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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득 前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지도자·축구 행정가로서의 길로

 

조병득(사진) 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은 1980년대 국가대표 주전 골키퍼로 이름을 날렸다. 당시 축구팬들은 승부차기 전 키커를 등지고 서 기도하는 조병득의 모습을 기억한다. 또 국내 최고 골키퍼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멕시코 월드컵에서 한 경기에도 뛰지 못한 '비운의 선수'가 된 것을 아쉬워한다.

조병득은 1990년 은퇴한 뒤에도 지도자로서, 축구 행정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 그의 '축구 인생'의 출발지는 강화 섬마을 그리고 축현초등학교였다.

조병득은 1958년 강화도 길상면 온수리 장터 제일상회 집에 2남4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감리교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삶 자체가 신앙"이란 믿음 속에 성장했다. 강화군은 130년 전 감리교회가 세워졌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을 주도한 이들 중 감리교인들이 있었다. 민족의식이 강했고, 헌신하는 삶을 명예로 생각했다. 조병득이 오랜 선수 생활에도 한 번의 구설수에도 오르지 않았던 건 어려서부터 몸에 익힌 가정교육의 영향이 크다.

조병득은 길상초를 다니다가 4학년 때 인천축현초로 유학했다. 그 학교에서 길상면 출신 선배가 코치로 있는 축구부와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축구부 감독은 팔과 다리가 길고 신체 반응이 뛰어난 조병득을 골키퍼로 낙점했다. 조병득을 필두로 한 축현초 축구부는 인천은 물론이고 전국 대회를 제패했다. 이 곳에서 기본기를 탄탄하게 익힌 조병득은 훗날 세계 무대에서도 인정받는 골키퍼로 성장했다.

조병득은 '지독한 연습벌레'였고, '매너 좋은 선수'였다. 돈에 연연하기보다 신앙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하는 쪽을 따랐다. 조병득은 골키퍼를 "항상 준비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그는 "필드에서 경기가 진행되고 공이 상대 쪽으로 갔다 우리 쪽으로 왔다 하면서 직접 골대로 들어오는 상황이 돼야 골키퍼의 역할이 시작되는데 이것을 잘 하기 위해서는 항상 준비를 해야 한다"며 "준비돼 있지 않으면 그 다음에 벌어지는 상황을 감당하기 힘들다"고 했다. 그는 지난 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자리에서 내려왔지만 여전히 축구인으로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으며 앞날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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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래기자 problema@kyeong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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