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강제 '기러기 아빠'
고개떨군 '대공장 아저씨들'

글로벌 GM은 지난해 11월 인천 부평 2공장의 컨베이어 벨트를 멈춰 세웠다. 이 공장에서 기름밥 먹으며 인천에 터를 잡아온 노동자 시민 약 1천200명의 일터가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그 가족까지 셈하면 3천600여명의 생계 기반이 흔들리는 엄청난 사태였지만 의외로 이 도시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회사는 부평 2공장 인원 중 500명 정도를 부평 1공장에 배치하고 700명가량은 창원공장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4년 전 군산공장 폐쇄의 아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기였다.
'무급 휴직'보다는 '유급 순환'이 더 나은 선택이었고 노사가 합의한 사항이었지만, 인천을 떠나고 싶은 이들은 없었을 게다. 취재 중 만난 한 노동자 말처럼 "20~30년간 인천을 벗어나 본 적 없이 집, 공장, 집, 공장 하며 살아왔던 사람들"이었다.
12월 9일, 인사 통보 문자메시지를 받은 창원공장 파견 노동자들. 집에서든 공장에서든 굳세 보이던 '대공장 아저씨'들이 하나둘 시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흘 뒤, 본인 의사에 반해 창원공장으로 650명에 대한 인사 발령이 이뤄졌다. 이 가운데 전보 희망자(247명)도 있었지만, 나머지 403명 대부분은 부평 잔류를 희망했던 파견자였다.
회사는 파견 기간을 '2년'(올해 정년퇴직자는 1년)이라고 했지만 '연장 등 변동 사항은 노사 협의로 결정한다'는 단서를 열어 놓았다. 파견 기간 연장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인사 이후 일부 퇴직자, 변경자(파견→전보)가 발생해 5월 현재 창원공장 파견자 수는 362명으로 파악된다.
650명중 403명 잔류 희망에도 발령
대규모 인사 주목… 신병 휴직자도
부평에서 약 400㎞ 떨어진 창원공장은 대중교통으로 4시간30분, 개인 차량으로 5시간30분 거리다. 매일 인천에서 창원으로 출퇴근할 수 없는 거리다 보니, 파견 노동자들은 한순간에 '기러기 아빠' 처지가 됐다. 자녀 유학은 선택이지만 지방 파견 근무는 노동자 입장에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반강제적 회사의 인사 명령이었다. 미혼 노동자들도 기존 생활권이 붕괴된 건 마찬가지다.
경인일보 기획취재팀은 두 달 전부터 이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지난 4월 10일 KTX를 타고 창원으로 내려가 첫 사전 인터뷰를 했다. 그들의 달라진 일상을 취재하고, 지방 파견 근무가 심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 들여다봤다.
창원 파견 노동자들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대기업 정규직이고 해고된 것도 아닌데 뭐가 어렵나"라는 주변의 반문도 이따금 있었지만, 이번처럼 대규모 지방 파견 사태는 드문 일이라 주목했다. 파견 근무를 겪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몸과 마음의 병이 동시에 와서, 혹은 불안한 가족을 두고 창원으로 떠날 수 없어서 진단서를 내고 신병 휴직 중인 이들도 있다. 창원에 갔지만 버티지 못해 신병 휴직을 시작한 노동자도 적지 않다.
신병 휴직자는 월 200만원 안팎의 임금을, 그것도 6개월까지만 받을 수 있다.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생계의 부담이 크지만 공장으로 돌아갈 수도 없어 애태우는 이들이다.
집 - 공장이 전부였는데
인사통보 한장의 무게, 고통에
삶이 짓눌렸다

대부분의 휴가를 인천 방문을 위해 썼다. 특근 한 번 해본 적 없을 정도였다. 회사에 낸 고충처리가 4년 만에 받아들여져 2016년 2월 부평에 왔다. 본인의 희망을 회사가 수용한 것이다.
2년 전에는 아예 어머니가 거주하는 아파트 앞 동에 집을 얻어 아내와 함께 살았다.
인천 떠나 창원으로… 강요된 '타향살이'
"회사에서 (부임지원비) 1천만원 줄 테니 (창원으로) 내려가라"고 했다고 하니 아내는 "5억원을 준다고 해도 내려갈 수 없다"며 절망했다.
4년만에 받아줬지만 회사는 다시 창원 가라
인사철회 1인시위 나서다가 공황 장애 진단
그날 병원에 갔다. 중증 우울증 에피소드, 공황 장애, 적응 장애 진단이 나왔다. 그는 울먹이며 의사에게 말했다. "내가 아프게 된 게 너무 서글프고 열이 받아요. 안 아플 수 있게 배려받지 못한 것에 너무 화가 나고요. 어떻게 하면 안 아플 수 있나요? 이 약을 먹으면 안 아플 수 있나요?"
그는 신병 휴직을 낼 수밖에 없었고, 현재 인천 집에 고립돼 있다. MBTI 검사를 하면 외향형(E)이었다는 그는 그날 이후로 좀체 밖에 나가지도, 사람을 만나지도 못한다.
지난 3월 자신의 SNS에는 이런 글을 남겼다. 단어마다 마침표를 찍어 끊어 쓰는 것이 꼭 그의 말투를 닮아 그대로 옮긴다. "식물같이.나도.고개를.푹.숙이다가.생기를.잃지는.않을까… 이제.축하파티보다.걱정파티가.대부분인게..시들어가는건가..싶다."

그가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시울을 붉히며 10초 정도 말을 잇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 "창원에 처음 간 날에 대해 들려줄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서였다. 30년 전 부평공장에 입사한 오성근씨는 정리해고된 2001~2006년을 제외하면 인천을 떠난 적이 없다.
생산관리부에서 일하다 조립부 엔진직 배치
우울증 약 처방받고 허리 다쳐 디스크 소견
서러움, 배신감, 두려움 등 여러 감정이 밀려와 밤새 뒤척였다. 이튿날 출근한 공장에서 앞으로 일하게 될 부서를 처음 알게 됐다. 부평 2공장 생산관리 2부에서 일했던 그는 조립부 엔진직으로 배치됐다. 54초에 한 대씩 엔진을 공급한다.
그는 양쪽 어깨 회전근개 파열로 2018년(왼쪽), 2023년(오른쪽) 각각 업무상 질병을 인정받았다. 2019년에는 신경내분비종양을 진단받았다. 창원에 오고 나서 지난 2월부터 우울증으로 약을 처방받는다. 최근(5월 23일)에는 6㎏ 무게의 엔진부품을 들어올리는 중량물 작업을 하다가 허리를 다쳤고 디스크 소견을 받아 입원했다.
부평공장 근무 시절 퇴근 후 꼭 운동을 나갔던 그는 창원에서는 어딜 나가질 못한다. "일주일에 3~4번 정도는 어지러워서 쓰러져요. 증상이 매번 달라요. 온몸이 떨리고, 몸이 무너지거나 바닥이 꺼지는 듯한 느낌도 있어요."
김씨는 인터뷰 중 "기자님을 만나기 전에 '기자님에게 억울하고 답답한 거 다 얘기하고 자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최민 활동가가 '전문가적 개입'을 할 수 있었고, 그는 "걱정하지 마세요. 가족 때문이라도 살아야 하는데 일이 공교롭게 진행되네요"라며 한숨 섞인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김영수씨는 부평 2공장 가동이 중단되기 전부터 마음의 병을 앓았다. 직장 내 괴롭힘 고충처리과정에서 생긴 병이다. 그가 보여준 S병원 진단서(2022년 3월)에는 상세 불명의 우울증 에피소드가 주상병으로, 공황장애(우발적 발작성 불안)와 상세 불명의 수면장애가 부상병으로 적혀 있었다.
창원 출근했다 병세 깊어져 극단적 생각도
매일 밤잠 설치고 잠들려 마시는 술도 늘어
병은 더 깊어졌다.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 흉기로 해를 입힐 것이란 피해 의식으로 불안감에 시달린다. 기숙사 출입문에 잠금장치를 추가로 설치했다. 매일 밤잠을 설친다. 잠들기 위해 마시는 술의 양이 늘었다.
그는 하소연했다. "밤새 잠 못 이루다가 오전 6시 알람소리가 울리면 희한하게 잠이 몰려와요. 눈이 뻘겋게 충혈되니까 안약을 눈에 넣고 출근해요. 하늘은 맑은데 제 눈에 세피아(검은색에 가까운 흑갈색) 필터가 있는 것처럼 뿌옇기만 해요.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마시멜로처럼 물렁물렁해 비틀거려요. 일은 고되지, 몸은 힘들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는 받고 있지, 잠은 못 자지… 가끔 소리치고 싶은 그게 있어요."
회사가 정한 시간 내에 반복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어깨를 많이 쓴다거나 몸을 구부리는 등 불편한 자세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에게 선택권이 부여된다면 누구나 피하는 곳이 조립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원공장 파견자 상당수가 조립부로 배치됐다고 한다.
입사 32년째인 주철민(56·가명)씨는 부평 2공장 근무 당시인 2013년 뇌경색으로 몸 왼쪽 전체가 마비된 적이 있다. 회사에 낸 고충이 받아들여져 조립부에서 생산관리부로 이동했다.
창원 인사 전 면담에서 "장애인 증명서를 제출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사측은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했다. 결국 그는 창원으로 파견됐다.
회사가 정한 시간 내에 반복 업무 처리해야
주철민씨, 장애 판정 받았는데도 파견 강행
그는 지난 3월부터 신병 휴직을 하고 창원 기숙사에서 홀로 지내고 있다. "한 번은 너무 힘들어 조퇴를 하고 기숙사에 왔는데 너무 자괴감이 드는 거예요. 출근하면 또 그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엄청 두렵고. 라인이 세워지면 거기서 모든 독박은 제가 쓰는 거예요. '왜 빨리 못하냐'는 사람들이 밉고, 한편으로는 못 따라가는 내가 밉고. 그러니까 자학을 해요, 자학을."

군산에서 나고 자란 박용희(52·가명)씨는 1996년 군산공장으로 입사했다. 2018년 2월 13일 공장이 폐쇄됐다. 그해 5월까지 급여가 나왔고, 이후 1년간 정부 지원금 180만원으로 살았다. 2019년 10월 부평 2공장으로 왔다. 군산에 두고 온 가족이 눈에 밟혔다. 군산에서는 퇴근 후 늘 함께 식사하는 화목한 가정이었다.
맞벌이로 일하며 두 아이를 양육하던 아내도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1년 뒤 군산의 가족 모두가 인천으로 왔다. 부평 2공장이 언젠가 문을 닫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창원공장으로 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조립부에서 일하며 허리를 다쳤고,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1학년의 사춘기 아이들을 돌봐야 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면담에서 이런 사실을 말했지만 허사였다. 사측 인사는 "어차피 부평에 있어도 조립 파트에 있을 거, 창원 조립부에 가서 조금만 있다 오라"고 말했다. 그는 휴직을 하고 허리 부상의 산재를 인정받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2004년 결혼한 아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혼하고 19년 동안 회사가 잘 돌아갔던 게 1년, 2년이나 되는지 모르겠다"라고.
한편, 인천지방노동위원회는 지난 4월 27일 심판회의를 열어 창원 파견 노동자 25명이 제기한 부당 인사 발령 구제 신청을 기각했다. 지노위는 "이들의 생활상 불이익이 통상 감수해야 할 정도를 현저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기자가 보고 들은 현장과는 괴리가 있는 판정이었다.
/기획취재팀
※기획취재팀
취재 : 김명래 팀장, 한달수 기자
사진 : 김용국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