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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인사진 - 동인천에서 나고 자란 인천 출신 애니메이터 김윤경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메이션스쿨 교수. /김용국 기자 yong@kyeongin.com

"인천의 풍경은 창작자에겐 상당한 자극이 됩니다."

김윤경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메이션스쿨 교수가 자신이 나고 자란 동인천역 주변을 떠올리며 한 말이다. 높은 빌딩보단 작은 집들이 오목조목하게 놓여있던 따뜻한 곳, 좀처럼 변하지 않아 언제든 찾아도 어릴 적 기억을 간직한 곳. 인천 출신 '애니메이터' 김윤경이 품은 상상력의 원천이다.

김윤경 교수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그의 아버지 김진성(87) 씨를 만나지 않을 수 없다. 김진성 씨는 황해도 옹진군 출신 실향민 1세대이자 1960~70년대 동인천 양복점 거리 전성기의 산증인이다. 김윤경 교수는 "아버지의 손재주와 미술적 감각을 물려받았다"고 늘 강조한다.

1969년 동인천에 '도성라사' 연 아버지
직원 20명 데리고 끊임없이 주문 받아

당시 살던 인현동 집에서 내려다보면
시계탑 선 광장 저녁마다 애국가 퍼져
사람들 멈춰서서 가슴에 손얹던 풍경

김진성 씨는 한국전쟁 때 '동키부대'라 불린 켈로(KLO·Korea Liaison Office) 부대 11연대 소속으로 황해도 옹진군 어화도에서 복무했다. 켈로 부대는 미군이 이북 출신 한국인들로 꾸린 비정규군이었다. 주로 38선 인근 서해 섬과 해안 지역 첩보작전에 투입됐다. 김진성 씨가 복무한 어화도는 위도상 백령도(현 인천시 옹진군)보다 더 남쪽에 있는데, 한국전쟁 전까진 남한이었다. 1951년 1·4후퇴로 전남 나주까지 남하해 이북에 있는 가족들과 생이별했다. 그의 나이 15세 때다. 김진성 씨는 나주의 한 과수원에서 먹고 자며 일하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 사람들이 많다는 인천을 무작정 찾았다. 먼 친척 소개로 동인천 중앙시장에서 컸던 유창양복점에 취직해 어깨너머로 양복 재단을 배웠다. 혈혈단신에 주경야독으로 죽도록 고생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나와 1962년 정치대학(건국대학교 전신) 행정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김진성 씨는 인천 동구 만석동 한국기계공업(현 HD현대인프라코어)에서 일하며 가정을 꾸렸다. 양복 만드는 꿈을 이루고자 1969년 중구 용동 동인천 길병원 자리에 양복점 '도성라사'(현 도성양복점)를 열었다. 1972년 전국 신사복 경진대회에서 허리선을 강조한 당시 최신 유행 '콘티넨탈(Continental) 스타일' 양복으로 대상을 받았고, 입소문을 타면서 가게도 번창했다. 애관극장에서 패션쇼도 열었다고 한다. 지난 19일 인천 남동구 자택에서 만난 김진성 씨는 "1970년대는 도성라사 직원이 20명에 달할 정도로 끊임없이 주문이 밀려오던 시절"이라며 "당시 동인천은 양복점만 수십 곳이 있는 유행 1번지였는데 신라, 서울, 자유와 함께 도성라사가 큰 양복점에 속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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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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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도시역사관이 2017년 촬영한 도성라사(현 도성양복점) 작업실 모습. /인천도시역사관 제공

김진성 씨는 지난해 제자에게 도성양복점을 물려주고 은퇴했다. 지금도 단골에게 양복 맞춤 주문이 들어온다고 한다. 기성복 시대가 다시 돌아오면서 인천 중구 경동 싸리재 일대 양복점들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도성양복점을 비롯한 네댓 곳만 남아 명맥을 잇고 있다. 김진성 씨는 "넷째 딸(김윤경 교수)은 어려서부터 만화를 무척 잘 그렸다"며 "양복점이 호시절을 만나 1남4녀 자식들을 번듯하게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시 김윤경 교수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의 어린 시절 풍경 또한 동인천역 일대와 아버지의 가게가 대부분을 차지했다. 김 교수 가족은 동인천역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인현동의 건물 5층에 살았다. 그때 동인천역 광장은 지금처럼 15년 가까이 흉물로 방치된 거대한 민자역사 건물이 꽉 막고 있지 않았다. 큰 시계탑이 선 광장에는 매일 저녁 무렵 애국가가 울려 퍼지며 국기 하강식을 했다고 한다. 김 교수는 "북적이던 광장에서 사람들이 한순간 멈춰 가슴에 손을 올리고 태극기를 바라봤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며 "겨울을 앞두곤 양복점 직원들이 다 같이 김장김치를 200포기씩 담그고 나누며 가족처럼 지냈다"고 회상했다.

유동현 전 인천시립박물관장이 쓴 '동인천 잊다 있다'(2015·인천시)는 1960~70년대 동인천역 광장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 '역전 광장답게 커다란 시계탑이 우뚝 서 있었다. 기차를 타고 함께 어딜 가든 아니면 기차를 타고 와서 만나든 동인천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약속 포인트로는 그만이었다. (중략) 광장은 약장수들의 마케팅 장소로도 그만이었다. 뜨내기 사람들이 많이 모이기 때문에 허접한 물건을 팔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시선을 끌기 위해 차력 쑈나 마술 그리고 약식 서커스를 하곤 했다.'

김윤경 교수는 동구 송림동으로 이사해 집 근처 인천축현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림 그리기에 재능이 있다고 스스로 깨달은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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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 청강문화산업대 애니메이션스쿨 교수의 아버지 김진성 씨. 동인천에서 50년 넘게 양복점 '도성라사'(현 도성양복점)를 운영했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아버지가 재단할 때 쓰고 남은 갱지에 그림을 그리길 좋아했어요. 신문지의 빈 공간이나 하얀 달력 뒷장도 매일 낙서와 스케치로 채웠습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친구들이 줄을 서서 미키마우스나 도날드덕을 그려달라고 부탁해 쉬는 시간이 없을 정도였죠. 당시 TV(동양방송)에서 일요일 아침마다 '디즈니 만화동산'이란 만화영화 프로그램을 방영에서 디즈니 캐릭터들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남자아이들을 로봇을, 여자아이들은 예쁜 여자를 그려달라기도 했고요."

아버지 재단하고 남은 갱지에 그림
중학생 소묘 솜씨에 선배들 놀라기도
제물포역 앞 학원가 핵심상권 활기

김 교수는 가좌여자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를 졸라 화실에 다녔다. 그림을 전혀 배우지 않았던 중학생 후배의 석고 데셍(소묘) 솜씨에 고등학생 선배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신명여자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입시를 위한 미술학원에 등록했다. 제물포역 앞에 있던 '전위미술학원'인데, 김 교수가 다닌 1980년대 인천에서 다섯 손가락으로 꼽히는 규모였다. 김 교수는 전위미술학원 홍대반(홍익대 미술대학 입시 준비반)에서 실력을 다졌다. 인천에서 활동하는 화가·문화기획자 오진동 씨는 대학생 때 전위미술학원 강사로 있으면서 김윤경 교수를 만났다. 오진동 씨는 "(김 교수는) 예의 바르고 다재다능하면서도 노력파였다"며 "만화적 표현이 좋은 학생이었다"고 떠올렸다.

이때 제물포역 앞은 미술학원뿐 아니라 각종 입시학원, 예체능학원이 몰린 학원가이자 제물포지하도상가를 중심으로 핵심 상권이었다. 인근엔 옛 선인재단 산하 중·고등학교 10곳, 인천대학교와 인천전문대학이 있어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로 활기가 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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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가족과 인천 중구 자유공원에 나들이간 김윤경 청강문화산업대 교수. 아버지 김진성 씨가 촬영했다. /김윤경 교수 제공

"미술학원에 같이 다닌 고등학생 언니 오빠들이랑 제물포역 앞 경양식집을 가거나 신포동, 인현동 쪽으로 놀러 간 기억이 많이 나요. 1980년대 중후반 신포동, 인현동은 왁자지껄했어요. 카페, 떡볶이집, 닭강정집, 고등학생들이 많이 찾는 '바덴바덴' 같은 나이트클럽도 있었어요. 저는 가보진 않았지만, 소위 말하는 날라리 언니 오빠들이 나이트클럽을 갔죠. 날라리라고 해서 지금 일진처럼 막 친구를 괴롭히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놀기 좋아하는 의리있는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바덴바덴'·카페·떡볶이집 즐겨찾던 청춘
1999년 인현동 호프집 화재 57명 숨져
"맥주 마셨다는 이유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김금희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 남은 대목


1980년대 신포동에서 동인천 일대는 젊음이 가득 찼다. 10~20대 시절을 인천에서 보낸 사람들은 '쌍쌍' '바덴바덴' 같은 나이트클럽의 추억을 가졌다. 학생들의 동인천 전성시대는 1990년대까지 이어지다 1999년 10월30일 57명(청소년 56명, 성인 1명)의 생명을 앗아간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를 기점으로 급속히 쇠락했다. 이들 지역엔 옛 분위기를 풍기는 몇몇 경양식집이 남아있다. 소설가 김금희 장편소설 '경애의 마음'(2018·창비)은 이 사건을 겪은 경애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다음은 '경애의 마음' 한 대목이다.

'경애는 비행, 불량, 노는 애들이라는 말들을 곱씹어보다가 맥주를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죽은 56명의 아이들이 왜 추모의 대상에서 제외되어야 하는가 생각했다. 그런 이유가 어떤 존재의 죽음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대단한가. 그런 이유가 어떻게 죽음을 덮고 그것이 지니는 슬픔을 하찮게 만들 수 있는가.'

김윤경 교수는 '89학번'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섬유미술과에 진학했다. 홍대 미대 섬유미술과 입학생 26명 대다수가 서울사람이었고 지방 출신은 별로 없었다고 한다. 섬유미술은 직물, 종이 등을 재료로 하는 분야로 패션 쪽과도 연계돼 있다. 대학 신입생 김윤경은 친구들과 우연히 찾은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제에서 표현된 다양한 기법들을 보고 충격받았다. "내가 갈 길이 이거구나"라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고 한다.

홍익대 섬유미술과 89학번 진학
단편 애니메이션 영화제서 받은 충격
밴드 아하 뮤직비디오에 실험적 기법
"동아리 만들어 샛길로 빠지기 시작"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 히트했던 노르웨이 밴드 아하(A-ha)의 'Take On Me' 뮤직비디오가 로토스코핑(Rotoscoping·실사 이미지 필름에 그림을 그려 합성하는 기법)으로 제작됐는데, 그때부터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이 있었어요. MTV(미국 뮤직비디오 전문 방송) 시대가 도래하기도 했고요. 대학 1학년 때 영화제에서 본 단편 애니메이션들은 스톱 모션(Stop motion·정지된 물체의 위치를 움직여 촬영하는 기법) 같은 굉장히 실험적인 기법을 썼는데, 솔직히 전공보다도 더 흥미로웠습니다. 곧장 학교에서 애니메이션 창작 동아리를 만들어 샛길로 빠지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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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이집트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Ismailia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최고상인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김윤경 교수 연출의 단편 애니메이션 '벌레아이'. /김윤경 교수 제공

인터넷 검색도 없던 시절, 김 교수는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우선 서울 충무로에서 8㎜ 카메라를 빌렸다. 애니메이션의 원리대로 도화지에 배경을 그리고, 투명한 셀룰로이드지(셀지) 위에 그리고 색칠한 캐릭터를 오려 붙이고 한 장 한 장 촬영했다. 김 교수가 대학 시절 매진한 또 다른 활동 '홍익방송국'에 있던 지금은 쓰이지 않는 '베타 테이프 편집기'로 촬영한 애니메이션 필름을 편집했다. 그렇게 정지한 그림을 처음으로 움직이게 했다.

1994년 대학 졸업 후 애니메이션 작가로 나서고자 줄거리, 캐릭터, 연출에 대해 고민하다가 이듬해 현장에서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애니메이션 회사에 들어갔다. 당시 애니메이터 대다수가 프리랜서였다. 1990년대 한국 애니메이션 분야는 자체 제작이 많지 않았다. 미국, 프랑스, 일본 등 해외 애니메이션 하청(OEM·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을 맡는 국내 회사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스파이더맨, 슈퍼맨 등 미국의 상업용 '슈퍼 히어로' 애니메이션 작업에 주로 참여했다. 애니메이션 제작 방식이 직접 그리는 아날로그에서 컴퓨터를 이용하는 디지털로 점차 전환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베타테이프 편집기로 애니메이션 편집
정지한 그림 처음으로 움직이게 한 경험
해외 애니메이션 하청 맡은 국내회사
슈퍼히어로 애니메이션 작업에 참여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까지 국내에서 기획한 작품은 거의 없었습니다. 국내에선 해외 제작물 하청 시장이 상당히 컸는데, 제작 단가가 높아 돈을 꽤 번 회사도 있었어요. 해외에서 휴가를 많이 떠나는 여름철은 국내 애니메이션 업계가 성수기지만, 겨울철은 쫄쫄 굶어야 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에서 하청 전문 회사는 많이 줄었고, 그 시장이 중국과 인도로 넘어갔습니다. 대신 웹툰 등을 기반으로 콘텐츠 시장이 확장하면서 애니메이션 산업도 커졌습니다."

애니메이션 산업이 점점 성장하면서 대학에서도 관련 학과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김윤경 교수는 1999년부터 여러 대학에서 강사로도 활동했다. 2004년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메이션스쿨 교수 모집 공고가 눈에 들었다. 상업 애니메이션이 아닌 작품을 만들고 싶었고, 프리랜서가 아닌 안정적 바탕에서 그 꿈을 이루고 싶어 교수직에 도전해 합격했다.

스타워즈 등 걸출한 제자 다수 배출
제자들과 협업해 EBS 교육용 프로 제작
유튜브 채널 구독자 145만명 성과도


교수 생활을 하면서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스타워즈 애니메이션 시리즈 감독, 카카오 애니메이션 시리즈 감독 등이 김윤경 교수의 손을 거친 애니메이터들이다. 제자들과 협업해 EBS 미술교육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김 교수 주도로 개설한 청강대 애니메이션스쿨 유튜브 채널은 총 구독자가 145만명에 달한다. 그는 청강대 출신이 없는 애니메이션 회사가 없을 정도로 제자들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며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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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경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메이션스쿨 교수가 어린 시절 동인천역 풍경을 회상하며 이야기하고 있다. /김용국 기자 yong@kyeongin.com

무엇보다도 김 교수가 작가로서 작품을 낼 여건이 생겼다. 김윤경 교수가 2015년 연출한 단편 '벌레아이'는 이듬해 '이집트 국제 애니메이션 영화제'(Ismailia International Film Festival)에서 최고상인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벌레아이'는 친모로부터 버려진 아이가 입양된 후에도 또 버려질 것이란 두려움에 침잠하다 그 감정이 폭주해 벌레로 변해 엄마를 먹는다는 환상에 휩싸인 다소 어두운 상상력을 담은 애니메이션이다. '벌레아이'는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는 성과가 있었다. 김 교수는 또 다른 작품을 구상 중이다.

"너를 탐색하고 뚝심을 가지라는 말,
맞든 틀리든 흔들리지 않고 가는 것
마음의 근육 단단히 해 내 것 찾겠다"
동인천 풍경 닮은 김윤경 교수의 말

"이집트 국제 영화제 시상식에 참가하려 했는데, 그해 이집트에서 항공기 추락 사고가 나는 바람에 주변에서 말려서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주한 이집트대사관을 통해 파라오를 본뜬 무거운 상패를 받았습니다. 저는 너무 실험적이거나 추상화 된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면서도 눈과 귀를 간지럽히는 대중적인 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것을 제시하는 방향을 추구합니다. 애니메이션은 상상하는 모든 걸 다 표현할 수 있는 아주 멋진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김윤경 교수가 늘 제자들에게 하는 말이 그를 여러 차례 만나며 새겨진 인상을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김 교수는 "너를 찾아라. 너를 탐색하고 뚝심을 가져라"는 말을 항상 제자들에게 전한다. 김 교수는 "뚝심은 내가 택한 길이 맞든, 틀리든,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흔들리지 않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내 마음의 근육을 더 단단히 해서 뚝심으로 내 것을 찾는 삶을 그려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나고 자란 곳, 옛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의연한 동인천 풍경이 떠올랐다. 

/박경호기자 pkhh@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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