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401000911100042593
"태실이 뭐죠?" 조선왕실이 중요하게 여긴 장태 문화인 태실은 사실 왕릉이나 종묘만큼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태실에 대한 연구와 조사, 발굴 등이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한 것도 불과 몇 년 되지 않는다.

태실이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이유는 오늘날 태실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보면 어느 정도 유추해볼 수 있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관리를 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곳곳의 길지에 자리한 태실(주로 태항아리) 54위를 고양 서삼릉에 모은 것이 불씨가 되었다.

왕실의 안녕과 만세를 기원한 탄생의 문화가 죽음의 공간에 묻혀 그 상징성을 잃어버린 셈이다. 이 과정에서 태실의 원형은 크게 훼손됐고, 제사를 지내며 관리된 왕릉과는 달리 점차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지며 방치됐다.

 

1
익종태실 석물 중 하나인 연엽주석. 한 때 포천시의 한 모텔 입구 장식으로 사용돼 앞면에 한글이 적혀있다. 2022.8.24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서삼릉'에 모아 상징성 상실
최근에서야 발굴·연구 본격화
원형 잃은 석물, 유휴지 방치

이러한 현실은 경기지역의 가봉태실에서도 확연하게 찾아볼 수 있다. 조선 헌종의 아버지, 익종의 태실이 남아있다는 포천시 성동리의 한 소공원. 인근 지역의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등록하고 찾아갔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태실의 위치를 알리는 안내판도 눈에 띄지 않아 수차례 같은 곳을 맴돌고 나서야 위치를 파악했다.

호국로와 영평천 사이의 자투리 공간에는 원래 익종태실에 있어야 할 석물들이 순서 없이 나열돼 있었다. 제자리를 잃은 26개의 석물은 일제강점기에 해체돼 남아있던 것을 한국전쟁 당시 육군 제5군단에서 보관한 것으로 전해지며, 이후 1977년 소공원이 조성될 때 이곳으로 이전됐다.

12
익종태실 석물이 모여있는 포천시 성동리의 소공원.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며 위치가 바뀌고 원형을 상실한 채 방치돼 있다. 2022.8.24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가평 중종태실 역시 서삼릉으로 강제 이전한 후 방치되다 산 주인이 흩어진 석물을 발견해 인근 초등학교에 보관했고, 1987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하지만 정확한 고증이 이뤄지지 않아 원형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한 상태다.

그에 비해 성종태실은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지만, 원래 있던 곳에서 강제 이전돼 태실이 가진 의미가 퇴색됐다. 이 외에도 수많은 태실이 도굴되거나 원래의 모습을 잃었다.

일제 거치며 전래 문화 단절
"해방 이후 도굴도 비일비재
개발로 사라지거나 묘 사용"

김희태 이야기가 있는 역사문화연구소장은 "태실이 위치한 곳이 산의 정상이다 보니 군사진지가 설치되기도 하고, 무엇보다 일제강점기 이후 사유지가 되면서 개발 목적으로 사라지거나 묘로 쓰는 등 상당수가 훼손돼 관리되지 않았다"며 "왕릉은 계속해서 제사를 지내는 문화를 통해 잘 보존됐지만, 태실은 전래하는 과정에서 단절이 생겨버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이어 "과거부터 관리가 잘 이뤄지지 않다 보니 원형 자체가 상실돼 실물이 남아있는 경우가 많지 않다"며 "해방 이후에도 도굴된 사례가 비일비재하다"고 덧붙였다. → 관련기사 3면([K-탄생문화 '태실'·(中)] '전세계 유일' 가치)

/김성주·구민주기자 kum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