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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꼭 고향 덕을 봐야 하나요. 주는 게 없어도 언제나 소중한 고향 아니겠습니까."

사라질 풍경 담아내기 좋아해
공설운동장·극장·시장에 포커스
선인고 독수리 사진반서 실력 두각


나명석 자담치킨 회장은 평소 고향 '인천' 이야기를 자주 하느냐는 질문에 "솔직하게 답하고 싶다"면서 "인천을 말하지도 않지만 피하지도 않는다. 고향 인천 덕을 본 것도 없지만, 손해를 본 것도 없다. 고향에 때문에 손해를 본 것이 없다는 것이 어쩌면 중요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나라에는 고향 때문에 손해를 보는 이도 많다. 주는 게 없어도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소중한 고향이 인천"이라고 덧붙였다. 나명석 회장은 그러면서도 "학창시절 인천 곳곳의 풍경과 사람을 필름에 담아내곤 했는데, 일찍 세상을 깨우쳐 준 도시가 인천"이라고 강조했다.

유명 프랜차이즈 치킨 브랜드를 이끄는 경영인이 갑자기 '사진'을 이야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 회장은 경영인이 되기 전 사진기자로 10년간 활동한 이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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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나명석 회장은 1965년 인천 숭의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의상실을 하는 어머니와 제조업 공장에서 일하는 아버지 사이에서 4남 1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그가 기억하는 어릴 적 인천 풍경을 들으면 자연스레 미소가 떠올려진다.

"어릴 때 숭의동 하면 지금은 사라진 공설운동장이 먼저 떠오르네요. 공설운동장 앞에는 도원극장이 있었고 그 앞에 숭의시장, 전도관 등이 있었어요. 가슴에 좌판을 걸고 '요깡'을 파는 이들도 있었고요. 데이트하는 어른들 손을 붙잡고 아는 척하며 공짜 영화 관람을 하기도 했고요."

나 회장의 기억 속 풍경 가운데 공교롭게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공설운동장, 극장, 시장, 전도관도 모두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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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설운동장.

나 회장은 사진을 좋아했다. 사라질 것 같은 것들을 필름에 담아내는 일이 특히 좋았다고 한다. 나 회장이 사진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인 1979년이다. 외삼촌이 선물로 '야시카35'라는 일제 카메라를 선물로 줬다. 1970년대 한국에는 '중동 붐'이 일었다. 당시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바레인 등 중동 국가들은 건설 프로젝트를 발주했고 한국 기업에는 큰 기회였다. 건설사들이 중동에 진출해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필름을 끼우고 사진을 찍고 현상하고 인화하면 사진으로 나오고, 그렇게 신기하고 재미있는 것이 없었어요. 카메라를 거의 매일 붙들고 살았죠."

사진 취미는 고등학교로 이어졌다. '뺑뺑이'로 입학한 선인고에 독수리 사진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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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이 동아리는 나하고 딱 맞는구나'. 1초도 고민하지 않고 사진반에 들어갔어요. 24시간 카메라를 몸에서 떼어 놓지 못했어요. 책은 안 가지고 다녀도 카메라는 꼭 가방에 넣어 다녔으니까요. 그때는 정말 열심히 했어요."

독수리 사진반은 유명하다. 최광호, 정주하 등 유명 사진작가들이 바로 이 독수리 사진반 출신이며 언론사 사진기자들도 배출했다. 최광호 작가가 처음으로 동아리를 만든 1기 선배였는데 후배들은 최광호 작가의 작업실을 동아리방처럼 들락거렸다고 한다.

독수리 사진반 시절 나명석 회장은 각종 사진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상도 참 많이 받았다고 했다. 중앙일보 사진콘테스트나 서울예전 대회, 인천시 시민의 날 사진대회 등 상을 휩쓸었다.
빠르게 변하던 시절… 담아내고 싶었죠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던 시절이었어요. 당시는 사라지는 것이 너무 많았죠. 사라질 것 같은 모습을 많이 찍었습니다."

당시 국내 사진교육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주말이면 형들과 함께 서울에 올라가 전문 서적을 감상했다.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에 많이 끌렸다. 졸업하고도 학교를 찾아오는 독수리 사진반 선배들과 함께 미국문화원, 독일문화원을 가서 '원서'를 보고 전문 서점을 찾아가 작품집을 구경했다. 당시 인천에는 사진 전문 서적을 갖고 있는 곳도 파는 곳도 없었다고 기억했다.

다큐멘터리 사진 쫓던 고3 시절
사진과 진학했지만 기대 같지 않아
조선일보 기자 출신 강운구 교수 제안에
시사저널 창간멤버로 일 시작


나 회장은 다큐멘터리 장르 사진을 좋아했다. 특히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진가들이 활동한 '매그넘 포토스' 그룹 작가들의 사진에 크게 매력을 느꼈다. 20세기 사진사(史)에 이름을 남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1908~2004), 로버트 카파(1913~1954), 데이비드 시무어(1911~1956), 조지 로저(1908~1995) 등이 설립한 단체다.

사진을 좋아하니 대학도 중앙대 사진과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대학 진학은 누구보다 수월했다. 여느 평범한 학생들처럼 고3을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공부는 썩 잘했고요. 사진과는 실기 비중이 높았는데 사진반 활동하는 1·2학년 동안 상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어요. 정규 수업만 마치고 나면 동아리 방에서 지냈어요. 면접 때 수상작 위주로 구성한 포트폴리오를 들고 갔는데, 중앙대 교수 한 분이 사진을 보며 심사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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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사진과에 진학했지만 대학 생활이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 사진 지식과 실력만큼은 앞서 있다고 자부한 그에게 동아리 수준의 대학 수업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학보사 사진기자로 잠깐 활동하며 학교에 정을 붙일 수 있었는데 1년만 다니고 입대했다. 제대 후 휴학 연장을 고민했는데, 형들의 만류로 복학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광고사진 전문가 김영수 교수, 조선일보·동아일보 사진기자 출신 강운구 교수 등의 수업이 만족스러웠다. 대학 시절은 강운구 교수의 조수처럼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 강운구 교수가 "한국에도 미국의 타임, 뉴스위크 같은 시사주간지가 생기는데 사진기자를 해 볼 생각이 없느냐"고 물어왔다. 나 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찾아가 면접에 임했다. 사진기자 채용 면접이 2주 전에 끝난 상태였지만 결국 합격해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일을 시작했다. 시사저널은 그에게 첫 직장이자 마지막 직장이 된다.

주간지 사진은 슬라이드 필름 써야
노출 다루는 고도의 기술 요하는 작업
출장 중에 1995년 대구지하철 폭발
전국 모든 일간지·방송에 사진 제공

흑백 사진을 쓰는 신문사와 달리 고급 시사주간지에 쓸 사진을 만드는 일은 부담이 컸다. 신문 사진은 흑백이어서 기술적으로 모자라도 순발력만 있으면 좋은 사진을 만들 수 있었는데, 주간지 사진은 컬러에 '슬라이드' 필름을 사용해야 했다. 일반 네거티브 필름과 달리 슬라이드 필름은 노출이 조금만 과하거나 부족해도 사진이 다 날아가 버리기 때문에 기술력과 순발력을 모두 갖춰야 하는 일이었다. 그는 "운이 좋게도 특종을 참 많이 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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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명석 자담치킨 회장이 시사저널 사진 기자로 활동할 당시 남긴 표지사진/나명석 회장 제공

대표적 특종이 1995년 대구지하철 공사현장 폭발 사고였다. 사망자 100여 명, 부상자 200여 명에 이르는 초대형 참사였다. 도시가스가 누출되며 지하철 공사현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복공판과 공사 자재들, 그리고 그 위에 있던 시민들과 자동차가 건물 3~4층 높이만큼 튀어 오른 후 한꺼번에 떨어진 비극적 사고였다.

"대구 출장 중이었어요.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고 있는데, '2명 사망'이라는 자막이 TV에 뜨는 겁니다. 동행한 운전기사 형님이 폭발소리를 들었다는 겁니다.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했죠."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끔찍한 현장이었다. 사망자 시신이 공사 자재와 뒤엉켜 있었고 신음하는 이도 많았다. 자상, 관통상 등 처참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 주간지여서 당장 지면에 쓸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편집국장이 다른 언론사에 사진을 제공하기로 결정하면서 전국 모든 일간지와 방송이 모두 나명석 기자의 바이라인과 함께 사진을 썼다.

사이비 종교 현장 잠입해 필름 포착
전국민 공분 '전두환 부부 호화 휴가'
호텔 직원들이 동선 알려준 에피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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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명석 자담치킨 회장이 시사저널 사진 기자로 활동할 당시 남긴 표지사진/나명석 회장 제공

"1992년 10월28일 휴거가 일어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사회적으로 혼란을 일으킨 사이비 종교 다미선교회에 신도로 1주일 넘게 잠입해 생생한 현장을 필름에 포착했다. 설악산 백담사에서 내려와 제주도에서 '호화 휴가'를 즐기는 전두환 전 대통령 부부의 환한 얼굴과 웃는 모습을 포착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킨 사진도 그가 기억하는 자신의 특종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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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명석 자담치킨 회장이 시사저널 사진 기자로 활동할 당시 남긴 표지사진/나명석 회장 제공

"그때도 때마침 제주도에 있었네요. 국장이 올라오지 말고 있으라고 하는 겁니다. 돈이 없으니 신라호텔에 숙박은 못 하고 며칠을 주변을 어슬렁거렸어요. 나중에는 호텔 직원들이 전두환 부부의 동선을 알려주더라고요. 다양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표지에 쓸 사진이 마땅치 않더라고요. 또 청와대 경호를 받으니 사진기자의 접근도 힘들었고요. 호텔을 빠져나와 버스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각하' 하고 외쳤죠. 그렇게 만든 사진입니다. 참 재미있게 했네요."

IMF 위기로 9년여 기자생활 마무리
경험·인맥 살려 삼겹살·돈가스 창업
영역 넓혀봤지만 신통치 않았다
수억원 빚 지고 캐나다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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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명석 자담치킨 회장이 시사저널 사진 기자로 활동할 당시 남긴 표지사진/나명석 회장 제공

이른바 'IMF'로 회사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구조조정을 해야 하는 시기였는데, 아이들이 한창 학교에 다니는 선배들 대신 자녀가 아직 어린 자신이 그만두겠다고 말하며 1998년 회사를 떠난다. 그것으로 짧고 굵은 9년여의 사진기자 생활을 마무리한다.

퇴사 이후 더 바쁜 시간을 보냈다. 광고사진 일이 끊이지 않았다. 퇴사 후 6~7개월이 지나니 일거리가 많아져 전문 스튜디오를 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대기업 사보와 홈쇼핑 책자까지 매달 수천만원의 수익이 생겼다. 수익이 제법 된다는 월간지 대표의 말을 듣고 '프랜차이즈 전문 매체'를 직접 만든다. 잡지사를 운영한 지식과 경험, 인맥을 활용해 직접 프랜차이즈 브랜드를 만들기도 했다. 삼겹살, 돈가스, 칼국수 등으로 영역도 넓혀갔지만 신통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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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나 회장은 "어느 하나에 집중하지 못하고, 제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을 벌였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이제 나는 여기까지구나 하고 생각하며 2005년 '기브업' 했다"고 말했다.

건강하고 착한치킨 콘셉트 몰두
고양운동장 스탠드 밑에서 회의


그렇게 수억원의 빚을 지고 가족과 함께 캐나다로 떠났다. 캐나다에서 그는 작은 성공을 거뒀다. 캐나다 토론토의 좋지 않은 상권에 있는 허름한 가게를 인수했다. 15년 동안 10명이 파산하고 떠난 상점이었다. 그런데 그가 인수해 5개월 만에 일평균 매출 300만원을 넘기는 가게로 만들었다. 사업 아이템은 한국 사람을 위한 반찬가게였다. 배추김치, 깍두기, 뉴욕 지역 '블루 크랩'을 이용한 간장게장, LA갈비 등을 만들어 팔았다. 장사가 잘 될 때는 하루 매출이 1만 달러를 넘기기도 했다. 나 회장은 "장갑을 낄 겨를이 없이 닥치는 대로 음식을 만들어야 했을 정도로 고생했다"며 "나중에는 손에 박힌 굳은살 때문에 상처가 나 손으로 세수를 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값진 경험이었다"고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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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담치킨 나명석 회장. /강승호기자 kangsh@kyeongin.com

나 회장은 그렇게 모든 빚을 정리하고 2005년 귀국길에 올라 기회를 엿보다 2011년 '자담치킨' 브랜드를 출시했다. 프랜차이즈 업계의 꽃이 한국에서는 치킨 업종이다. 그동안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며 실패한 경험을 바탕으로 "오래 할 수 있는 딱 한 가지에 집중하겠다"며 2010년부터 본격적으로 준비한 것이 치킨이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때여서 브랜드 콘셉트를 '건강' '착한치킨'으로 잡았다.

캐나다에서 큰돈을 벌었지만 빚을 갚느라 그의 수중에는 여유가 없었다. 1호점 개업과 브랜드 출시까지 사무실도 없이 운동장에서 지인과 회의를 했을 정도로 힘겨웠다.

실패 딛고 일어선 이유는 '사람'
망하던 순간 연결된 사람에 도움
"일단 사업 시작하면 죽기살기로"

"고양운동장에 가면 그늘진 스탠드가 있어요. 신문지 깔고 소주를 마시며 회의했어요. 힘들면 누워서 쉬기도 하고요." 돈은 없었지만 그를 돕는 이가 주변에 많았다. 그동안 실패의 경험에서 쌓은 인맥이었다.

자담치킨은 현재 700여 개 매장을 갖춘 브랜드로 성장했다. 100호점을 내기까지 대부분 시간을 고속도로에서 보냈다. 연락이 오면 전국 어디든지 달려가야 했다. 1주일에 2천㎞ 이상 운전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고속도로 휴게소 음식이 질려 3~4가지 메뉴를 한꺼번에 시켜놓고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나명석 회장은 자담치킨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착한 이미지의 콘셉트를 꼽는다. 동물복지인증을 받은 가장 좋은 닭, 히말라야에서 공수한 가장 좋은 소금, 견과류가 들어간 가장 좋은 튀김 파우더, 화학 식초를 쓰지 않은 '치킨 무' 등이다.

재료의 진정성뿐 아니라 30억원을 투입해 유명 영화배우를 활용한 과감한 TV 광고 전략도 유효했다. 2021년에는 한 달동안 48개 매장을 오픈하기도 했다. 코로나19 유행 이전 180개 정도였던 매장이 현재 700개를 넘었다.
결국 사업도 사람관계, 신뢰가 가장 중요합니다.
나명석 회장은 실패를 딛고 일어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를 '사람'에서 찾았다.

"제가 망하던 순간 연결됐던 분들이 다시 저를 도왔죠. 결국 사업도 사람 관계이니 신뢰가 가장 중요한 것 같습니다."

창업을 준비하는 이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조언을 물었다. 나명석 회장은 "웬만하면 사업을 시작하지 말아 달라"며 "직장 생활을 할 수 있다면 오래도록 하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단 사업을 시작하면 포기할 수 없는 만큼 반드시 '죽기 살기'로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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