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프롬인천-박규희
클래식 기타리스트 박규희.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2016년 10월의 어느날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에서 한 연주회가 열렸다. '클래식 기타리스트 박규희의 여섯줄에 담은 꿈'이란 제목의 커피콘서트였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과 '아라비아 기상곡' 등 클래식 기타를 대표하는 명곡으로 관객들의 혼을 빼놓은 박규희가 잠시 기타를 놓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고는 객석 한가운데서 연주를 감상하던 백발의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프로그램 노트에는 연주해야 할 곡이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뜻밖의 퍼포먼스에 관객들의 호기심이 고조됐다. 노인은 멋쩍은 표정으로 미소만 머금었다.

"저 분이 없었다면 제가 이렇게 성장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어지는 박규희의 부연에 노인을 향해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그녀가 감사의 마음을 담아 소개한 사람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기타 오케스트라를 창단한 리여석 단장이다.

다섯살때 국내 '클래식 기타 선구자'
리여석 단장과 만남… 찬조무대도 올라
10년간 사사후 부모님따라 일본 유학
도쿄음대 거쳐 빈국립음대 수석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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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공원

박규희는 1985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출생 직후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일본으로 이주했고 만 3세때 귀국했다. 박규희가 기타를 잡은 것은 3세부터라고 한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제가 기억이 없을 때부터 기타를 이미 하고 있더라고요." 천상 '기타인생'이다.

하지만 뚜렷이 기억하는 게 있다. 다섯살 때 운명적으로 이루어진 리여석 단장과의 만남이다. 리여석 단장은 70년대 초 인천의 한 여자중학교 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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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기타리스트 박규희.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클래식 기타가 '고전기타'란 이름으로 극히 일부에서만 연주 및 교습활동이 이루어지던 시절, 그는 고전기타합주단을 창단하고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당시 기타는 '딴따라 악기'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다. 여자중학교에서 기타동아리를 만들기까지 그만큼 우여곡절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혁신적 사고와 음악적 열정은 경기중고등학교(당시 인천은 행정구역상 경기도에 속해 있었다) 음악 콩쿠르 현악부에서 수차례 우승하는 쾌거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 클래식 기타 음악사에 중요한 한 획을 긋게 된다.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기타만으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인 '리여석기타오케스트라'는 바로 '고전기타합주단'이 모태다.

리여석 단장의 지휘 아래 기타줄을 튕기던 단발머리 여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기타를 놓지 않았고 리여석 단장이 이끄는 전문연주단체의 길에 합류했다. 박규희가 기타를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다섯살 때 찾아간 곳이 바로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 자리잡은 리여석기타오케스트라다.

박규희_리여석 선생님
박규희는 인천에서 리여석 단장을 만나 기타리스트로 꿈을 키웠다. /뮤직앤아트컴퍼니 제공

객석의 노인을 일으켜 세운지 7년이 지나 만난 박규희는 인천에 대한 기억으로 리여석이란 이름부터 꺼내들었다.

"클래식 기타를 너무 배우고 싶다고 어머니에게 졸랐던 기억이 있어요. 어머니가 성화에 못 이겨 수소문을 하셨는데, 친구분이 인천에서 유일하게 (클래식)기타를 가르치고 계신 분이 있다며 리여석 선생님을 소개시켜주셨어요. 그렇게 해서 부모님과 함께 리여석 선생님을 찾아가게 됐어요."

하지만 리여석 단장으로부터의 사사(師事)는 쉽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단박에 거절을 당한 것이다. 어린 가슴에 독기(?)를 품었던 걸까. 6개월 후 다시 찾아갔다.

"포기할 수 없었어요. 6개월 후에 다시 갔더니 그때는 받아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제가 다시 일본에 간 중학교 3학년 때까지 10년 동안을 리여석 선생님 밑에서 배웠어요."

리여석 단장의 제자가 된 박규희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자기 몸집보다 큰 기타를 메고 리여석기타오케스트라가 있는 자유공원 꼭대기를 오르내렸다. 연습실에서 늦게까지 연습하다 스승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기도 했고 리여석기타오케스트라의 공연현장에서는 맨 앞줄에서 두 손에 턱을 괴고 귀를 쫑긋 세웠다.

박규희의 재능을 알아본 리여석 단장은 그를 무대에 올려 고사리손의 연주를 청중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찬조출연으로 오른 무대에서 '라리아나의 축제'를 멋지게 연주한 꼬마 기타리스트는 그때부터 리여석 단장을 비롯한 단원들로부터 '무대 체질'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박규희는 무엇보다 기타의 연주법 중 하나인 '트레몰로' 주법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기타를 모르는 사람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이란 곡에 사용되는 주법이다. 고른 음을 유지하는 게 관건인 난도 높은 주법인데 '힘을 빼고 연주하라'는 리여석 단장의 가르침이 트레몰로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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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희는 2008년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악대학에 입학, 학부를 거쳐 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빈 국립음대에서 알바로 피에리를 사사했다. /뮤직앤아트컴퍼니 제공

 

아홉 번의 국제 콩쿠르 우승 거머쥐어
2012년 카네기홀 무대·스페인서 석사 과정
인천서 10여회 공연…"자유공원 언덕길
떡볶이집 아직 그대로 있어 좋아"

박규희는 이처럼 귀국 후 기타와 함께 10여년을 보내는 동안 인천에서 효열초, 도화초, 대화초 등으로 학교를 옮겨 다녔다. 아버지의 직장 문제로 전학을 자주 가야 했기 때문이다. 중학교는 서울의 예원학교로 통학을 했다.

전학을 자주 다닌 데다 기타를 끼고 살던 시절이라 학창시절의 추억이 있을까 싶었지만 의외로 쏠쏠한 인천에서의 '성장 스토리'를 품고 있었다.

"초등학생 시절, 교우 관계는 좋았지만 전학을 자주 다녀서 남아 있는 친구가 거의 없어요. 그래도 생각나는 친구가 있는데, 키가 엄청 큰 친구였어요. 저는 반에서 제일 작았고요. 저에게 참 잘해줘서 항상 같이 붙어다녔는데 참 든든한 친구였어요."

지금은 사라진 송도유원지에도 추억이 깃들어 있다고 한다. "한번은 송도유원지에 놀러 갔다가 부모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어요. 유원지 측에서 방송으로 부모님을 찾아줬는데 부모님이 올 때까지 얼마나 울었는지…."

인천에서의 추억을 뒤로 하고 중 3때 부모님을 따라 일본으로 다시 건너간 박규희는 일본 도쿄음대를 거쳐 오스트리아 빈국립음악대학을 수석 졸업했다. 수석 졸업에 걸맞게 국제 콩쿠르에서의 수상 경력 또한 화려하다. 지금까지 스페인 알함브라 콩쿠르 포함, 아홉 번의 국제 콩쿠르 우승을 기록했다.

우승과 함께 청중상까지 거머쥔 알함브라 콩쿠르에서는 우승 부상으로 세계적인 레이블 '낙소스'(Naxos)에서 앨범을 발매하고 스페인 전역에서 투어 공연을 진행했다. 특히 벨기에 프렝탕 국제 기타 콩쿠르에서는 최초의 여성 우승자이자 최초의 아시아인 우승자로서 이름을 올렸다.

2012년 10월에는 뉴욕 카네기홀(와일홀)에서 미국 데뷔 무대를 가졌고 수시로 유명 오케스트라와 협연 무대를 갖는 등 세계의 다양한 무대에서 활약하며 클래식 음악계에 박규희란 이름을 각인시켰다.

박규희 다니엘 프리드리히
박규희의 기타는 세계적 클래식 기타 제작가 다니엘 프리드리히(1932~2020)가 직접 만들어 준 것이다. /뮤직앤아트컴퍼니 제공

지금까지 베스트 앨범을 포함해 총 10장의 앨범을 발표했는데, 폰텍 레이블에서 발매한 2010년 데뷔앨범 '스에뇨'와 2012년에 선보인 '소나타 누아르'는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으며 '롱 베스트셀러 앨범'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규희의 기타연주는 수를 놓듯 섬세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완벽주의적 성향으로 작품을 세밀하게 해석하는 동시에 풍부한 감성과 깊이 있는 내면을 갖추어 예술적 감동이 살아있는 음악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스페인 알리칸테 음악원에서 마스터 과정 수석 졸업 후 석사과정에 재학 중이며 동시에 유럽과 한국, 일본 등 세계 각지의 다양한 무대에서 활발한 콘서트 활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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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희는 "지금도 인천에 가면 힐링이 된다"며 인천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제가 기타를 시작하고 또 가장 오랫동안 기타를 배웠던 인천이라는 곳에서 조금씩 넓은 곳으로 나오고 있다고 생각해요. 특히 리여석 선생님과의 만남을 이뤄지게 했던 곳이 인천이라는 점을 항상 마음속에 담고 있어요. 저에게 인천은 고향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지금도 인천에 가면 기타를 메고 오르내리던 자유공원의 언덕길과 즐겨 찾던 떡볶이 집이 그대로 있어 너무 좋아요."

박규희는 전문연주자의 길을 걸은 후 지금까지 콘서트를 위해 10여차례 인천을 찾았다.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송도트라이볼, 소래아트홀 등에서 관객과 만났는데 고향이라 그런지 인천에서 공연을 하면 관객들의 반응에서 가족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세계적 기타리스트에게 인천은 꿈과 희망, 열정 그리고 사랑이 어우러진 도시였다.

/임성훈기자 hoon@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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