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득 前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부친 장터서 상회… 전도사 거쳐 '길상제일교회' 개척
초교 4학년때 축현초 전학… 박재상 감독 권유로 골키퍼 전환
장비 없어 모래사장에 다이빙 훈련… 서울체중·고 진학
친구들과 같이 못 가자 고려대 거액 제의 포기… 포철 프로行
멕시코월드컵 '벤치'… '축구화 문제' 대표팀 선수기용 의혹
"초교 이후 축구인 아닌적 없어… 인천은 선수 꿈 이룬 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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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득은 대한축구협회 경기위원장 시절 전국의 축구장을 돌았다. 숭의축구전용경기장은 과거 인천종합경기장 시절 학생부 축구 경기가 종종 열리는 곳이어서 어린 조병득도 이곳을 가끔씩 찾았다고 한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인천 내륙에서 바닷길로 30㎞ 이상 떨어진 강화군은 본도를 포함 15개 섬으로 이뤄진 군도(群島)였다. 강화군 본도(本島)는 고려 말 강화를 임시 수도로 삼은 강도시기부터 시작된 간척 사업으로 3~4개의 섬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지금의 모습이 됐다. 연륙교도 생겼다. 강화군은 국내에서 제주도, 거제도, 진도 다음으로 면적이 넓다. 강화군에는 6만9천명(10월 기준)이 살고 있고 그중 절반가량이 60세 이상인 한촌(寒村)에 가깝지만 과거에는 달랐다. 1950~60년대 15만 인구가 거주하고, 44개 초·중·고교(분교 포함)에 학생이 말 그대로 바글바글하던 시절이 있었다. 본도 남동쪽에 자리 잡은 길상면 온수리에서는 날짜 끝자리가 4, 9일이면 어김없이 오일장이 성대하게 열렸다. 길상면뿐 아니라 화도면, 양도면, 불은면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광장에 천막이 빼곡히 세워지고, 좌판이 깔리고, 어물전이 늘어서고, 구수한 냄새 풀풀 풍기는 국밥집이 들어서고, 약장수 패거리가 장터의 열기를 끌어올렸다. 섬마을 아이들에게 장터는 지루할 틈없는 놀이터이면서 신문물의 집합소였다. 이 장터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낸 까까머리 아이 중 훗날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주전으로 그라운드에 우뚝 선 인물이 나온다. '철벽 방어'로 1980년대 한국축구를 지킨 골키퍼 조병득(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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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조병득의 모친(김사라), 조모, 부친(조순성)이다. 1981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길상면 자택에서 찍은 사진이다. / 안용석 씨 제공

조병득은 1958년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에서 2남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현역시절 페널티킥 상황에서 키커를 등지고 두 손을 모아 기도하는 모습으로 축구팬의 기억에 남아 있는데, 독실한 감리교 집안에서 자란 영향이었다. 부친(조순성)은 온수중앙교회 장로, 장흥감리교회 전도사를 거쳐 1980년 4월6일 길상제일교회를 개척했다. 부친은 장남이 태어났을 때 목회자로 키울 것을 맹세했다. 축구선수의 길을 선택한 장남 대신 차남(조병일)이 목사 안수를 받아 현재 서울 남가좌동 은석교회 담임목사로 있고, 길상제일교회는 조병득의 매형(장동옥)이 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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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군 길상면 온수리의 길상제일교회는 조병득의 부친 조순성 장로가 땅을 사고 건물을 세워 1980년 4월 창립됐다. / 김명래 기자

강화군 개신교의 첫 출발은 1893년 설립된 강화교산교회(감리교회)로 올해 130년이 됐다. 강화의 감리교인들은 1919년 3월18일 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정도로 민족의식이 높았다. 이웃에게 차별 없이 인정을 베푸는 것을 덕으로 삼는 전통을 갖고 있다. 강화 지역은 동네마다 감리교회가 서 있고, 현재 128개 교회가 주일마다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강화는 '감리교의 못자리'로 불렸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감리교 목회자는 목사 안수를 받은 뒤 3~4년을 강화군에서 보내야 했다. 감리교회 장로 직분은 마을에서 두루 존경받는 인물이 맡았다고 한다.

지난 20일 온수리 신광상회에서 만난 안용석(67)씨는 1960년대 조병득 전 부회장 가족의 평판이 어땠는지 들려줬다.

"조순성 장로님은 신앙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본이 될 만한 분이셨어요. 병득이 어머니(김사라)는 현모양처로 인정받으면서도 신앙이 깊었지요. 그 집 형제자매들이 욕하는 것을 들은 적이 없을 정도로 가정교육이 잘 됐습니다."

조병득의 부친은 온수리 장터에서 '제일상회'를 운영한 상인이었다. 무쇠솥, 사료, 연탄, 시멘트, 목재 등을 팔았는데 요즘으로 치면 마트와 비슷했다. 조병득이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가게 자리에 2층짜리 건물을 세웠다. 1층에서 상점을, 2층에서는 예식장(제일예식장)과 미용실을 운영했다. 미용 기술을 배운 모친이 머리를 다듬었다. 현재 온수리 오일장 터를 사이에 두고 강화남부농협 영농자재센터 맞은편 유신약국 건물이 조병득 가족의 터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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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다리가 생기기 전인 1960년대까지 초지선착장에서 인천에 가는 배가 운항했다. 현재는 여객선이 다니지 않는다. 사진 우측 멀리 보이는 다리는 초지대교로 2002년 개통했다. / 김명래 기자

조병득의 유년시절 강화군은 전체 면적의 70%가 전답이어서 식량이 풍요로운 지역이었지만 물건은 귀했다. 갑곶리와 김포 월곶면을 잇는 길이 694m, 너비 10m의 왕복 2차선 도로(옛 강화대교)가 개통(1970년 1월)하기 전까지 육지로 가는 길은 배편뿐이었다. 부친은 물건을 사러 종종 인천을 오갔다. 초지선착장까지 걸어가 배를 타고 건너편 김포 대명리에 나가 버스로 갈아타거나, 하루 두 번 왕복하는 인천행 배에 탑승해야 했다. 부친을 따라나선 조병득의 첫 인천 나들이는 극심한 뱃멀미로 기억에 남아있다.

"온수리에서 초지까지 굉장히 먼 거리였던 것 같아요. 배를 타고 가는데 속이 안 좋아서 빨리 배에서 내리고만 싶었어요. 인천에 내리면 아버지가 맛있는 음식을 사주셨고, 화평동 언덕길에 있는 극장에서 영화 구경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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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일 조병득 전 부회장이 축현초에 다니던 시절 살던 집을 찾아갔다. 그는 동인천역 북광장 쪽 양키시장 골목에서 할머니, 누나들과 함께 살았다. 과거 집 건물을 사라지고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다. / 김명래기자

강화길상초에 다니던 조병득은 4학년 때 인천축현초로 전학해 외할머니, 누나들과 함께 송현동 양키시장 주변 골목에 집을 얻어 살았다. "당시 강화군은 교육열이 높아 20% 정도는 인천으로 유학했다"고 조병득의 셋째 누나(조명옥)는 전했다. 조병득의 누나 중 2명이 교대에 진학했을 정도로 부모는 자녀 교육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조병득은 그해 가을 축구부 코치로 있던 강화 길상면 출신 선배(허연)의 권유로 축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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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축현초등학교.

"처음에는 풀백을 했어요. 5학년 때 박재상 감독님이 골키퍼를 하라고 했는데 그게 더 마음에 맞았던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 보면 끔찍할 정도로 훈련이 힘들었는데 저는 그걸 즐겼던 것 같아요. 매일매일 하나씩 감각적으로 익혀지는 것을 좋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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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 축현초는 유소년 축구 강자로 떠올랐다. 조병득의 1년 후배 김학봉씨는 중앙일보 주최 전국 시도대항 축구대회에 출전해 준우승을 차지한 뒤 상을 받는 사진을 간직하고 있었다. 1969년 대회로 그는 기억했다. / 김학봉 씨 제공

1960년대 후반 축현초는 축구계 강자로 떠올랐다. 경기도 내 대회에서 수차례 우승했고, 전국 대회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그 중심에 박재상 감독이 있었다.

박재상 감독은 선수 출신이 아닌 성균관대 화공과 재학생으로 '축구 마니아'였다. '공부는 공부, 축구는 축구'라는 신조 아래 축구부원들이 학교 수업을 마친 후 3시간씩 훈련했다. 골키퍼 전문 코치가 없던 시절, 아마추어인 박재상 감독과의 만남이 조병득을 골키퍼의 길로 이끌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조병득은 팔이 길어 '문어다리'라는 별명이 있었다. 하루 수백번씩 모래사장에 뛰어들며 다이빙 훈련을 했다. 조병득의 축구부 1년 후배 김학봉(64)씨의 기억이다.

"재상이 형이 축구 이론을 열심히 배우셔 가지고 그걸 항상 메모하고 그림을 그려 저희한테 가르쳐 주셨어요. 동생(박충민)이 축구부에 있기도 했고요. 학교에 철봉 있는 모래사장이 있었거든요. 병득이 형이 고무로 된 보호대 같은 것을 무릎에 차고 계속 다이빙을 하게 했어요. 병득이 형이 측면으로 떨어지니까 반창고 같은 것을 이것저것 붙였는데도 많이 아프다고 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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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가대표 골키퍼 조병득.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마땅한 장비도 없던 시절, 조병득의 골키퍼 훈련은 문자 그대로 '맨땅에 헤딩'이었다. 모래사장 다이빙은 기본이고, 심지어 구령대 위에서 맨바닥으로 뛰어드는 훈련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어떤 상황에서도 안 다치고 바닥으로 떨어질 수 있는지를 몸이 터득할 정도"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1971년 개교한 서울체육학교(서울체육중) 진학은 '엘리트 선수'로 가는 길을 열었다. 서울체육중은 1기생으로 축구, 농구, 배구, 태권도, 유도, 육상, 체조, 빙상 분야에서 실력 있는 학생 210명을 선발했고 조병득도 거기에 포함돼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체육중은 스카우터가 아닌 공개모집으로 학생을 뽑았는데, 입시 전형에 '아이큐 테스트'도 있었다. '연습 벌레'였던 그는 다른 종목 선수들에게 기술을 익혀 자신만의 무기로 가다듬었다. 훗날 그가 K-리그 최초의 골키퍼 1호 어시스트 기록(1989년)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훈련하면서 공을 더 보내지 못하는 게 늘 아쉬웠어요. 우리 선수 중 어윤철이 제일 빨랐고 사이드에서는 신문선, 백광기가 있었거든요. 공을 멀리 보내려고 축구공을 물에 불려 무겁게 만든 뒤 차는 훈련을 했어요. 또 어깨 쓰는 법을 배우려고 창던지기 선수인 친구(표창섭)에게 부탁했는데요, 나중에는 저도 깜짝 놀랄 정도로 공을 멀리 보냈어요. 발로 차면 골대까지 나가고, 던지면 중앙선을 휙휙 넘고 그러니까 당시에 센세이션을 일으켰죠. 괴물 같은 놈이 나타났다면서."

서울체고를 졸업한 조병득은 포철에 입단했다. 본래 고려대 입학이 계획돼 있었는데 조병득이 틀었다. 그는 자신의 입학·입단 등 진로를 항상 스스로 결정했고, 부모는 아들의 선택에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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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가대표 골키퍼 조병득.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고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어요. '너가 오면 몇 명 (같이) 받아주겠다'고 약속해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친구들 부모님들과도 다 얘기가 됐어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제의가 바뀌었어요. '다 오지 말고 그 대신 돈을 줄 테니까 너만 와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거절했어요."

당시 고대가 제안한 금액은 500만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지역 아파트 평(3.3㎡)당 분양가가 30만~50만원하던 때다.

조병득은 현역 시절 경기 매너가 좋은 선수로 인정받았다. 1987년 서울에서 열린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심판들로부터 '최고 모범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무한 경쟁 속 거친 플레이가 난무하는 그라운드에서 그가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이 궁금했다. 그는 1978년 6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제9회 자카르타 축구대회'에서 겪은 일을 들려줬다.

"경기 전 선배들이 말레이시아 공격수 중 저 ○번 선수를 혼내주라고 하더라고요. 그 선수가 제일 잘했어요. 경기 중 우리 수비를 제치고 공을 길게 치면서 단독 찬스가 난 거에요. 제가 한 템포 늦게 나가 공을 잡고 굴러버렸고, 그 선수는 피할 수가 없어 떨어져 나갔어요. 앰뷸런스가 들어와서 선수를 싣고 나갔어요. 다음 날 아침에 보니까 그 선수가 다리에 깁스를 대고 목발을 짚고 나왔는데 저를 보고 웃으며 인사하는 거예요. 제가 거기서 충격을 받았어요. 앞으로 이렇게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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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축구 대표팀이 1987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제16회 대통령배 축구대회에서 호주를 물리치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연장까지 120분의 혈투였다. 한국팀은 승부차기에서 조병득이 2골을 잡아내면서 우승했다. /조병득씨 제공

조병득은 '복음을 전하는 팀을 만들자'는 이영무 선수의 제안을 받고 할렐루야 독수리 창단 멤버로 1980년 입단했다. 대한축구협회 회장이었던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이 만든 구단으로 1983년 슈퍼리그(현 K리그) 원년 우승을 차지했다. 1985년 시즌을 마친 뒤 할렐루야는 프로를 탈퇴하고 아마추어팀으로 전환했지만 조병득은 당장 프로팀으로 옮기지 않았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을 할렐루야팀 소속으로 출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32년 만의 월드컵 본선인 멕시코월드컵은 '한국 축구의 세계화'를 촉발한 계기였다. 본선을 앞둔 1986년 5월 '고지 적응 훈련'을 목적으로 이동한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대표팀 선수들은 분데스리가 레버쿠젠 소속 차범근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프로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프로 선수로서 스스로 컨디션을 관리하는 자세, 개인 식단을 준비해 몸을 관리하는 모습 등이 모두 낯설게 다가왔다고 한다. 조병득은 멕시코월드컵 본선 내내 '벤치 신세'를 졌고 이는 두고두고 대표팀의 선수 기용을 비판하는 소재로 쓰였다. 왜 그랬을까. 조병득은 어렵게 입을 뗐다.

"좀 혼돈의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우리가 세계 축구를 몰랐었잖아요. 선수들의 권리 같은 것을 우리는 모르고 지냈어요. 월드컵에 나간다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장갑, 축구화) 계약 제의가 들어오는 거예요. 저희는 당황했죠. 축구협회에서 이윤을 더 추구하다가 선수 개인 이익에 대한 것을 제재했고 그런 데서 부작용이 좀 있었던 것 같아요. 월드컵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에서 제가 프로스펙스를 신었어요. 프로스펙스에 다니는 친구가 부탁했거든요. 그 이후로 운동장에 나오면 지도자들이 축구화부터 체크하는 것 같은 느낌도 받았어요. 당시에는 이게 사회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거니까, 얘기 꺼낼 수도 없고 마음에만 두고 살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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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가대표 골키퍼 조병득.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1986년 6월30일 동아일보 <신발-500여 업체의 '전국시대'> 보도에 따르면 월드컵에서 국제상사와 프로스펙스를 신고 뛰기로 계약한 선수가 여럿 있었지만 개막전에서 모두 아디다스로 바꿨고, 이를 두고 국제상사가 축구협회에 '계약 위반'으로 항의한 적이 있다.

조병득은 비교적 이른 나이인 1990년 은퇴하고 지도자의 길에 나섰다. 올림픽대표팀 코치, 할렐루야 독수리 감독, 전북 현대 모터스 코치, 전남 드래곤즈 코치, 수원삼성 블루윙즈 코치를 거쳤다. 2014년 대한축구협회 경기분과위원회 경기위원장이 되면서 '축구 행정가'로 변신했다. 그는 '경기 감독관 역량 강화'에 신경 쓰고, '직장인 축구단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일부 성과를 거뒀지만 풀지 못한 숙제도 있다. 대한축구협회는 지난 3월 '징계 축구인 100명 사면'을 추진하다 축구팬 등의 강한 반발로 철회했다.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협회 부회장단 등 임원이 전원 사퇴했고 그때 조병득도 협회에서 나왔다.

아임프롬인천 조병득 전 국가대표 골키퍼
전 국가대표 골키퍼 조병득.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조병득은 인터뷰 중 "사명을 감당한다"는 말을 자주 썼다. 축구협회 경기위원장 시절 경기감독관을 하는 선배들에게도 이렇게 말하면서 "활동 기간에 술을 끊고, 심판 멀리하고, 학부모 만나지 말고, 공식적인 식사 외에는 하지 말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골키퍼는 상대 팀 공격을 막는 마지막 보루다. 뚫리면 경기 결과가 뒤바뀐다. 항상 준비돼 있어야 한다. 이것이 조병득이 생각하는 골키퍼의 기본자세다.

조병득에게 고향 인천은 "축구선수의 꿈을 이루게 한 시발점"이다. 축현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축구를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축구인'이 아닌 적이 없었다. 조병득의 누나 조명옥씨에 따르면 그의 '축구 DNA'는 부친에서 물려받은 것이다. 조병득의 부친은 강화군 길상면 축구팀 대표 공격수로도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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