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이스 기타리스트 김홍탁

레전드 기타리스트 김홍탁의 음악 인생은 중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이 끝나고 영종도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그는 송현동으로 이사와 동산중학교에 입학한다. 김홍탁의 모친은 불구나 다름없는 남편을 돌보며 중앙시장 인근에서 지물포를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집안 어른들이 3층짜리 건물을 마련해 주셨다고 한다.

중학생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의기소침해진 아들에게 어머니는 기타를 선물했고 김홍탁은 음악에 눈을 떴다.

아임프롬인천 김홍탁
동산중학교 2학년 김홍탁/김홍탁 제공

“그 당시 구하기 힘든 기타를 어머니가 어떻게 사 주셨는지, 너무 행복했어요. 그제야 내 인생이 시작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가 중학교 2학년입니다.”

김홍탁은 여러 사람에게 기타를 배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스승은 까까머리 중학생으로 만난 한 미군 병사였다고 했다.

“친한 친구는 아니었는데, 자기 집 2층에 미군이 살고 있고 그가 기타를 친다는 거예요. 그래서 찾아갔는데, 기타 소리가 제게는 ‘천지개벽’처럼 들리더군요. 그 리듬이 무척 좋은 거예요. ‘기타를 가르쳐 줄 수 없느냐’고 부탁했는데, 처음에는 제가 너무 어리다며 거절했어요. 그래도 틈만 나면 찾아갔죠.”

1년 조금 넘는 시간을 일요일마다 찾아가 기타를 배웠다. 김홍탁은 “나중에 알게 됐지만, 그 미군 병사가 미국에서도 꽤 유명한 프로 뮤지션이었다”면서 “이래저래 운이 너무 좋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임프롬인천 김홍탁
동산고등학교 1학년 시절 김홍탁

착실하게 기타 연습을 하며 연주자로서 실력을 쌓아갔다. 김홍탁은 동산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학교 동기·선배 등과 함께 캑터스(Cactus)라는 밴드를 조직했다. 캑터스 멤버는 기타를 연주하는 김홍탁을 포함해 동기인 장동선(색소폰)·이백석(베이스), 1년 선배인 김부일(드럼), 전라도에서 기타 선생을 하다 인천으로 올라온 서너 살 위의 조현(기타) 등 5인조로 구성됐다. 김홍탁이 막내였음에도 밴드의 리더를 맡았다.

캑터스는 방과 후 신포동의 한 건물 지하창고 연습실에 모여 연습했다. 요즘과 달리 악보를 쉽게 구할 수 없는 시기였다. 악보를 옮길 수 있는 능력은 김홍탁과 멤버 조현이었다. 둘은 경쟁이라도 하듯 ‘킹스턴 트리오’ ‘브라더스 포’ ‘피터 폴 앤 마리’ 등의 ‘빽판’을 듣고 또 들으며 오선지에 채보했다. 미8군 라디오 방송도 중요한 통로였다. 김홍탁은 “그때 경험이 내 음악적 ‘귀’를 만들어 준 것 같다”고 말했다.

캑터스는 일주일에 한 차례 신포동에 있는 미군만 드나들 수 있는 ‘유엔 맥주’ 등 클럽 무대에서 연주도 했다. 김홍탁은 “신포동 일대에 미군만 출입이 가능한 클럽이 적어도 4~5곳 이상은 됐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인천에는 미군 부대가 주둔했다. 인천 미군 부대 주둔의 역사는 식민지 일본 제국주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며 일본은 한반도를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인천 부평평야에 한반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군수공장인 육군조병창을 조성했다. 부평 조병창은 1939년 공사를 시작해 1941년 5월 문을 열었다. 이곳에서는 해방 직전까지 소총·탄약·포탄 등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무기를 만들었다.

아임프롬인천 김홍탁
김홍탁

해방 직후 미군은 부평 조병창을 접수했다. 제24군단 예하 제24군수지원사령부(Army Service Command 24th Corps), 일명 ‘애스컴’(ASCOM)을 주둔시켰다. 한국전쟁 이후 애스컴은 본격적으로 확장해 도시를 이룰 만큼 크다는 이름의 ‘애스컴시티’로 불렸다. 보급창, 신병보충대, 야전병원, 공병대, 화학창, 비행장, 병기대대, 헌병대 등 수십 개 부대가 주둔했다. 애스컴을 통해 다양한 서구 음악 장르도 국내에 퍼져 나갔다. 특히 애스컴은 한국으로 들어오는 미군이 반드시 거쳤던 관문이었다. 이곳에서 각 지역으로 배치받았다.

특히 미군기지 주변으로 미군을 상대하는 클럽이 많았는데, 김홍탁의 캑터스와 같은 국내 밴드와 가수들에게는 이들 무대가 자연스럽게 음악적 내공과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김홍탁은 “말하자면, 우리나라 지금 K팝의 시작은 인천이라고 생각한다”면서 “평론가나 학자들은 조금씩 다른 학문적 견해가 있을 수 있는데, 음악하는 많은 이가 인천이 뿌리임을 인정한다. 인천이 K팝 음악의 시발점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홍탁은 이러한 영향을 받은 뮤지션이 여럿 있다고 했다. 트롬본 연주자 정서봉, 드럼 연주자이면서 조각가이기도 한 김대환, 밴드 사랑과 평화 보컬 이철호, 밴드 데블스 기타리스트 김명길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인천 출신 뮤지션이 많다고 강조했다.

캑터스의 연습실 근처에는 신포시장이 있었다. 연습하다 출출해지면 캑터스 멤버들은 신포시장에서 배를 채웠다. 김홍탁은 “학창시절 신포시장에서 먹었던 ‘토끼 튀김 우동’이 지금도 그립다”며 “서울에서도 자가용을 타고 인천으로 내려와 줄을 서서 먹었던 풍경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현재 신포시장을 대표하는 먹거리는 ‘닭강정’으로, 토끼 튀김 우동을 기억하는 이를 찾기 힘들다. 토끼 튀김 우동의 정체는 신포동에서 장어 튀김과 튀김 우동을 파는 노포로 소문난 ‘신신옥’ 2대 사장 박진우씨로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박 사장은 “신포동에서 튀김 우동과 토끼 다리 튀김을 함께 팔았던 식당이 3~4곳 있었다”면서 “월미도에 미군이 주둔했는데 숙소 주변에 토끼가 많았고 군부대에서 일했던 누군가가 시장에 토끼 고기를 가져다 준 것으로 들었다”고 기억했다. 1958년 문을 연 신신옥 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경상도집’ ‘강화집’ 등이 튀김 우동과 토끼 다리 튀김을 팔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김홍탁이 지금까지 전설의 기타리스트로 불리며 스타 연주자로서 길을 가게 된 것은 ‘키보이스’ 일원이 되면서다. 김홍탁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차중락으로부터 ‘키보이스’에 합류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는다.

동산중학교 시절 동창 가운데 하나가 서울에 있는 경복고등학교로 진학했고, 키보이스 멤버이자 경복고 출신 차중락에게 “인천에 버터 냄새가 나는, 기타 연주를 아주 잘하는 천재 연주자가 있다”는 귀띔을 해준 것이 인연이 됐다. 김홍탁은 그 길로 키보이스에 합류했다. 신포동 연습실을 찾았던 차중락도 신포동에서 튀김 우동을 먹었다고 한다.

아임프롬인천
키보이스 힛트앨범/김홍탁 제공

김홍탁과 함께 당대 엘비스 프레스리로 불린 보컬 차중락, 베이스 기타 연주자 차도균, 드러머 윤항기, 키보드 옥성빈 등이 모인 키보이스는 1963년부터 준비에 들어가 1964년 7월 국내 최초 록밴드 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를 발표했다. 우리나라 최초 록밴드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닐 역사가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국내 팬에게는 ‘키보이스’로, 미8군 무대에서는 ‘락앤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미8군 무대에 서려면 오디션을 통과해야 했다. 오디션 결과에 따라 AA·A·B·C·D 등급이 메겨져 출연료가 결정됐다. 키보이스는 데뷔 후 단 한 차례도 AA 등급을 놓치지 않았다고 한다.

키보이스는 한국의 비틀즈로 불리며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예를 들면, 지금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있던 서울시민회관에서 공연을 자주 했는데, 공연이 끝나면 절대 앞문으로 나가질 못했어요. 목에 스카프라도 걸치고 있으면 여성 팬들 극성에 찢길 정도였으니까요. 서울 변두리 극장도, 지방 공연도 마찬가지였죠. 굉장히 부담스럽기도 하고 영광스럽기도 하고 너무 고맙기도 하고 그랬죠.”

김홍탁은 1967년 키보이스를 돌연 해체해 충격을 준다. 최정점에 있는 키보이스를 대중에게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겨두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리고 1968년 조용남(기타리스트), 한웅(키보드), 유영춘(보컬), 김용호(드럼)와 함께 히파이브(He5)를 꾸린다.

히파이브의 탄생에는 음악적 이유가 있었다. 지미 헨드릭스(Jimi Hendrix)라는 위대한 기타리스트의 출현 때문이었다. 그도 지미 헨드릭스와 같은 음악을 하고 싶었다. 1년여 동안 4장의 앨범을 냈다. 히트곡들도 생겼다. 특히 ‘초원’은 대박이 났다. 전국에 노래 제목을 딴 ‘초원 다방’이 수도 없이 생겼다.

김홍탁은 “키보이스 시절에도 경험하지 못한 대중음악의 위력, 힘 따위를 느꼈다”면서 “동시에 대중의 사랑을 받는 뮤지션으로서 더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아임프롬인천 김홍탁
히식스 첫 앨범/김홍탁 제공

그는 1970년 히파이브를 해체하고 다시 6인조 히식스(He6)를 결성한다. 지미 헨드릭스에 이어 록밴드 ‘산타나’가 활동하던 무렵이었다. 이번엔 산타나와 같은 밴드를 꾸리고 싶었다. 조용남, 유상윤, 권용남, 이영덕, 김용중과 함께 히식스를 결성했다. 이후 보컬 김용중 대신 최헌이 영입됐다. 김홍탁은 히식스를 자신의 음악 인생 ‘최고의 팀’으로 꼽았다. 히식스 기존 멤버 6명에 여성 멤버 2명을 영입했고 큰 인기를 끌었다. 당시 최고의 방송국으로 여겨지던 TBC(동양방송) ‘쇼쇼쇼’라는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며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이름을 알렸다. 방송국보다 시설이 좋았다고 여겨지던 명동의 라이브 클럽 ‘오비스 케빈’은 히식스의 단골 무대였다.

아임프롬인천 김홍탁
1971년 플레이보이컵 쟁탈 보컬그룹경연대회 최우수상 기념사진/김홍탁 제공

“한국에서 잘 나간다는 사람들은 모두 오비스 케빈에 왔어요. 방송국 PD, 유명한 탤런트가 다 거기 모일 정도로 유명한 명소였어요. 그런 공간의 주인공이 히식스였죠. 운이 참 좋았습니다. 너무 행복했고요. 더 이상 올라갈 데가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김홍탁은 1972년 돌연 미국으로 떠난다. 정치적으로 우울한 시기였다. 유신정권 아래에서 자유로운 음악 활동을 하지 못했고 록밴드에게 가장 혹독한 시기이기도 했다. 채워지지 않는 음악적 갈망도 가슴 한구석에 남아 있었다. 대중예술인을 경시하는 분위기도 싫었다. 지금은 대중 예술인을 낮잡아 보는 이가 없지만 옛날에는 그렇지 않았다. 딴따라로 부르며 업신여기는 일이 많았다. 김홍탁이 활동하는 시절에는 특히 더 심했다.

아임프롬인천 김홍탁
2017년 제14회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수상 당시 김홍탁/김홍탁 제공

 

김홍탁은 “미국으로 건너간 이유 가운데 하나인데, 딴따라라는 말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대중 음악인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없지 않았다”고 했다. 미국에서 김홍탁은 음악 공부는 물론 공연 사업, 보석 판매, 꽃집 운영 등 다양한 경험을 하고 14년여 만인 1987년 한국으로 돌아온다.

아임프롬 인천 김홍탁
1996년 서울재즈아카데미 개원 직후, 사진 왼쪽부터 TBC에서 ‘쇼쇼쇼’를 담당했던 조용호 PD와, 김동건 아나운서, 김홍탁/김홍탁 제공

귀국 후 가장 보람되고 기억에 남는 일은 동시대 음악을 배우는 실용음악학교를 세워 후배들을 양성하는 데 힘쓴 일이다. 김홍탁은 1995년 우리나라 최초의 실용음악 고등교육기관 ‘서울재즈아카데미’(현 SJA실용전문학교)를 설립하고 2009년까지 원장으로 일했다. 대중음악 영역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유명 뮤지션이 이곳 출신이다. 세계 최고 음악학교인 미국 버클리음대의 협력기관이기도 하다.

김홍탁은 기회가 된다면 고향 인천에서 큰 콘서트를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고 있다.

“누구든지 고향을 생각하잖아요. 고향을 떠올리면 내가 인천에서 태어난 것이 참 다행이고 행복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한편으로 내년이면 꼭 80세가 되는데 그동안 고향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내년에는 인천에서 큰 콘서트를 한번 하고 싶어요. 그런 계획을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요. 인천이라는 내 고향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어요. 그저 하고 싶은 일, 할 수 있는 일, 행복한 일을 하며 살아가려 합니다.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음악 속에서 살면 행복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