직 종탑과 정면 양식, 성당의 뒷부분 등 세부 모양은 고전적 형태를 그대로 따른 지금의 모습으로 건축됐다.

양주시 회천면 덕정리의 채석장에서 채석한 화강암을 성당을 짓기 위한 석재모양으로 다듬어 이 곳으로 옮겨왔다. 이 과정을 미군이 도왔다는 점과 의정부주교좌성당과 같은 화강암 석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양주시의 명물인 독바위에서 유래한 화강암으로 보인다.

다만, 단단한 화강암을 사용해 건물의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 지붕은 함석으로, 내부 바닥은 마루를 깔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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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미군과 갈곡리 마을 주민들이 건축중인 성당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갈곡리 성당 제공

갈곡리 성당은 당시 해병대 군종신부인 김창석 타대오 신부가 미국 군종신부인 에드워드 마티뉴 신부에게 부탁해 미군의 기술과 자본이 투입됐지만, 마을주민 모두 힘을 합해 성당을 건축했다는 점도 특징 중에 하나다.

전쟁 직후 생계를 꾸리기에도 어려움이 많았을 때인데도 젊은 신자들을 중심으로 성당 공사 현장에서 미군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직접 돌 하나하나를 쌓는 등 많은 일을 했다. 미군과 지역주민들이 교회 건축 현장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지금까지도 전해진다.
한국 천주교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긴 갈곡리 성당
경기도문화재위원회는 지난해 경기도 등록문화재(근대문화유산)로 갈곡리 성당을 지정하면서 '구한말 이후 형성된 신앙 마을 공동체의 모습을 지니고 있어 초기 교회사적으로 가치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 초기 교회사에서 옹기장인들이 주인공의 위치에 있다. 갈곡리 성당 인근에는 옛 가마터 등이 있어 당시 신앙을 지키던 옹기장인들의 삶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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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곡리 마을 주민이 움터에서 옹기를 빚고 있다(촬영연도 미상). 현재 가마와 옹기장인이 남아있지 않다. /갈곡리 성당 제공

특히 갈곡리 출신으로 북한 지역에서 순교한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를 비롯해 많은 성직자와 수도자를 배출했다.

김치호 신부는 한국인 첫 성직 수도자로 한국 천주교의 기대를 모았지만 인민군의 손에 희생됐다. 김치호 신부의 순교 열흘 뒤 그의 누나였던 김정숙 수녀도 황해도 매화동본당 봉삼유치원에서 사목을 하던 중에 순교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지난 2018년 8월 갈곡리공소를 법원리 본당에서 분리해 준본당으로 승격하고 두 순교자를 기념하는 순례지로 지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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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곡리 출신으로 북한 지역에서 순교한 김치호 베네딕토 신부와 김정숙 마리안나 수녀를 기리는 동판. 지난 2018년 8월 갈곡리 성당은 두 순교자를 기념하는 순례지로 지정됐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이밖에도 가톨릭대학 초대 총장을 지낸 최창무 안드레아 대주교(전 광주 대교구장) 등이 갈곡리 성당(당시 공소) 출신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국 천주교의 특징 중 하나인 위령기도(연도)에 음을 붙인 것도 갈곡리 성당이라는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음을 붙인 시편기도가 당시 출범한 평화방송을 통해 전해지면서 한국 천주교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단한 삶을 이겨낸 힘
건립된 시기가 한국전쟁 직후라는 점을 감안하면 갈곡리 성당의 특별함을 생각하게 된다. 전후 한국 사회는 국제적으로 봤을 때 경제적으로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혼란했다. 그런 어려운 때에 다른 건물보다 중요하게 주민 수가 300여명에 불과했던 작은 마을에 교회 건립이 추진된 배경은 무엇일까.

갈곡리 성당 건립을 이해하기 위해 갈곡리 마을의 형성을 살펴봐야 한다. 1896년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조정의 박해가 끝나면서 강원 홍천 등에 숨어 옹기를 만들어 팔던 신자, 김바오로·김방지거·박베드로 가족이 칠울(갈곡葛谷)로 자리를 잡았다.

옹기를 만들 수 있는 점토가 많은 지역이어서 다수의 천주교 신자들이 자리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2년 후인 1898년 이 곳에 신자 수 65명의 약현본당 칠울공소가 설립된 것이 갈곡리 성당의 뿌리다.

이후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공소 강당이 피폭되는 일이 발생했지만, 주민들은 여전한 신앙심으로 갈곡리를 지켰다. 파주·양주지역에 10여곳의 공소가 있었지만 단 한 차례도 문을 닫지 않고 유지되는 유일한 곳이 칠울공소, 지금의 갈곡리 성당이다.

박해를 피해 신앙을 지키던 이들이 신앙 마을 공동체를 꾸리며 살아가던 모습이, 다시 한국전쟁 이후 혼란한 시기를 헤쳐나가는 시민들의 모습이 지금의 갈곡리 성당으로 형상화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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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갈곡리 공소 소실 이전의 모습. 한국전쟁 당시 폭격으로 소실되고 현재 갈곡리 성당이 이를 대체해 건립됐다. /갈곡리 성당 제공

갈곡리 성당 주임신부 김민철 안드레아 신부는 "전후 미군에서 갈곡리 성당 건축을 결정하게 된 배경에 주민들의 신앙심이 있었을 것"이라며 "당시 미군 종군신부의 눈에도 갈곡리 성당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현재까지도 주민들은 갈곡리 성당을 중심으로 모여 살면서 신앙을 지키고 있다. 김규식 사목회장은 "갈곡리 성당 주변에는 대를 이은 신자들이 살고 있고, 수십 년째 성당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분도 계신다"며 갈곡리의 특별함을 소개했다.

김민철 신부는 "향후 파주시와 함께 가마터 등을 복원하는 등 역사 복원에 나설 계획"이라며 "깊은 신앙의 뿌리를 가진 갈곡리 성당을 기억해달라"고 말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