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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수 세중해운그룹 대표.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세중해운그룹을 이끌고 있는 한명수 대표는 인천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나무껍질을 벗겨 땔감으로 써야 하는 환경에서 살았다. 빈곤한 유년시절을 지내면서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긍정적인 가치관을 갖게 됐고, 이는 대학을 거쳐 사회생활까지 이어졌다.

인천에서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 한명수 대표는 세계 7개국에 23개 지사를 갖고 전 세계를 무대로 해상, 항공, 육상 화물의 운송, 통합 유통 등 물류 전반을 다루는 국내 대표 물류기업을 이끌고 있다. 인천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 때 경험했던 인천과 지금은 크게 다르다고 했다. 국내 물류 거점일 뿐 아니라 빠르게 성장하는 동북아 중심 도시로 보고 있다. 그는 성장한 인천에서 진행할 사업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인천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서울을 거점으로 한 물류 기업을 이끌고 있는 이가 바로 한명수 대표다. 그는 "우리나라는 수출입이 비중이 큰 나라이지만, 물류 시스템은 상대적으로 부족한 점이 많다"며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세중그룹을 알 수 있는 글로벌 물류기업이 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그가 수십 여년 간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데에는 인천에서의 생활과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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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년시절 어머니는 인천역과 자유공원 등을 돌며 물건을 팔았고, 그런 어머니를 자주 따라다녔다. 그는 "그 영향인지 지금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두려움이 없고, 이러한 태도가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한명수 대표를 이해하는 데 '물류도시' 인천의 역사를 되짚어 볼 만하다. 인천항은 1883년 개항해 140여 년 동안 국내 대표 수출입 항만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2001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은 국제화물 물동량 기준으로 세계 2위를 자랑한다. 한국 수출입 항공화물 중 99%는 인천공항을 거친다. 물류기업 한진의 모태가 인천이라는 점은 우연이 아니다. CJ와 합병한 대한통운의 전신인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도 서울에서 설립됐지만 첫 지점을 인천항에 열었다. 대한통운 80년사는 '항만 사정이 가장 좋은 인천에서 최초의 지점인 인천지점을 설립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낯선 길 만나면 무작정 들어가 길 잃고
파출소 찾아가 짜장면 얻어먹은 기억
새로운 사람 만나는 일에 두려움 없어
물건 팔았던 어머니 따라 두루 다니기도

아임프롬인천 -한명수 대표
인천에서 태어난 세중해운그룹 한명수 대표는 세계 7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국내 대표적인 물류기업을 이끌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살았던 인천은 가난했고 부족한 도시였다"며 "지금의 인천은 많이 다르다. 서울의 그늘을 벗어나 독자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력하면 성장할 수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도시가 인천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한 대표 아버지의 고향은 충북 괴산이다. 한국전쟁 이후 1950년대 중반에 일자리를 찾아 인천에 정착했다. 한 대표 아버지는 중구에 있는 공장에서 일했고, 어머니는 행상을 다녔다. 한 대표가 태어난 곳은 인천 중구 북성동 2가다. 인천역과 송월동 동화마을 사이로, 현재는 다세대주택이 밀집해 있다. 유년시절 어머니는 인천역과 자유공원 등을 돌며 물건을 팔았고, 그런 어머니를 자주 따라다녔다. 그는 "그 영향인지 지금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두려움이 없고, 이러한 태도가 기업을 성장시키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한 대표 집은 북성동에서 숭의동 수도국산 인근으로, 또 주안동으로 여러 번 이사를 다녔다. 초등학생 한명수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새길을 보면 무작정 들어가 길을 잃었다. 그는 "어렸을 때 축구공을 가지고 많이 놀았다"며 "친구들이 멀리 차낸 공을 찾아 처음 가 보는 언덕 아랫길을 헤맸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길을 잃으면 물어물어 파출소를 찾아갔다. "파출소에서 짜장면을 먹은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중에야 어머니가 찾으러 오셨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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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항운노동자들은 4명이 한 조가 돼 '목도'방식으로 원목을 나르기도 했다. /인천항운노조 제공

겨울 나기 위해 원목 벗겨다 집에 날라
1970년대 연탄값 1장당 50원 안팎
매월 수천원 지출에 부담스러운 가격
바닷가 원목 껍질 벗겨 땔감으로 써

한 대표가 살았던 북성동에서 10분 정도 걸으면 바다가 나왔다. 그가 살던 집은 단층 주택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마을이었다. 주민들은 겨울을 나기 위해 바다에 떠 있는 원목의 껍질을 벗겨다 집으로 날랐다. 1970년대에는 정부가 연탄값을 고시해 가격을 관리할 정도로 연탄은 서민 가정의 필수품이었다. 1970년대 중반 인천의 연탄값은 1장당 50원 안팎이었다. 취사와 보일러(아궁이) 용으로 쓰자면 매월 수천원을 연탄값으로 지출해야 했다. 간부 공무원 월급이 5만원 안팎하던 시절이었으니 연탄을 구입하기에 가계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한 대표는 "원목이 바다에 떠 있었는데, 겨울철 땔감으로 쓰려고 바다에서 껍질을 벗겨 와 집에서 말려 사용했다"며 "나무껍질을 벗겨오면 어머니가 과자를 사주셨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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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인천항 아바작업장.

한 대표가 살았던 북성동 인근 인천항은 당시 대표적인 목재 수입 부두였다. 2008년 인천항 북항 목재부두가 개장하기 전까지는 원목 수입 부두였다. 선박에 실려 온 원목은 육지와 가까운 바닷가에 떠나가지 못하도록 경계선을 설치해 보관했다. 인천항운노조는 이를 '아바작업'으로 불렀다.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노동자 4명이 원목 하나를 어깨에 메고 옮겼다. 바닷가 인근 주민은 썰물에 갯벌에 얹혀 있는 원목 껍질을 벗겨 땔감으로 썼다.

당시 인천항은 대표적 목재 수입 부두
바닷가 경계선 지어 보관 '아바작업'
1960~1970년대 사람이 직접 옮겨
가공목 들여오며 이제는 사라진 풍경

인천은 여전히 전국에서 목재를 가장 많이 수입하는 항만이다. 전국 목재 수입량의 70%를 인천항 북항에서 처리한다. 이 지역 일대에 목재 관련 기업이 밀집해 있다. 1960~1970년대엔 원목이 주를 이뤘다면 현재는 원목을 가공한 형태로 많이 들어온다. 동남아 등지에서 원목을 가공해 들여오는 것이 더욱 저렴하기 때문이다. 바다에 원목을 가둬두는 아바작업은 사라진 풍경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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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건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한명수 대표(사진 오른쪽). 한 대표는 고등학교 때 봉사활동을 하면서 겪은 경험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했다. /한명수 제공

그가 대건고 재학 시절 문학산 인근에서 한 봉사활동 경험은 현재까지도 머릿속에 각인돼 있다. 문학동에서 교회를 개척한 친척의 요청으로 나선 선교활동이었다. 문학산 기슭에 판자촌이 형성돼 있었다. 한 대표는 "추운 겨울 저보다 어린 아이들이 문학산에서 먹을 물을 길어오곤 했는데, 같이 물을 나르기도 하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 노력했다"고 했다. 그는 "저도 가난했지만, 저보다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에 충격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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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학교 재학 때 한명수 대표(사진 윗줄에서 두번째). 한 대표는 대학 때 총학생회장을 맡았고, 이로 인해 정부의 민간인 사찰 대상에 포함되기도 했다. 이는 취업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됐다. /한명수 제공

그는 1986년에 세종대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이듬해인 1987년에는 6월 항쟁과 7월 노동자대투쟁이 있었다. 그는 "대학에 가니 이전에 제가 알던 사회와 현실은 다르다는 것을 많이 느꼈고, 부조리가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됐다"며 "내 활동이 사회에,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고 했다. 그는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총학생회장을 맡았다. 그는 총학생회를 이끌며 학원 자주화 운동에 나섰다. 정부의 민간인 사찰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에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이 보안사의 사찰 대상 민간인 목록을 폭로했는데 거기에 한명수 대표의 이름도 올라와 있다. 한 대표의 학생 운동 이력은 취업에 걸림돌이 됐다. 한 대표는 "학점이 좋은 편이었고, 학과도 취업하기에 나쁘지 않은 경제학과였지만 대부분 (신원조회를 진행한 뒤)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고 했다. 결국 그는 외국계 기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봉사활동·학생 운동 경험한 청년시절
"내 활동이 사회에 도움되길 바랐다"

그는 1992년 한 외국계 무역회사의 한국지사에 입사했고, 그해 한중수교가 이뤄졌다. 물류·무역 분야의 경험을 쌓았는데, 그 기업이 중국 기업에 매각됐다. 그는 중국계 해운·물류기업으로 이직했다. 한 대표는 "바다와 연관된 일을 하게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외부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이는 분명히 일을 할 때 장점이 됐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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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바닷가에서 나무껍질을 벗기면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며 "모르는 길이라도 주저 않고 동네를 누비고 다녔던 것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장소가 외국이어도, 대상이 외국인이어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그는 10년 가까운 경험을 토대로 설립된 지 3년 된, 직원 4명이던 작은 기업인 세중해운을 인수했다. 첫 직장 입사 후 딱 10년이 되는 2002년이었다. 이후 세중해운은 빠르게 성장했고 직원은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가 세중해운을 맡은 지 20년이 지났다. 이 중 14년은 외국에서 생활했다. 특히 중국, 홍콩 등 해외지사가 설립된 지역에서 관련 업무를 총괄했다. 중국뿐 아니라 베트남, 홍콩, 태국, 브라질 등 전 세계를 누볐다. 글로벌 물류 기업의 선진 시스템을 몸소 경험하고, 미국 워싱턴 세인트루이스 대학교(Washington Univ. In ST.Louis)에서 경영학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실무와 이론을 겸비하면서 기업인으로 성장 가능성을 본 동기 부여의 시기였다. 그는 "각 나라마다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경험하기 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그 폭은 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직장10년차 규모 작았던 세중해운 인수
대표 20년 중에 14년은 여러 나라 경험
"각 나라 차이는 있지만 폭 크지 않아"

장기간 외국 생활이 크게 어렵지 않았던 데에는 어릴 적 인천에서의 삶이 영향을 미쳤다. 그는 "새로운 환경을 접하면 생길 수 있는 두려움을 없애준, 저에게 담금질 역할을 한 것이 '인천'이었다"고 했다. 그는 "자주 바닷가에서 나무껍질을 벗기면서 바다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다"며 "모르는 길이라도 주저 않고 동네를 누비고 다녔던 것처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장소가 외국이어도, 대상이 외국인이어도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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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중해운은 본사가 서울이다. 인천, 부산, 오송 등에 지사를 두고 있다. 사업 영역은 해운부터 항공 등 물류 전체를 망라한다. 이 때문에 인천을 거점으로 하는 활동이 활발하다. 인천은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이 운영되고 있다. 인천항은 국내 2위 컨테이너 항만이면서 지리적으로 대 중국 교역에 유리하다. 인천공항은 국내 수출입 항공화물의 대부분을 처리한다. 인천공항을 빼놓고 항공 물류 사업을 진행할 수 없다.

"인천, 중국과 가깝고 수도권 위치 강점
중국 전자상거래 발맞춰 거점 역할 자신"


한 대표는 인천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인천항만공사가 송도국제도시에 조성하고 있는 아암물류2단지 전자상거래 특화구역에 들어설 스마트 공동물류센터 사업이다. 세중해운이 주간사로 인천 하역기업 등과 컨소시엄을 이뤘다. 그는 "인천은 중국과 가까이 있고 수도권에 위치해 있다는 점에서 인천만이 가지는 강점이 있다"며 "특히 중국 전자상거래 규모는 앞으로 더욱 커질 가능성이 큰데 현재 추진하는 공동물류센터는 인천항이 전자상거래 거점으로서 위상을 강화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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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수 대표가 이끄는 세중해운(주)는 지난해 물류의날 기념식에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한명수 대표가 행사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세중해운 제공

그는 새로 설립되는 운영법인의 대표이사로 역할을 하며 인천 프로젝트에 집중하려고 한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인천을 40여 년 만에 다시 찾게 되는 셈이다. 한 대표는 "전 세계에서 보면 인천항은 주요 항만이 되기 힘든 지리적 단점이 있지만, 중국과 가깝다는 점은 또 큰 장점"이라며 "무엇보다 단점을 극복하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도시라고 생각된다"고 했다.

한 대표는 유년 시절의 인천과 현재의 인천이 많이 다르다고 했다. 특히 그 위상이 높아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그는 "어렸을 때 환경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험하고 거칠었다. 또 서울의 위성도시 느낌이 강했던 것 같다"며 "지금은 전혀 다르다. 서울과 가까이 있지만 독립된 도시로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목표 중 하나는 '나누는 삶'
뒤지지 않는 물류 환경 만들고파
시스템 만들어 다음세대 도움 될 것

이러한 인천의 모습이 그에게는 '긍정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왔다. 그는 "어렸을 때에는 서울에 사는 것이 부럽기도 했다. 티비를 보면 항상 서울 사람들의 잘사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우리는 항상 그렇지 못한 삶을 살았다"며 "지금은 그렇지 않다. 특히 '열심히 하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도시가 인천이었고,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 모습이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글로벌화'를 목표로 했다. 또 하나의 목표는 '나누는 삶'이다. 고교 시절 문학산 봉사활동에서 생긴 마음가짐이다. 이 두 가지 가치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한 대표는 "앞으로 5년에서 길게는 10년 정도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동안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물류 환경을 만들고 싶다"며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해 정착시켜 놓으면 다음 세대들이 이를 토대로 우리나라의 물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어 "우리 회사 직원은 누구나 원할 때까지는 일할 수 있다"며 "업무와 처우 등은 조금 바뀔 수 있지만 누군가의 가족인 직원들이 타의로 회사를 떠나는 일은 최소화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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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중해운의 바이오물류 브랜드 'CXL BIO'는 지난 5월 충북 오송에 국내 최초로 바이오 물류를 연구하고 취급하는 GSC(Global Supply Chain)센터를 오픈했다. 오픈 행사에서 한명수 대표가 발언하고 있다. /세중해운 제공

한 대표의 삶 전체로 봤을 때 인천에서 산 기간은 3분의1 남짓이지만 인천에서의 유년기는 그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저의 가장 큰 장점은 진취적이고, 새것에 두려움이 없다는 점입니다. 돌이켜 보면 이를 만들어준 곳이 인천이었습니다. 제가 더 단단해지도록 담금질 역할을 한 곳이 인천입니다."

/정운기자 jw33@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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