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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1923년 촬영된 부국원. 강점기 발행된 엽서에 담긴 당시 부국원. 준공된 해인 1956년 촬영된 구 수원시청사. /수원박물관 제공
수원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다. 전통적으로 왕을 상징했던 화성행궁과 함께 고층빌딩이 공존하는 특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수원은 오랫동안 주요한 지위를 가진 도시였다는 것을 증명하듯, 과거의 영광과 함께 일제가 남기고 간 상처, 그 상처를 회복하고 더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려는 이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국가 등록문화재이자, 근대문화유산인 '부국원'과 '구 수원문화원', '구 수원시청사'에서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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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년 100년을 맞는 수원 '구 부국원'. 일본인이 세운 주식회사 부국원 건물로 지어졌다가 법원, 교육지원청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 격변의 현대사를 관통한 '부국원'


수원시 팔달구 향교로 130. 시대극의 한 장면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 한 채 서 있다. 수원 구 부국원(등록문화재 제698호)이다.

제국주의 일본은 수탈을 위한 증산 정책을 위해 품종 개량과 일본식 농법을 이식했다. 그 선상에서 일본인 이하라 고로베 등 8명은 1914년 농작물 종자·종묘·농기구·비료를 판매하는 '주식회사 부국원'을 설립하고 1923년(추정) 지금의 위치에 세운 건물이 우리가 '구 부국원'으로 부르는 것이다.

근대기 조적조 건축의 모습을 띠고 있는 부국원은 85.95㎡의 3층 건물로, 일제강점 후반에 전면과 양 측면에 타일이 시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3개의 아치형 창호를 설치해 미학적 가치를 높였다.

다만, 정확한 건립연도를 알기 어렵고 100년의 시간을 한 자리에서 지키면서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최초 건립 당시의 모습은 추정만 가능한 상태다. 2층 건물이었으나 중간에 3층으로 개조됐으며, 계단실의 정확한 위치도 알 수 없어 복원 전에 사용했던 계단은 철거하고 현재 목재 계단을 설치했다.

그도 그럴 것이 부국원은 해방 이후 법원(1952~1956)과 교육지원청(1957~1960), 공화당 경기도당(1974), 수원예총(1979)을 거쳐 한 때는 내과의원(1981~2010), 인쇄사(2010~2015)로 사용되기도 했다.

# 백년의 시간 버텨낸 '부국원'
농업회사 건물로 건립, 법원·공화당사 등 사용
근현대사 상징… 市 매입후 복원·전시관 활용


수원시는 2006년 시향토유적으로 지정하고 2015년 매입한 이후,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상당 부분 원형을 되찾았다. 수원시 역사와 관련된 전시가 주제를 바꾸며 진행되고 있다.

문화재청은 1910~1920년대에 건축된 조적조 업무용 시설이 대부분 붉은 벽돌외관을 갖고 있는데 반해 타일로 마감된 업무시설은 희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부국원은 근대문화유산 가운데서도 특별한 것은 일제 강점기 농업의 중심지였던 수원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위치상으로 성공회 성당과 수원향교, 구 수원문화원, 구 수원시청사, 구 경기도청사 등 일제부터 독립 이후, 근현대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곳에 상징적으로 위치한다는 것도 주요한 특징 중에 하나다.

꼬박 100년을 한 자리를 지킨 부국원은 일제의 수탈 야욕을 초기부터 목격했지만, 또 해방 이후 수원시민들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던 모습까지 지켜본 역사의 목격자다.

구 수원시청사 I 1956년 (수원박물관)
수원 구 문화원. 조선중앙무진회사 사옥으로 사용되다가 수원시청, 수원문화원 등으로 사용됐다. 우리나라 금융의 역사를 유추할 수 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 초기 금융을 엿볼 수 있는 '구 수원문화원'


1920년대 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구 수원문화원은 '조선중앙무진회사'의 사옥으로 건립된 벽돌조 2층 건물이다. 연면적 370.24㎡에 건축면적 186.64㎡로 초고층건물이 흔한 지금의 눈으로 볼 때는 초라하게 느껴진다. 도로변 주출입구도 지금은 각종 행사 등을 소개하는 게시판이 가리고 있어 이 건물의 특징이 눈에 띄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금의 주의를 기울여 본다면, 창 주변 등을 식물모양을 기본으로 하는 아르데코 장식을 사용하고 있어 1920년대 후반 모더니즘의 유행 직전의 건물 양식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 금융역사 유물 '구 수원문화원'
식물모양 아르데코 장식, 1920년대 양식 간직
일본식 '계' 영업… 건축주는 '한일은행' 모태


1953년 수원시로 소유권이 이전돼 1956년 수원시청 임시청사로 사용됐고 1960년대 이후 2007년까지 수원문화원으로 사용됐다. 2007년 리모델링 이후 수원시 가족여성회관으로 단장했고, 지금은 용담 안점순 기억의 방으로 꾸며져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 건물은 일본 금융의 한 형태인 무진이 이뤄진 곳이다. 무진은 조직에 가입해 일정 금액을 지속적으로 내고 경쟁이나 추첨 등에 의해 금액을 지급 받는, 우리나라의 '계'와 유사한 금융대부업이다.

건물을 지은 중앙무진회사는 1961년 한국무진주식회사에 흡수됐고, 그 다음해 한국국민은행으로 설립됐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또 한편에서는 조선신탁주식회사와 해방 후 병합돼 '한국흥업은행'으로, 다시 1960년 '한일은행'으로 탄생했다는 설명이다.

어느 쪽이든 구 수원문화원은 일제강점기 금융제도는 물론, 우리나라 금융제도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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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수원시청사. 한국전쟁 전후 복구기에 세워져 지금은 수원시가족여성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 한국 모더니즘 건축의 시작 '구 수원시청사'


수원시 가족여성회관의 또 다른 이름 '구 수원시청사'. 1956년 들어선 이 건물은 이 일대 등록 문화재 가운데 막내 격이다. 100년 역사를 넘나드는 인근의 다른 문화유산과 비교하자면 짧지만, 지금도 시민들이 역사를 쌓아가는 공간이라는 점만큼은 특별하다.

연면적 984.54㎡, 건축면적 514.2㎡, 높이 2층의 철근콘크리트 건물이다. 1956년 준공돼 1986년 권선동 신청사로 수원시청이 옮기기 전까지 수원시 행정이 이뤄지던 곳이다.

한국전쟁 후 복구기에 세워진 지방행정 청사 건물로서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견치석 쌓기로 만들어진 당시의 전형적인 관공서 건물로 평가된다.

# 전쟁후 건축 전형 '구 수원시청사'
전후 복구기 '모더니즘' 따른 지방행정 청사
원형 잘 보존… 주변지역 포함 한국사 압축

수원시는 한국 전쟁 중에 시청건물이 파괴돼 당시 중앙무진회사, 현 '구 수원문화원'을 임시청사로 사용했다. 휴전에 들어가자 시는 1954년 10월 27일 착공해 1957년 7월 26일 이 건물을 준공했다.

시가 직접 관리하면서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 당시 건축적 특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주변 지역을 보면 조선시대부터 있던 도로의 유구가 잘 남아있어 구 수원시청사까지 한국의 역사를 압축적으로 볼 수 있다.

이동근 수원시 학예연구사는 '수원시사-제국의 도시, 식민의 도시'를 통해 "수원의 도시적 변화 속에서 제국주의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과정을 볼 수 있다"며 "수원에서 가장 전통적인 것을 파괴하면서 도시를 재편했다. 그러면서 식민지의 시혜적 측면과 우월성만을 강조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수원은 전통도시 위에 식민도시가 건설된 모습"이라면서도 "그럼에도 수원은 화성을 지켜냈고,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보존·복원했다"고 근현대사적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김성주기자 ksj@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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