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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프롬인천 오원배

예술가를 예술가답게 만드는 대표적 기질 가운데 중요한 하나를 꼽자면 호기심이 아닐까. 새롭고 신기한 것이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하는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이야말로 예술가의 창작 활동을 가능하게끔 하는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I'm from 인천> 10번째 주인공 서양화가 오원배 동국대 명예교수를 만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원배 명예교수는 "단 한순간도 실험적 작업을 해야 한다는 태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며 "호기심을 지금껏 유지하고 있다"고 말한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호기심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일까. 나이 70의 그를 '청년'이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고 한다. 노년과 청년을 구분하는 기준이 꼭 나이는 아니다.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해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從心)의 나이 '청년 오원배'는 그렇게 마음 가는 대로 호기심에 이끌려 세상과 인간에 대한 관심을 거대한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묘비석 뒹구는 화장터·물 빠진 갯벌·기차 다니던 철길…
그 모든 것이 매력적인 놀이터 같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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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프롬인천 오원배

꼭 70년 전 인천에서 태어나 자란 꼬마 오원배 역시 지금처럼 호기심이 충만했다. 그에게 도시 인천은 꼬마 오원배의 호기심을 채워줄 것들로 가득한 테마파크나 다름없었다. 묘비석이 나뒹구는 화장터, 물 빠진 갯벌, 바다에 띄워 놓은 원목, 기차가 다니던 철길이 그에게는 모두 하나같이 매력적인 놀이기구였다.

오원배는 195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평양 출신 오응호(1911~1985)씨와 충남 홍성 출신 김정여(1921~2006년)씨 사이에 태어난 4남매 가운데 셋째였다. 당시 인천고등학교가 자리를 잡고 있던 현재 인천정보과학고등학교 인근 중구 유동에 있는 집에서 가족이 함께 살았다.

1883년 개항 이후 외국인묘지 많던 풍경
바닷가서 놀던 어린시절, 귓가엔 소금자국
기차 올때 맞춰 철로에 못 올려놓는 놀이
'나비 날개 만지기' 하고싶으면 하던 아이

"동네 형들을 쫓아다니며 놀았죠. 집 근처 시립도서관(현 율목도서관) 인근에 화장터가 있었어요. 여기저기 묘비석이 나뒹구는 곳이었는데, 뛰어놀기에 참 좋았어요."

1883년 개항 이후 빈번하게 외국인이 드나들었고 머물렀던 도시 인천에 외국인묘지가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그들도 숨지면 장례를 치르고 결국 땅에 묻혀야 했다. 일본인과 청국인, 서양인의 묘지가 각지에 있었다. 오원배가 살던 동네 인근 율목동에는 일본인 묘지와 화장터가 있었다. 일본인 묘지는 해방 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한동안 유지됐다. 일본인 묘지 철거된 이후 그 자리는 공원으로 조성됐고, 1970년대에는 '풀장'이 들어선다. 1990년대 풀장 폐쇄 이후에는 다시 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유골은 1960년대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남은 묘비는 인천가족공원 일본인 묘역으로 이전됐고, 이후 다시 가족공원 내 외국인 특화 묘역으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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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프롬인천 오원배

"당시 최고의 놀이터는 아무래도 바닷가였던 것 같아요. 집에서 30여 분 걸어가면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낙섬이 나오는데 둑방(제방) 왼쪽으로 염전이, 오른쪽은 바다였어요. 둑방 돌 틈에 웃옷을 벗어 끼워놓고 갯벌의 긴 고랑에서 허기질 때까지 놀다 집으로 돌아오고는 했죠."

오원배의 기억에도 당시 갯벌에서 어린이가 익사하는 일이 흔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하면 한 반에서 책상 한두 자리는 비어있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옛날 신문을 뒤져보면 어린 소년이 바다에서 조수에 휩쓸려 익사했다는 기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오원배의 모친은 "바닷가 근처에는 가지도 말라"며 신신당부했지만 호기심 많은 아이에게 어머니의 경고가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실컷 놀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바닷가에 가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했어요. 7살 때였을까 아마 제 생애 최초의 거짓말이 아니었나 합니다. 귀에는 바닷물 염분 때문에 하얗게 소금 자국이 앉아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웃음)

초등학교 1학년 시절에는 갑자기 불어난 물 때문에 갯골에 빠져 허우적대다 중학생 형이 건져줘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어머니의 신신당부를 몸소 체험했다. 오원배는 그날의 기억을 되살려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은 지난 6월부터 10월15일까지 한국근대문학관에서 열리는 기획전시 '이미지로 건너오는 시들'에 허위(생몰연도 미상)의 시(詩) '무정(無情)하다 인천(仁川) 바다'(청년, 1923년 1월) 옆에 나란히 걸려있다.

아임프롬인천 오원배
아임프롬인천 오원배

가장 짜릿했던 놀이는 바닷물에 띄워 놓아 출렁거리는 원목을 발로 굴리는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당시 만석포구, 북성포구에는 목재회사의 저목장(貯木場)이 있었다. 오원배는 대성목재라는 회사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목재 회사들은 나무를 육상뿐 아니라 바다 위에도 저장했다. 온통 나무로 뒤덮여있으니 잘 살피지 않으면 땅인지 바다인지 구분조차 어려웠다. 바다 위 나무가 움직이지 않도록 철사로 고정해 두기도 했지만 나무가 물 위에 떠올랐다 잠겼다 반복하면서 끊어지는 경우도 많아 벌어진 원목 틈 사이로 바다에 빠져 익사하는 일이 종종 벌어졌다.
나비 날개 만지고 눈 비비면 장님 된다니,
하지말라는 건 직접 해봐야 했죠.

"물에 둥둥 떠 있는 원목을 밟으면 돌아가는데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어요. 그걸 해보겠다고 그 멀리까지 찾아갔으니 말이죠. 돈이 없는 아이들에게는 바닷가에서 노는 게 최고였죠."

집 주변 기찻길도 좋은 놀이터였다. 철로에 귀를 대고 있다가 기차가 오는 소리가 나면 철로에 못을 올려놓는 놀이도 했다. 기차 바퀴가 밟고 지나가 납작해진 못은 자석으로 변했다.

"호기심이 무척 많은 아이였죠. 나비 날개를 만지고 눈을 비비면 장님이 된다는 얘기가 있잖습니까. 하지 말라는 건 직접 해봐야 했어요. 다행히 아무 일 없이 잘 컸죠."

창영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구 답동에 있는 송도중학교에 입학한 오원배는 당시 미술교사였던 서양화가 황추(1924~1994)에 눈에 띄며 미술부에 들어간다.

서양화가 황추는 전후 인천미술을 견인한 작가다.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난 황추는 해주 제2고등보통학교와 해주미술학교 등에서 공부했다. 한국전쟁을 계기로 인천에 정착해 1953년부터 송도중·송도고에서 미술 교사로 일하며 화가로서의 활동 영역을 넓혀간다. 무엇보다 서예를 제외하면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國展)에서 이렇다 할 성과가 없던 인천 화단에서 남다른 성과를 보였다. 당시 국전은 작가로서 실력을 인정받는 거의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황추는 1958년 제7회 국전에서 처음 입선하더니 이후 15차례 연속 입선하고, 1966~1967년에는 2년 연속 특선을 차지하는 등 이름값을 높였다. 인천 화단 특히 서양화 분야에서는 없던 일이었다고 한다.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24년간 교사로 일했다.

서양화가 황추 눈에 띄어 송도중 미술반 활동
"베레모에 파이프 물고 작업하시던 모습 생각"
차이나타운 찾아가 매일 수채화 그리기 과제
비 오는 날엔 중화루 1층에 다같이 모여 습작


오원배는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송도중·송도고에서 미술반으로 활동했다. 미술반 활동을 시작하고 경기도 미술실기대회에 참가했는데 특선을 차지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오원배는 그때 화가의 꿈을 갖게 됐다. 황추는 주로 학교에서 개인 작업을 했는데, 오원배는 "베레모에 파이프를 물고 작업하는 선생님의 모습이 멋있게 느껴졌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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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추 선생님과 송도중 미술반 앞줄 왼쪽이 1학년 오원배다./오원배 제공

송도중·송도고 미술반에서의 활동은 그가 작가로 성장하는 데 소중한 경험이 됐다. 미술반 학생들은 방과 후 학교에서 20여 분 거리에 있는 이국적 풍경의 청관(현 차이나타운) 일대 모습을 매일 1점씩 수채화로 그리는 것이 과제였다. 미술반 활동 내내 매일 다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차이나타운은 물론 인천항 구석구석을 살피는 것이 자연스레 일과가 됐다.

"당시 청관에는 중국인이 많이 살았고 화교 학교의 학생도 많았어요. 어쩌다 비를 만나게 되는 날이면 청관의 상징 같은 중화루 1층에 모여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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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중화루.

오원배는 중화루 건물 외벽의 색깔이 고색창연했다고 기억했다. 1970년대 초반 중화루 외벽에 붉은색 페인트가 덮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철거됐는데, 안타깝다고 했다. 중화루는 1883년 인천 개항장에서 영업을 시작한 한국 최초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이 문을 닫고 들어선 중식당이다. 1970년대 말 폐업하고 건물이 철거됐다.

미술반 시절 몸에 밴 습관 때문인지 오원배는 지금도 어디를 가든지 스케치를 하려 노력한다. 이때 경험을 소중하게 여겨 그는 동국대학교 교수로 제자를 가르치면서 모든 학생에게 매 학기 수백장의 스케치를 그려오라는 숙제를 내줬는데, 제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회자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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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관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오원배/오원배 제공

고등학교를 마친 오원배는 1년 재수 생활 끝에 1972년 동국대 미술학과에 입학한다. 오원배의 대학 시절인 1970년대는 명과 암이 뚜렷한 두 얼굴을 가진 모습이었다.

1970년대 통기타 등장한 대중문화 전성기
언로 막아버린 독재 시작… 명암의 두 얼굴
황석영 '객지' 읽으며 예술가의 역할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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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재학 시절 미술반 후배들과 함께한 여름 캠핑에서 스케치를 하고 있는 오원배. /오원배 제공

"1970년대 초는 비상시국이라는 미명하에 긴급조치가 발동되고 언로(言路)가 통제됐던 독재 시기였죠. 한편으로는 청바지와 통기타,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등장한 대중문화의 전성기이기도 하고요. 독재정권 치하의 두 얼굴이자 산업화 시대의 명암이라고 할까요. 저를 포함한 대학생들이 정체성에 큰 혼란을 겪었고, 현실 도피용 술자리는 늘 희망 없는 탄식과 함께였어요."

오원배는 황석영의 중편 '객지(客地)'나 이문구의 '장한몽( 長恨夢)' 등을 읽으며 예술가로서 그가 감내해야 할 사회적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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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배(왼쪽)의 군복무 시절/오원배 제공

오원배는 1977년 군대를 전역하고 1979년 대학을 졸업한 후 대학원에 진학한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반은 한국사회의 정치적 격변기였다. "프로파간다가 횡행하고 언로가 차단되었던 시기였다"고 오원배는 말했다.

자아성찰 위해 프랑스 파리 유학길 올라
외부인 포용하는 문화 덕에 성원 얻어
과 대표땐 루브르 박물관 벽화 그리기도
벽 한쪽 귀퉁이에 한글메시지 새겼던 추억


이 시기 오원배는 대학 초반 관심을 기울였던 민중의 삶, 애환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려는 조형적 시도를 한다. 세상이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은 어둡고 우울했다. 어딘가 부족함을 느꼈다. 미국문화원을 들락거려 화집을 빌려보며 세계 현대미술의 흐름을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사실주의 인상파 화풍이나 '미니멀리즘'이 대세인 우리나라 분위기는 자신과 맞지 않았다. 당시 서구 미술은 국내와 달리 다양한 '포스트모던' 형상 작업이 주도하고 있었다. 오원배는 "사회적 발언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다 하더라도 조형적으로, 미학적으로 완성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해 프랑스 파리로 떠나기로 했다.

그의 유학 시기는 "진지하게 자아를 성찰하고, 독자적 조형세계를 갖추려 온몸으로 부딪힌"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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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국립미술학교 교정의 오원배/오원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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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켈 지도교수에게서 드로잉에 대한 비평을 듣고 있는 오원배/오원배 제공

파리국립미술학교 실기실에 틀어박혀 작업만 했다. 마음에 들지 않아 종일 그린 그림을 지워버리고 재주 없음을 한탄하며 풀죽어 집에 돌아오고, 또 다음날이면 다시 실낱같은 기대감을 갖고 학교로 향하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시간의 연속이었다. 파리국립미술학교 재학생은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그는 시간이 생길 때마다 루브르 박물관이나 시립미술관, 퐁피두센터에 갔다. 또 학교 앞 화랑가에 전시된 다양한 작품을 접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자신의 작업 방향에 대해 끊임없이 다양한 형식의 실험을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자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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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국립미술학교 재학시절 학과 교우들과 함께 있는 오원배. /오원배 제공

이름 모를 아시아 변방의 학생이라는 이유로 학교에서 잠시 편견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찾으려는 오원배의 노력을 그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사람들은 문화적 자긍심이 강하죠. 그런 자신들의 문화를 배우러 온 외부인을 포용할 줄 아는 사람들이었어요. 당시 얀켈(Jacques Yankel·1920~2020) 지도교수가 그런 저를 성원해 줬고요. 운이 좋게 파리국립미술학교 1등상을 받았고 프랑스예술원 회화 3등상도 받았어요. 과 대표도 맡게 됐죠."

과 대표를 맡은 어느 날 그는 친구들을 이끌고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이오밍 페이가 설계한 루브르 박물관 유리 피라미드 공사 현장의 가림막에 벽화를 그리고 벽 한쪽 귀퉁이에 한글로 '야음을 틈타 불란서 졸개들을 데리고 와서 그리다'라는 메시지를 남겨 놓기도 했다. 그의 유학 생활은 아버님의 암 투병 소식을 듣고 1985년 귀국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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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원배의 파리 유학시절 오원배. 오른쪽이 얀켈 지도교수다./오원배 제공

귀국 이후 1986년 제1회 개인전을 시작으로 그는 자신만의 조형언어로 마음껏 작품을 선보이며 매번 전시 때마다 미술계의 주목을 받는다. 인간의 폭력성과 야수성을 상징한 반인반수 이미지, 인습이나 제도에 억압받는 인간을 표현한 어둠에 잠긴 구조물 사이의 투명인간,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청년들의 절망, 집단 동작을 취하고 있는 인체 등 디스토피아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존재를 탐구한다.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올해의 젊은 작가상'(1992), '제9회 이중섭 미술상'(1997) 등을 받는다. 오원배의 이중섭 미술상 최연소 수상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오원배는 최근 인천문화재단이 선정하는 '인천미술 올해의 작가'에 처음으로 선정되는 영예도 안았다. 미술계에서 영광스럽게 여길만한 큰 상을 이미 여러 차례 받은 그이지만 감회가 남다르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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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프롬인천 오원배

"언젠가 고향인 인천의 미술계에 어떤 형태로든 기여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기회가 주어져서 그 어느 수상보다도 의미가 남다른 것 같아요. 첫 번째 작가로 선정되어 관심과 주목이 뒤따르는 만큼 그에 걸맞은 작품 활동을 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지는 않습니다. 오는 12월에 개최될 전시는 앞으로의 '인천미술- 올해의 작가'의 성격을 가늠하는 전시인 만큼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이중섭 미술상 최연소 수상기록
"언젠가 고향인 인천 미술계 기여하고파"
끊임없는 변화 중요… 치열한 자기극복 다짐


오원배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작가의 덕목은 끊임없는 '변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형식의 차용이 아닌 치열한 자기극복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가 항상 호기심을 유지하며 늙지 않는 이유다.

작가 오원배에게 도시 인천은 어떤 의미이며 또 인천에 기대하는 것은 무엇인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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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프롬인천 오원배

"어린 시절 태어나서 자란 고향 인천은 저의 무궁한 상상의 원천이라고 생각합니다. 인천 특유의 비린내와 수묵화의 선을 닮은 갯벌의 긴 고랑은 작가 오원배에게 있어서 기억의 실마리입니다. 기억의 그 장소는 흔적도 찾을 수 없이 매립되어 높은 건물로 가득 들어찼지만 그사이 인천은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도시로 발전했습니다. 그러나 독자적 문화가 갖추어 있지 못하다는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서울과 가깝다는 지정학적 얘기를 합니다.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가 인천문화의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민관이 문화 인프라 투자에 적극적이어야 할 이유가 있다고 보는 대목입니다. 문화도시 인천을 상상합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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