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이스 기타리스트 김홍탁
초교 들어가자 6·25… 공무원 부친 ‘숙청’
집 지킨 모친… ‘영종 만석꾼’ 조부 의탁
“아름다운 곳… 슬픔 많았지만 추억도”
“전쟁 이전 아버지 끌려갔다” 증언 주목
어머니가 선물한 기타… 음악에 눈 떠
동산고 시절 ‘캑터스’ 리더로 클럽 연주
‘키보이스’ ‘히파이브’ ‘히식스’ 명성
‘서울재즈아카데미’ 설립… 후배 양성
“내년엔 고향에서 큰 콘서트 열고파”
우리나라 최초 록밴드로 불리는 키보이스를 비롯해 히파이브, 히식스 등의 밴드를 이끈 인천 출신 전설의 기타리스트 김홍탁. 김홍탁의 유년 시절 인천에 대한 기억은 흐릿하다. 김홍탁은 해방 직전인 1944년 인천 내동에서 태어났다. 우리나라 최초 성공회 성당인 내동 성공회성당이 잘 보이는 집이었다. 김홍탁의 아버지(김창선)는 창영초등학교를 나왔고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법원 공무원으로 일했다. 아버지보다 4~5년 아래인 김홍탁의 어머니 홍정희 역시 창영초등학교 출신이다. 아버지는 책과 공부와 음악을 좋아했고, 어머니는 결혼 전까지 곱게 자란 여성이었던 것 같다고 김홍탁은 기억했다.
김홍탁의 유년 시절 기억은 한국전쟁으로 시작된다. 초등학교에 입학해 1학년이 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김홍탁은 인천 영종도로 피난을 가야 했다. 영종도에는 친척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는 피난 과정에서 아버지·어머니와 잠시 헤어지는 아픔을 겪는다. 김홍탁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있는 영종도로 피난을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법원 공무원인 아버지는 인민군에게 끌려갔고 어머니는 집을 지켜야 했던 상황이었다. 김홍탁의 아버지는 1·4후퇴가 지나서야 인천의 한 경찰서에서 식물인간에 가까운 모습으로 발견됐다고 한다.
전쟁이 일어나고 인민군이 남하하며 점령한 남측 지역에는 북한군의 대대적인 숙청이 있었다. 경찰과 관청 공무원 등은 가장 우선적인 숙청 대상이었다. 이들은 북한군에 의해 수감되거나 학살됐고, 가족들도 고초를 겪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김홍탁은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사흘 전에 아버님이 북한군에 끌려갔다”고 말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이미 북한군이 남쪽에서 활동했다는 얘기인데, 김홍탁의 진술이 흥미롭다.
해방 이후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각각 정부가 수립됐지만,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도 남북의 소규모 군사 충돌은 수시로 일어났다. 남한과 북한 모두 38선을 월경해 작전을 펼친 사례도 확인된다. 하지만 북한군의 월경은 주로 남한의 군·경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 민간인을 납치한 사례는 드물다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 견해다. 월경작전은 주로 강원도 지역에서 일어났으며, 1950년 들어서는 본격적인 전쟁 준비를 위해 북한군의 월경이 급감했다고 한다.
전쟁기념사업회 전쟁기념관에서 6·25전쟁사를 연구하는 고한민 학예연구사는 “인천지역은 전쟁 발발 후 사흘 만에 점령됐다. 김홍탁이 전쟁 발발 후의 일을 그 전에 있었던 것으로 잘못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조금 기묘하게 들리는 이야기이기도 한데, 만약 김홍탁의 기억이 맞는다면 조사해 확인해 볼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김홍탁은 영종도로 피난을 가서 99칸짜리 할아버지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창영초에서 영종초등학교로 전학해 학적을 옮겼다. 김홍탁의 조부는 영종도에서 금을 채취하는 사업을 한 김종현씨다. 김홍탁은 할아버지에 대해 “조금 과장하면 영종도에서 우리 할아버지 땅을 밟지 않고는 다니지 못할 정도의 거부였다. 만석꾼 소리를 들으신 분이었다”고 말했다.
지난 2008년 영종·용유지 발간위원회가 펴낸 ‘영종·용유지’에는 김홍탁의 조부 김종현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다.
‘김종현(金鐘顯)은 운서동 출신으로 본래 재산이 많았는데, 금광을 발견해 거부가 되었다. 쌀 한 가마에 8원 하던 1939년, 영종초등학교 증축 기금으로 1만원을 기증하였고 삼목도와 신불도, 용유도 사이에 징검다리를 놓아주는 등 선행을 베풀어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송덕비가 신불, 삼목, 용유도에 보존되어 있다.’
김종현의 동생, 즉 김홍탁의 작은아버지에 관한 기록도 있다.
‘김달현은 김종현의 동생으로 형과 함께 금광업에 종사해 거부가 됐다. (중략) 운서초등학교 건립 당시 1개 교실, 2개 숙소를 지어주는 등 교육 발전에도 공헌하였다. 후에 민선 면장을 역임했다. 백운산 기슭에 건립한 주택은 영종에서 제일가는 한옥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아들 김흥선이 잘 보존해 오고 있다.’
용종·용유지 기록처럼 김홍탁의 조부를 기리는 송덕비가 현재 영종국제물류고등학교에 남아있다. 영종초등학교는 현재 영종국제물류고 부지에 1920년 영종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고 2012년 영종하늘도시 내 신축 교사로 자리를 옮겼다. 학교 내 공사가 한창인데 ‘김종현·서원일 양씨 송덕비’에는 김종현씨가 1만원을, 서원일씨는 3천원을 기증했다고 새겨져 있다. 현재 쌀 한 가마 가격을 20만원으로 환산하면 당시 1만원은 현재 2억5천만원에 이르는 큰돈이다.
옛 신문을 보면 영종도 금광에 관한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1932년 3월26일자 매일신보에는 ‘인천 영종도에 황금광 답지 사금이 난다고 전답을 파헤처 일반소작인 대공황’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다. 영종도 도처에 금맥이 발견됐고, 일확천금을 꿈꾸고 물결같이 모여든 황금광(黃金狂)이 700명에 이르며, 요즘은 논에서도 사금이 발견돼 운북·운남의 논이 파헤쳐 황폐화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다.
참혹한 전쟁이었지만 김홍탁에게 유년 시절 영종도는 더없이 즐거운 놀이터였다.
“영종도는 그 당시에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갯벌에서 너무 즐겁게 놀았어요. 썰물이면 물을 따라 나가면서 망둑어, 조개를 잡았고요. 겨울철에는 백운산에서 꿩 사냥을 했어요. 여러 동네 사람들이 다 모여 함께 산을 에워싸는 거예요. 그렇게 산으로 올라가면 꿩들이 맨 꼭대기에 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요. 그렇게 잡은 꿩은 모두 공평하게 나눠 가져가고 그랬죠. 6·25전쟁의 슬픔도 많았지만 그런 즐거움, 그런 재미도 많이 있었죠.”
김홍탁은 섬마을에서 자연을 벗삼아 뛰어놀면서도 간간이 바이올린을ㄱ 배웠다고 한다. 당시 영종도 섬마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는 선생님이 1명뿐이었는데, 김홍탁은 그에게서 정기적으로 레슨을 받았다.
“기타를 잡기 전에 제가 바이올린도 배웠네요. ‘도나우 강의 잔물결’(이바노비치 작곡) 같은 곡을 연주하기도 했는데, 그때는 너무 싫더라고요.”(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