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간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만세교 인근에 위치한 벙커에도 비상이 걸렸다. 북한군 제3사단과 제105전차사단 예하부대들이 남침을 시작해 만세교 방면으로 진출해왔다.
포천 주민들, 만세교로 모여 피란 시작
국군 제9연대 대전차특공대는 포천방어벙커에서 북한군 탱크의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나섰지만, 갑작스런 전투와 부족한 무기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북한군을 막아섰지만 전차포 사격에 밀려날 수밖에 없다.
주소, 포천시 신북면 기지리 45-2. 호국로 43번 국도와 포천천이 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위치한 포천방어벙커는 2013년 등록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된 경기도내 근대문화유산 중 하나다. 수 많은 한국전쟁 관련 문화재 중에서도 그 시작을 처음 목격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포천방어벙커는 남하하는 북한군의 기갑부대를 지연시켜 피란민을 보호하고 후반에 있던 국군이 전열을 갖출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 1948년 마련됐다. 한국전쟁 이전에 국군은 이같은 목적으로 총 4기의 대전차호 콘크리트 방어진지를 구축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머지 3기는 모두 전쟁 중에 멸실되고 유일하게 남은 것이 포천방어벙커다.
포천방어벙커가 지키는 43번 국도는 서울과 강원도, 함경도를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특히 한국전쟁 이전 남한과 북한을 가르던 38도선이 포천시를 반으로 가른 상태여서 전쟁이 시작된다면 가장 먼저 그 사실을 알게 될 곳도 포천방어벙커였다.
신북면 벙커서 저지… 피란 시간 벌어
그러나 기습적인 공격에 국군은 북한군의 발을 묶어두는데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포천방어벙커도 북한군 탱크부대 전차포로부터 사격을 받고 끝내 길을 내주고 말았다.
이후 아군경계부대인 국군 제9연대 2대대는 진지가 돌파되고 퇴로마저 차단돼 조직적인 철수를 하지 못하고 각개 분산된 채 남으로 이동했다. 비극적 한국전쟁은 이렇게 시작됐다.
다만, 포천방어벙커를 중심으로 구축한 만세교리 전선의 지연전을 통해 북한군의 남침을 일시 지연시켜 피란시간을 벌 수 있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총구의 크기와 모양은 수평으로 긴형과 정방형 등 다양하게 마련됐고, 총구의 형상은 바깥쪽보다 안쪽을 크고 넓게 구성해 방어력을 강화했다.
북한군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은 총구는 포격의 흔적으로 무너져 원래 형태를 잃었지만 70년이 지나도 여전히 튼튼한 모습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38도선 방어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상부 콘크리트 슬래브는 오랜 시간 노출된 탓에 철근이 부식되고 부분적으로 탈락한 콘크리트를 볼 수 있다.
기단 높이는 3.17m, 높이는 2m의 형태로 43번 국도에서 너무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전방을 조망하기에 어려움이 없도록 자리를 잡았다. 좁은 총구로 밖을 보면 시야가 트인 느낌은 없지만, 빈틈을 허용하지도 않는다. 전쟁에 있어 요충지인 43번 국도를 한 눈에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방어벙커의 역할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내부면적은 39.57㎡로 외부에서 봤을 때보다는 넓은 느낌이다. 성인 한 사람이 서 있어도 될 만큼의 높이에, 20명은 족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다.
당시 남침 대비 4개 건설… 1개만 남아
전쟁 참혹함·평화 소중함 함께 보여줘
바닥에 많은 사토가 유입된 흔적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 직립이 가능하며 수 십 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는 점에서 최초부터 대규모로 건설됐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총구의 크기와 모양만큼이나 높이도 다양해 여러 위치에서 적군을 막을 수 있도록 했다. 안쪽으로 석축을 쌓고, 시멘트 모르타르 등으로 보수한 흔적이 남아있고, 파괴된 총구 상부 일부도 시멘트 벽체에 흙을 덮어 보수한 흔적이 남아있다.
포천방어벙커를 조사한 문화재청에 따르면 두꺼운 벽체를 형성하는 자갈은 대부분 강자갈이지만, 일부 상부를 덮은 자갈은 20~30㎝의 돌이 발견돼 한국전쟁 이후에도 몇 차례의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아울러 남북간의 갈등이 악화일로를 걷던 1948년 북한군의 남침에 대비해 주공축선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건설된 4개의 방어벙커 중 하나로 확인됐지만, 나머지 3기의 방어벙커는 소멸돼 당시 남한의 전반적인 방어구상 등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당시를 기억할 만한 주민들도 만세교에서 피란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 발발 직후 포천방어벙커의 모습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포천방어벙커는 여전히 한국전쟁 현장에 남아 무수한 상처를 내보이며 한국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포천에서 한국전쟁을 겪은 40여명의 주민을 만나는 등 주민들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을 연구하고 있다는 향토사학자 한웅 씨는 "한국전쟁 초기의 모습을 보면 적군과 아군 구분이 안되던 혼란한 시기였다"며 "늦었지만 포천방어벙커 등 전쟁 초기의 모습과 주민들의 삶 등 한국전쟁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재훈·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그래픽/박성현기자 pssh0911@kyeongin.com/클립아트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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