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문화재'로 불리는 무형문화재는 지금껏 옛것을 지켜 우리의 얼을 이어간다는 자부심으로 오랜 세월을 버텨왔다. 코로나19 이후 OTT 등 각종 플랫폼을 통해 K-콘텐츠가 전 세계의 사랑을 받고, 대한민국이 문화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정신이 밑거름이 된 덕이다.

하지만 정작 코로나19 이후 무형문화재를 비롯한 우리 전통 문화예술은 명맥이 끊기기 일보 직전이다. 경인일보는 코로나19가 휩쓸고 간 경기도 내 국가·도 지정 무형문화재의 현실을 들여다보고 이들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대안을 찾는다. → 편집자 주·관련기사 3면 ([코로나 그늘, 무형문화재·(上)] 전통 예술·기술 체득 '인간문화재'… 비대면시대 덮친 '보릿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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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내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70여명에 달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한 생계 문제 등으로 전수자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계승자 부재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 14일 오전 평택시 팽성읍 평택농악전수회관에서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농악체험행사 '농악아 놀자'가 진행되고 있다. 2022.9.14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이승만 박사 생일날 광화문 앞에서 농악축제 열었지.
그때 서울 깍쟁이들 앞에서 신나게 놀고 돈도 많이 벌었지….

김용래(83)옹은 국가 무형문화재 평택농악 보유자다. 고령이지만,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까진 전국의 공연장을 누비며 상모를 돌렸다. 그랬던 그가 코로나19 이후 3년여 만에 지팡이 없인 걷는 것도 힘에 부치게 됐다.

김용래 옹은 "무대에 서기 위해 평소에도 긴장감을 놓지 않고 체력을 유지하려고 애쓰는데, 아예 무대에 서질 못하니…"라고 말을 흐렸다. 무대가 주는 긴장감이 사라지면서 그의 몸도 급격히 노화됐다.

집합금지에 회원들 뿔뿔이 흩어져
거리두기 완화됐지만 찾는 이 없어
긴장감 사라지자 전수자 몸도 노화

김용래 옹은 평택농악보존회 회원 40여명과 한 패를 이뤘었다. 김용래옹을 필두로 청년들과 무동을 맡는 어린 아이까지, 우리 문화를 잇기 위해 매일 수 시간씩 합(合)을 맞췄다.

코로나19는 우리 것을 지키려는 무형문화재 계승자들의 꿈도 무너뜨렸다. 평택농악보존회 회원들은 20명 이하로 줄어 반토막이 났다. 회원 중 상당수가 장구 치던 손으로 물류센터 분류 작업을 하고, 짚신을 신고 줄을 타던 발로 대리운전을 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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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문화재 제11-2호 평택농악 인간문화재 김용래(83)옹은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까진 전국의 공연장을 누비며 상모를 돌렸다. 2022.9.14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평택농악을 포함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종목은 경기도에만 모두 10개다. 도 무형문화재는 이보다 많은 70개 종목이다.

그나마 코로나19로 인한 방역규제가 완화되면서 지역 축제에 초청을 받거나 경연대회도 다시 늘고 있지만, 떠난 회원들이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농악이 좋아서, 마을의 풍년을 기원하는 흥겨운 가락과 신명 나는 놀이꾼의 춤사위가 즐거워 평택농악보존회를 찾아오던 학생들의 발길마저 뜸해졌다.

경기민요도 마찬가지다. 수원 장안구에서 전수교습소를 운영하는 무형문화재 57호(경기민요) 이수자 김정우(64) 명창은 1997년 교습소를 시작한 이래 25년간 500여명의 교육생을 길러냈다. 김 명창에게 경기민요를 배워 대학에 간 학생도 수십에 이른다.

이젠 배우러 오는 젊은이들도
왔다가 금세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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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무형문화재 평택농악 보유자 김용래(83)옹은 "이승만 박사 생일이 2월 마지막 날인데, 그날 광화문 옛 경기도청 앞에서 경기도 시군 대항 농악축제를 했었다"며 "그때 서울 깍쟁이들 앞에서 신나게 놀고 돈도 많이 벌었는데, 이젠 배우러 오는 젊은이들도 왔다가 금세 사라진다"고 씁쓸해했다. 2022.9.14 /이지훈기자 jhlee@kyeongin.com
 

하지만 코로나19로 학원 등에 집합금지명령이 내려지면서, 수업을 할 수 없게 됐고 "명창이 되겠다는 아이들이 다 공부하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김 명창은 서글퍼했다.


김용래옹과 함께 팔도를 유랑하던 그의 스승과 동료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평택농악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상쇠 최은창 선생은 2002년에, 김용래옹의 스승인 인간문화재 이돌천 선생은 이보다 앞선 1994년 사망했다. 김용래옹에겐 그들의 빈자리도 쓸쓸한데, 겨우 공연팀을 꾸려 승합차에 오르는 보존회 회원들을 바라보면 가슴이 먹먹하다.

 

김용래옹은 "이승만 박사(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생일이 2월 마지막 날인데, 그날 광화문 옛 경기도청 앞에서 경기도 시군 대항 농악축제를 했었다"며 "그때 서울 깍쟁이들 앞에서 신나게 놀고 돈도 많이 벌었는데, 이젠 배우러 오는 젊은이들도 왔다가 금세 사라진다"고 씁쓸해했다.

/손성배기자 so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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