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인이 자신이 만든 도자기를 유심히 들여다본다. 순백의 매끈한 모양새가 보기 좋지만, 장인의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가차 없이 내던진다. 오래전 TV광고의 한 장면이다. 지금은 뭘 위한 광고였는지 잊었지만, 당시의 광고를 보는 사람들의 반응만은 선명하다. 우리가 잊고 있던 '장인정신'을 그 광고에서 봤다는 것이다.
도자는 한국 장인정신의 상징이다. 비록 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도자산업은 위축됐지만, 뜨거운 장인정신을 품은 전통 장작가마는 이천 수광리에서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12칸의 '수광리 오름 가마'
12칸의 수광리 오름가마는 뜨겁게 데워진 열기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언덕을 따라 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다. 길이 27m의 흙으로 만들어져 얼핏 토성같이 보이기도 하는 오름가마.
그 위로 전통 처마가 세워졌고, 옆으로는 장작이 수북이 쌓여있다. 가마에서 시선을 돌리면 현대적인 감각의 카페와 열을 맞춘 도자기가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도자기 전시관이 있어 수광리 오름가마의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1949년 초축 칠기가마, 1962년 개축
현재 사용되는 가장 오랜 장작가마
故 조소수 선생 인수, 지금 형태로
현재 사용되는 가장 오랜 장작가마
故 조소수 선생 인수, 지금 형태로
수광리 오름가마는 1949년 초축된 칠기 가마를 1962년 개축한 12칸의 계단식 연실등요다. 가마 구조는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근대식으로, 내화벽돌을 사용한 것이 특징이다.
1960년대 이후 이천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신축·개축된 현대식 전통 장작가마 초기 양식으로, 현재까지 사용되는 장작가마 중에는 가장 오래됐다.
조선시대까지 전통가마는 점토를 이용해 지붕을 쌓고 바닥을 경사지게 만들었지만, 일본 아리타와 미노지역의 가마양식이 도입되면서 벽돌로 계단식 바닥을 깐 뒤 상부를 벽돌로 축조한 가마형태를 띠고 있다.
이전의 전통가마는 점토만을 이용해 오랫동안 사용하기 어려웠고 사용 중에도 천장에서 흙이 떨어지는 등 구조적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산업화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개량이 이뤄진 것이다.
오름가마를 자세히 보면, 아궁이에서 굴뚝을 바라보는 위치에서 오른쪽으로는 각 칸마다 출입구 1개, 불보기 창이 1개씩 설치돼있다. 출입문 쪽 바깥은 편평하게 시멘트로 단을 만들어 작업공간으로 사용하며 가마 외부에는 철골구조의 보호각이 설치돼있다.
가마는 소성할 때 1천200℃ 이상의 고온과 고압을 견뎌야 하기 때문에 피로도가 매우 높은데 보수를 거칠 때마다 조금씩 개량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유사한 도자기 가마로서는 김제 부거리 옹기가마(등록문화재 제403호)가 있으나, 단실등요라는 점에서 12칸의 연실등요 수광리 오름가마는 더욱 특별한 평가를 받고 있다.
도자 도시 이천의 시작
한국도자재단에 따르면, 조선에 비해 일찍 외국과의 교류를 시작한 중국·일본과 달리, 한국의 도자는 독자적인 노선을 밟아왔다. 중국과 일본이 서구의 취향에 맞게 형태를 바꾸고 대량생산을 하는 동안에도 고유의 형태를 유지해온 한국 도자는 일제 강점기에 큰 변곡점을 맞이했다.조선에서 도자기술을 도입한 일본은 도자 산업의 가능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산하 요업시험소를 뒀다. 이곳에서 대량생산을 위해 직영공동사업장을 세우고 가마형태도 일본식 가마와 접목해 대형화했다. 그러면서 고려청자 재현품과 같이 관광객들의 입맛에 맞는 제품을 생산, 수제품의 명맥을 이어왔다.
그러다가 제국주의 일본의 몰락과 미군정의 시작은 또 다른 변화를 불러왔는데, 바로 집단화다. 미군정 역시 한국도자의 가능성을 보고 전국에 흩어진 장인들을 서울 성북동이나 대방동으로 모아 도자를 생산하도록 했다.
이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1950년대 한국전쟁을 거치고 피폐해진 도시 서울에 인구가 몰리면서 산에 나무가 없어지자, 대량의 나무를 때 도자를 만드는 장인들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한국戰후 서울서 밀려난 도자장인
이천에 정착하며 르네상스 이끌어
이천에 정착하며 르네상스 이끌어
굴곡진 도자 역사의 끝은 한국 도자의 르네상스, 본격적인 도자 도시 이천의 역사 시작점이기도 했다.
당시 재래식 도자 공장이 있어 이천시에 4개의 가마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이를 이용하려던 장인들이 몰렸고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한국 도자의 우수성을 잊지 못한 일본인들이 관광기념품으로 도자를 찾으면서 이천의 도자산업은 번성하기 시작했다.
수광리 오름 가마를 신축한 고(故) 조소수 선생도 이때 기존의 장작가마를 인수해 지금의 형태로 만들었다. 당시 도자산업이 번성하면서 이천에는 수많은 장인들이 모여 지금도 과거를 발굴하고 현재를 만들어가고 있으며, 미래를 구상하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인터뷰] 장기훈 한국도자재단 감사팀장 "산업혁신 나타날 때마다 발전 거듭… 도자의 미래 기대"
수광리 오름 가마의 등록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조사한 장기훈(사진) 한국도자재단 감사팀장은 "전통가마는 건축물이라기 보다는 시설물에 가까워 어느 정도 사용하면 새로 만들어 사용한다. 사용하지 않는 가마는 금세 무너져 찾아볼 수 없다"며 "수광리 오름가마는 지속적으로 사용되고 보수되면서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전통가마"라고 설명했다.
1980년대 가스를 사용하는 가마가 보급되고 또 5칸 내외로 소형화되는 추세에서 수광리 오름가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모습이 됐다.
하지만 전통 가마를 볼 수 없다고 해도 장인정신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 기술 발전이 거듭하면 도자와 가마의 형태가 바뀐 것 뿐, 현재에도 또 미래에도 도자는 새로운 모습으로 생명을 이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장 팀장은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많은 이들이 찬사를 보내지만 기술이 발전하면서 도자도 발전하고 있다"며 "도자는 끊임없이 발전해왔고 앞으로도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장 팀장은 도자산업과 자동차산업을 비유했다. 그는 "도자의 역사를 보면 지금의 자동차산업과 같이 산업혁명, 혁신이 나타날 때마다 새로운 기술이 도입되고 발전을 거듭했다"며 "4차 산업혁명의 대표적인 기술인 3D프린터 등의 도입으로 누구나 도예인이 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부연했다.
이어 "지금의 한국 도자는 '조형'과 '전통'과 '생활'이라는 3가지의 분류를 융합하는 시점"이라며 "아직은 무엇이 될 지, 어떻게 변화할 지 모르겠지만 미래의 도자 역시 기대된다"고 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