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면에 이어([한국지엠기획-GM부평노동자, 창원 파견 그후·(上)] "이렇게 아프게 된 내 처지가 서글프다")
■ "인사 명령을 통보합니다."
10여 년 전 보령공장으로 입사했다. 인천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부평에 홀로 남은 어머니에게 우울증이 찾아왔는데 주위에 돌봐줄 이가 없었다. 보령에서 인천까지 154㎞ 거리를 거의 주말마다 오갔는데 운전 중 사고를 당할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부분의 휴가를 인천 방문을 위해 썼다. 특근 한 번 해본 적 없을 정도였다. 회사에 낸 고충처리가 4년 만에 받아들여져 2016년 2월 부평에 왔다. 본인의 희망을 회사가 수용한 것이다.
2년 전에는 아예 어머니가 거주하는 아파트 앞 동에 집을 얻어 아내와 함께 살았다.
"내려가셔야 한다, 내려가실 거라 믿는다"
인천 떠나 창원으로… 강요된 '타향살이'
이런 고충처리 기록이 있으니 창원에 가지 않아도 될 것으로 믿었지만, 인사 명령을 앞두고 진행된 면담에 나온 사측 인사는 이면지 한 장 달랑 들고 나와 "(창원으로) 내려가셔야 한다. 내려가실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창원 파견자 정민수(40·가명)씨 얘기다.
"회사에서 (부임지원비) 1천만원 줄 테니 (창원으로) 내려가라"고 했다고 하니 아내는 "5억원을 준다고 해도 내려갈 수 없다"며 절망했다.
정민수씨, 홀어머니 돌보기 위해 부평 지원
4년만에 받아줬지만 회사는 다시 창원 가라
인사철회 1인시위 나서다가 공황 장애 진단
정민수씨는 공장 내부에서 인사 철회를 요구하는 1인 시위에 나섰다. 3일째 되는 날인 2022년 12월 14일. 생애 처음 겪는 증상이 찾아왔다. "심장이 맥박 뛰는 이런 느낌이 아니라 곡선이 엄청 큰 파도 같이 뛰었어요."
그날 병원에 갔다. 중증 우울증 에피소드, 공황 장애, 적응 장애 진단이 나왔다. 그는 울먹이며 의사에게 말했다. "내가 아프게 된 게 너무 서글프고 열이 받아요. 안 아플 수 있게 배려받지 못한 것에 너무 화가 나고요. 어떻게 하면 안 아플 수 있나요? 이 약을 먹으면 안 아플 수 있나요?"
그는 신병 휴직을 낼 수밖에 없었고, 현재 인천 집에 고립돼 있다. MBTI 검사를 하면 외향형(E)이었다는 그는 그날 이후로 좀체 밖에 나가지도, 사람을 만나지도 못한다.
지난 3월 자신의 SNS에는 이런 글을 남겼다. 단어마다 마침표를 찍어 끊어 쓰는 것이 꼭 그의 말투를 닮아 그대로 옮긴다. "식물같이.나도.고개를.푹.숙이다가.생기를.잃지는.않을까… 이제.축하파티보다.걱정파티가.대부분인게..시들어가는건가..싶다."

■ 갑작스런 한파와 함께 시작된 창원살이의 고단함
주말 인천 집에 온 오성근(54·가명)씨를 처음 만난 건 지난 4월 30일 저녁 7시, 한국지엠 서문 쪽 사거리 한 커피숍이었다. 그는 3시간 인터뷰 내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끔 머리를 떠는데, 무언가에 집중할 때 그런다며 양해를 구했다.
그가 오른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시울을 붉히며 10초 정도 말을 잇지 못한 순간이 있었다. "창원에 처음 간 날에 대해 들려줄 수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서였다. 30년 전 부평공장에 입사한 오성근씨는 정리해고된 2001~2006년을 제외하면 인천을 떠난 적이 없다.
오성근씨, 작년 창원 발령후 배신감·두려움
생산관리부에서 일하다 조립부 엔진직 배치
우울증 약 처방받고 허리 다쳐 디스크 소견
창원 파견을 하루 앞둔 2022년 12월 18일 일요일의 창원은 최저기온 영하 7℃의 한파였다. 동료의 차를 얻어 타고 기숙사인 남산동 대우아파트에 갔다. 전용면적 37㎡에 큰방 1개, 작은방 1개에 작은 거실이 있는 공간이다. 10여 년 전에는 창원공장 직무훈련생들이 사용했는데, 당시에는 방을 쪼개 6명이 생활했다고 한다. 그는 당일 임의로 방을 배정받았다.
서러움, 배신감, 두려움 등 여러 감정이 밀려와 밤새 뒤척였다. 이튿날 출근한 공장에서 앞으로 일하게 될 부서를 처음 알게 됐다. 부평 2공장 생산관리 2부에서 일했던 그는 조립부 엔진직으로 배치됐다. 54초에 한 대씩 엔진을 공급한다.
그는 양쪽 어깨 회전근개 파열로 2018년(왼쪽), 2023년(오른쪽) 각각 업무상 질병을 인정받았다. 2019년에는 신경내분비종양을 진단받았다. 창원에 오고 나서 지난 2월부터 우울증으로 약을 처방받는다. 최근(5월 23일)에는 6㎏ 무게의 엔진부품을 들어올리는 중량물 작업을 하다가 허리를 다쳤고 디스크 소견을 받아 입원했다.
부평공장 근무 시절 퇴근 후 꼭 운동을 나갔던 그는 창원에서는 어딜 나가질 못한다. "일주일에 3~4번 정도는 어지러워서 쓰러져요. 증상이 매번 달라요. 온몸이 떨리고, 몸이 무너지거나 바닥이 꺼지는 듯한 느낌도 있어요."
■ "창원 인사는 사형 선고", 더욱 깊어진 마음의 병
김영수(40·가명)씨를 창원 기숙사에서 만난 5월 1일엔 최민(직업환경전문의) 한국노동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와 동행했다.
김씨는 인터뷰 중 "기자님을 만나기 전에 '기자님에게 억울하고 답답한 거 다 얘기하고 자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다행히 최민 활동가가 '전문가적 개입'을 할 수 있었고, 그는 "걱정하지 마세요. 가족 때문이라도 살아야 하는데 일이 공교롭게 진행되네요"라며 한숨 섞인 말을 천천히 내뱉었다.
김영수씨는 부평 2공장 가동이 중단되기 전부터 마음의 병을 앓았다. 직장 내 괴롭힘 고충처리과정에서 생긴 병이다. 그가 보여준 S병원 진단서(2022년 3월)에는 상세 불명의 우울증 에피소드가 주상병으로, 공황장애(우발적 발작성 불안)와 상세 불명의 수면장애가 부상병으로 적혀 있었다.
김영수씨, 부평공장 중단 전부터 마음의 병
창원 출근했다 병세 깊어져 극단적 생각도
매일 밤잠 설치고 잠들려 마시는 술도 늘어
부평 2공장이 문을 닫고, 창원 발령을 결정하는 면담에서 그는 "지금 창원에 내려가라는 건 사형선고예요. 이러면 저 진짜 죽어요"라면서 딱한 사정을 말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천에 남아 신병 휴직을 3개월 쓴 다음, 남들보다 늦은 시기 창원공장 조립부로 출근했다.
병은 더 깊어졌다. 누군가 자신을 찾아와 흉기로 해를 입힐 것이란 피해 의식으로 불안감에 시달린다. 기숙사 출입문에 잠금장치를 추가로 설치했다. 매일 밤잠을 설친다. 잠들기 위해 마시는 술의 양이 늘었다.
그는 하소연했다. "밤새 잠 못 이루다가 오전 6시 알람소리가 울리면 희한하게 잠이 몰려와요. 눈이 뻘겋게 충혈되니까 안약을 눈에 넣고 출근해요. 하늘은 맑은데 제 눈에 세피아(검은색에 가까운 흑갈색) 필터가 있는 것처럼 뿌옇기만 해요.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이 마시멜로처럼 물렁물렁해 비틀거려요. 일은 고되지, 몸은 힘들지,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는 받고 있지, 잠은 못 자지… 가끔 소리치고 싶은 그게 있어요."
■ 자동차 공장의 '아오지', 조립부로 몰린 파견 노동자들
언론은 '자동차 공장의 꽃'으로 조립부를 소개하곤 하지만, 현장 노동자들은 '아오지'로 불렀다. '라인을 탄다'라는 건 컨베이어 벨트의 통제에 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회사가 정한 시간 내에 반복 업무를 처리해야 한다. 어깨를 많이 쓴다거나 몸을 구부리는 등 불편한 자세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본인에게 선택권이 부여된다면 누구나 피하는 곳이 조립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원공장 파견자 상당수가 조립부로 배치됐다고 한다.
입사 32년째인 주철민(56·가명)씨는 부평 2공장 근무 당시인 2013년 뇌경색으로 몸 왼쪽 전체가 마비된 적이 있다. 회사에 낸 고충이 받아들여져 조립부에서 생산관리부로 이동했다.
창원 인사 전 면담에서 "장애인 증명서를 제출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사측은 "안 하셔도 됩니다"라고 했다. 결국 그는 창원으로 파견됐다.
현장 노동자들은 '아오지'라 부르는 조립부
회사가 정한 시간 내에 반복 업무 처리해야
주철민씨, 장애 판정 받았는데도 파견 강행
창원공장은 그를 엔진 조립부로 보냈다. 라인을 타고 넘어오는 엔진에 호스와 파이프를 끼우려면 양손을 다 써야 한다. 그러나 후유증이 남아있는 왼쪽 손아귀에 힘을 주지 못하니 속도를 따라가기 벅찼다. 일이 늦어지면 라인이 멈춘다. 도와주는 동료도 있지만 모두 그럴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 지난 3월부터 신병 휴직을 하고 창원 기숙사에서 홀로 지내고 있다. "한 번은 너무 힘들어 조퇴를 하고 기숙사에 왔는데 너무 자괴감이 드는 거예요. 출근하면 또 그 작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엄청 두렵고. 라인이 세워지면 거기서 모든 독박은 제가 쓰는 거예요. '왜 빨리 못하냐'는 사람들이 밉고, 한편으로는 못 따라가는 내가 밉고. 그러니까 자학을 해요, 자학을."

■ 군산에서 인천, 인천에서 다시 창원으로
군산에서 나고 자란 박용희(52·가명)씨는 1996년 군산공장으로 입사했다. 2018년 2월 13일 공장이 폐쇄됐다. 그해 5월까지 급여가 나왔고, 이후 1년간 정부 지원금 180만원으로 살았다. 2019년 10월 부평 2공장으로 왔다. 군산에 두고 온 가족이 눈에 밟혔다. 군산에서는 퇴근 후 늘 함께 식사하는 화목한 가정이었다.
맞벌이로 일하며 두 아이를 양육하던 아내도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1년 뒤 군산의 가족 모두가 인천으로 왔다. 부평 2공장이 언젠가 문을 닫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본인이 창원공장으로 가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조립부에서 일하며 허리를 다쳤고, 고등학교 2학년과 중학교 1학년의 사춘기 아이들을 돌봐야 할 시기였기 때문이다.
면담에서 이런 사실을 말했지만 허사였다. 사측 인사는 "어차피 부평에 있어도 조립 파트에 있을 거, 창원 조립부에 가서 조금만 있다 오라"고 말했다. 그는 휴직을 하고 허리 부상의 산재를 인정받기 위한 절차를 밟고 있다. 2004년 결혼한 아내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결혼하고 19년 동안 회사가 잘 돌아갔던 게 1년, 2년이나 되는지 모르겠다"라고.
한편, 인천지방노동위원회는 지난 4월 27일 심판회의를 열어 창원 파견 노동자 25명이 제기한 부당 인사 발령 구제 신청을 기각했다. 지노위는 "이들의 생활상 불이익이 통상 감수해야 할 정도를 현저히 벗어났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기자가 보고 들은 현장과는 괴리가 있는 판정이었다.
/기획취재팀
※기획취재팀
취재 : 김명래 팀장, 한달수 기자
사진 : 김용국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