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커뮤니케이션 서승석 대표
‘국가원수 참석행사 최다대행’ 기록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등 7인 맡은바
대학교 체육대회 주관 등 경험 살려
회사 설립해 대전엑스포 운영 성과
대통령마다 메시지도 다 달라
김대중 대통령 ‘애국자’ 표현 사용
국민에 자긍심 주며 호응 이끌어내
“APEC 정상회의 유치, 위상 올라갈 것”

‘김영삼·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윤석열’. 맥커뮤니케이션은 문민정부 이후 한국 대통령 7명이 참석한 행사를 285차례 기획·실행한 이벤트 회사다. ‘단일 회사 대한민국 대통령 및 외국 국가원수 참석 행사 최다 대행’ 기록을 갖고 있다. 이 회사를 설립한 서승석 대표는 국내 행사 기획 분야 1세대 인사로 꼽힌다. 그는 인천에서 태어났다. 동구 송림동, 중구 북성동(월미도)에서 성장했다. 인천송현초등학교, 인하대학교부설중학교, 선인고등학교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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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대표는 실향민 가족이다. 황해도 출신 부모는 피난을 내려와 대구에 머물다가 ‘인천에 황해도 주민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인천에 정착했다고 한다. 부친은 황해도에서 철도 공무원으로 일했다. 서 대표는 “제가 7남매인데 저와 작은형, 막내 누나만 인천에서 태어났고 다른 형제들은 부모님과 함께 내려왔다”고 했다.
인천에 정착한 서 대표 부친은 대한제분 공장에서 일했다. 대한제분은 ‘곰표’ 브랜드로 유명한 국내 대표 밀가루 생산 기업이다. 대한제분 공장은 인천항 인근에 있다. 인천항을 통해 들여온 원재료를 가공해 밀가루와 설탕 등을 생산한다. 최근엔 ‘곰표’ 브랜드를 맥주 등 다양한 식음료와 협업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서 대표 부친은 대한제분에서 정년퇴직하고 월미도에서 횟집을 열었다. 서 대표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였는데, 그는 인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으로 월미도를 꼽는다.
월미도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관광지로 이름을 얻었다. 일제는 ‘조선 제일의 유원지’를 앞세우며 목욕 시설의 일종인 ‘조탕(潮湯)’을 비롯해 숙박시설을 개발했다. 부유층이 즐겨 찾아오는 공간이었다. 특히 호텔 앞에 바닷물을 가둬 만든 조탕은 전국 어디에도 없는 월미도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시설이었다.
1989년에 월미도 문화의 거리가 개장하고 마이랜드, 월미랜드 등 놀이시설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월미도는 지금도 수도권의 대표적인 관광지 역할을 하고 있다.
다만 서 대표가 기억하는 ‘1970~80년대 월미도’는 100년 전 일제강점기 시기와도, 현재와도 달랐다. 그러면서도 100년 전의 모습도, 현재의 모습도 일부 엿볼 수 있었다.
서 대표는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횟집만 10여 개 운영되고 있을 뿐 호텔이나 다른 시설들은 거의 없었다”면서 “일본인 관광객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했다.
1980년대는 경제 성장세가 이어지던 시기였지만 , 국내에서 여가 문화가 확산하기 전이다. 월미도 횟집에는 내국인 방문객보다 일본인 관광객이 많았다고 한다. 서 대표는 “일본인들은 회와 새우 등을 주로 먹었는데, 대부분 관광객이었기 때문에 씀씀이도 적지 않았다”며 “부모님이 횟집을 운영하면서 이전보다 확실히 집에 여유도 생겼다”고 했다.

일본인 방문객이 많다는 점이 일제강점기와 비슷하다면, 횟집이 많다는 점은 현대와 닮은 점이다.
1980년대 초 월미도 횟집에서 파는 횟감도 지금과는 달랐다. 당시 주요하게 판매됐던 어종은 민어, 우럭, 아나고(붕장어)였다고 한다. 인천 앞바다에서 주로 잡히는 어종이 횟집 상에 올라왔기 때문이다. 특히 인천은 1920~19330년대 ‘민어 파시’로 유명했다. 덕적도 해역을 중심으로 민어가 많이 잡혔고, 이를 구하기 위한 상인들이 줄을 이었고 이를 ‘파시’라고 불렀다. 통계청에 따르면 1928년 전국 민어 어획량은 9천t에 달했고, 이 중 절반이 인천에서 잡혔다. 이후 점차 줄어 1980년대에는 전국 어획량은 2천t으로, 인천은 200t으로 급감했다. 2020년대 민어 어획량은 4천t 수준으로 회복했으나, 대부분 인천이 아닌 남해에서 잡히고 있다.
서 대표는 “지금은 인천에서 민어가 거의 잡히지 않지만, 1980년대 초만 해도 민어가 많이 잡혔다”며 “지금도 민어는 귀한 생선이지만, 당시에도 월미도 횟집들은 싱싱하고 상태 좋은 민어를 공수하기 위한 경쟁이 심했다”고 했다.
횟집과 주거공간이 함께 있는 건물에서 생활한 서 대표는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월미도에는 횟집 외에는 다른 시설들이 많지 않았다고 했다. 지금은 호텔 등 건물이 들어선 자리에서는 밭농사 등이 이뤄졌다. 월미도 문화의 거리와 바다 사이에 쌓인 축대가 지금보다는 낮아 여름철에는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즐기는 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서 대표는 고등학생 시절 공부와 담을 쌓고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재수를 했는데, 이때 친구 형이 해준 조언 한마디가 그의 삶을 뒤바꿨다.
서 대표는 “재수 시절은 인생에 대한 계획조차 없던 시기였고, 친구 집에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것이 일과였다”고 했다. 그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친구 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친구의 형이 들어왔다고 한다. 해병대 장교였던 그 형은 “지금이 인생의 기초를 닦을 시기이고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할 때인데 형이 보기에는 너무 안타깝다”고 조언했다.
특별한 말은 아니었지만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때부터 삶이 달라졌다고 했다. 군인에 대한 동경이 생겼고, 대학 진학의 꿈을 얻었다. 그는 이듬해 경기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한 뒤에는 학사장교로 군 생활을 하게 됐다. 이 때 서 대표에게 이야기를 한 형님은 인천 법명사 주지스님이 된 선일 스님이다.
그는 “이때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고 생각한다”며 “지금 기업을 이끌고 있는 것도 이때 선일 스님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며 “지금도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했다.

서 대표는 대학 졸업 이후 인천에서 살다가 1992년 행사 전문 기획사인 맥커뮤니케이션(주)을 설립했다. 경기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한 그이지만, 학창시절 때부터 쌓은 여러 경험이 행사 기획자의 길을 걷게 했다.
그는 “국민학교(초등학교) 때부터 오락부장을 계속 맡아 왔다”며 “아이들과 노는 것이 좋아서 한 것이겠지만, 지금 보면 그 때 영향도 없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또 대학교 다닐 때에는 학교 체육대회를 주관했다. 그는 “각 학교 체육학과가 체육대회를 주관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응원단 구역을 정하고, 각종 운동 경기하는 공간을 구획했다. 또 예산을 집행하고 각 과 대표들과 소통하며 의견을 조율하는 역할도 했는데, 이러한 활동들이 행사 기획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첫 사회생활을 대구 주류업체인 ‘금복주’에서 시작했다. 금복주가 전국으로 사업영역을 확장하려 했고, 자신은 인천지사에 배치돼 영업직으로 일했다. 일을 하긴 했지만 직장생활을 지속해 다니는 것이 쉽지 않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는 “아직도 기억나는데 1992년 대전엑스포 마스코트인 꿈돌이를 지하철에서 보게 됐다”며 “이때 꿈돌이 행사와 관련한 사업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사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때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부모님이 횟집을 운영하고 있어, 가계가 여유로운 측면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같은 해인 1992년에 (주)맥커뮤니케이션을 설립했고, 이듬해 대전엑스포 우주탐험관 운영을 맡는 성과를 내는 데 성공했다.
서 대표는 이때 행사를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우주탐험관에 300여 명 안팎의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 화장실이 충분치 않았는지 한 분이 사람들이 대기중인 공간에서 대변을 싸고 가버렸다”며 “제가 운영을 맡은 행사이기도 하고, 직접 봤기 때문에 해결해야겠다 싶어서 셔츠 안에 옷을 찢어서 치웠다”고 했다. 당시 누군가 이 모습을 사진에 찍어 일부에 알려졌고,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맥커뮤니케이션은 이 시기부터 대통령 행사를 시작했다. 김영삼 대통령 때는 1차례 행사에 그쳤지만, 이후엔 10차례 이상 대통령이 참여하는 행사를 운영했다.
그가 오랜 기간 이 분야에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기반은 ‘성실함’이었다. 서 대표는 “무슨 행사든 최선을 다한 것이 좋은 결과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과거 디지털 파일이 없을 때에는 사업 주최 측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안 등을 요구하기도 했는데 거리가 먼 곳이면 택시를 타고 가 내용을 전달하기도 했다”고 했다. 이어 “지금은 기술이 발달해 일하는 방식은 많이 바뀌었지만, 일을 대하는 마음을 이전과 다르지 않다”고 했다.
그는 행사 기획을 천직으로 여긴다. 서 대표는 “밤낮을 가리지 않아야 하는 힘든 일”이라면서도 “제가 기획한 연출안이 채택되고, 행사를 진행하면서 참석자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해진다. 매일 긴장 속에 살지만 즐거움과 보람이 큰 일”이라고 했다.
맥커뮤니케이션은 설립 이후 국내외 민간기업 행사를 맡기도 했지만, 공공기관 행사를 주력으로 했다. 이 중에서도 대통령이 참여하는 VIP 행사 운영에 최적화돼 있다.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전 대통령이 참여하는 행사를 맡았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 행사 운영을 맡기도 하는 등 VIP 행사에 있어서는 노하우를 확보하고 있다.
맥커뮤니케이션이 최근까지 맡은 대통령 행사는 모두 285차례에 이른다. 국내 뿐 아니라 해외에서 진행된 행사도 많다. 이는 국내 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다. 이에 지난해엔 250회 대통령(국가원수) 행사를 대행한 것이 세계기록위원회(World Record Committee·WRC)로부터 세계 신기록으로 인증받았다. 앞서 2022년엔 한국기록원(KRI)에서 한국신기록 인증을 받았다. 이때는 대통령 참석 행사를 200회 대행했을 때다.

서 대표는 “대통령마다 전하는 메시지에 차이가 있다”며 김대중 대통령 메시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했을 때에는 외환위기 직후라 어려움이 컸을 때였다”며 “김대중 대통령은 ‘애국자’라는 표현을 자주 했고,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심어주면서도 호소하는 표현을 많이 했다”고 했다. 이어 “그러한 방식으로 국민들의 호응과 참여를 이끌어내는 데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대통령 행사 뿐 아니라 국무총리 등이 참여한 행사는 1천 회 넘게 맡아 운영하는 등 이 분야에 특화돼 있다. 1992년 설립 이후 30년 넘게 정부 행사를 진행했고, 이 과정에서 북한에도 150차례 다녀왔다고 했다.
서 대표는 “개성공단 입주기업 준공식 등의 행사를 여러 번 맡아서 진행하다 보니 사전 답사와 행사 준비 등을 위해 북한을 150차례 오갔다”고 했다. 이어 “개성 뿐만 아니라 평양 등도 오갔는데, 부모님이 실향민이기 때문에 부모님 고향인 황해도 서흥과 가까운 지역에서 아주 조금 흙을 가져왔는데 부모님이 좋아했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말했다.

맥커뮤니케이션이 오랜 기간 성과를 지속할 수 있었던 데에는 ‘기록’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맥커뮤니케이션은 설립 이후 지금까지 진행한 모든 행사에 대한 기록이 사무실에 남아 있다. 행사 한 개당 수백 페이지에 이르는 기록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남겨두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도 과거 진행했던 행사의 내용을 찾는 데 어려움이 없다. 이는 메모하는 습관과 독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서 대표는 “대학교 때부터 많은 책을 읽었고, 항상 메모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며 “지금도 다이어리에는 그날 일정 등에 대한 메모를 빼곡히 해놓는다. 이 다이어리도 수십년 간 모아두고 있는데, 이 것만 보더라도 제가 1년 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서 대표는 중학교 다닐 때 만화를 좋아했던 것이 독서 습관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공부는 하지 않았지만, 어렸을 때 만화책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며 “대학교에서 가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어릴 때 습성 때문인지 책을 읽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는 인천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형제들이 인천에서 살고 있다. 정부, 대통령실 주관 행사는 1천회 넘게 했지만 정작 인천시가 주관하는 행사는 한 차례도 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서 대표는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열리는 정부, 공공기관 행사는 많이 맡아서 운영했지만, 인천시 주관 행사는 운이 없었는지 한 차례도 진행하지 못했다”며 “기억에 남는 것은 90년대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당이 인천 도원체육관에서 ‘필승결의대회’를 진행했는데 3개 당 행사는 모두 제가 맡아서 운영한 적은 있다”고 했다.

그는 모든 형제들이 인천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특히 아버지가 운영하던 월미도 횟집은 형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지금 거주지는 서울이지만 인천을 자주 찾는다.
그는 “제가 살았던 인천과 지금의 인천은 많은 차이가 있다”며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고, 특히 인천항과 인천국제공항을 토대로 인천은 성장가능성이 매우 큰 도시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이어 “행사 기획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인천에서 추진하고 있는 APEC 정상회의를 유치하게 되면 인천의 위상은 더욱 올라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며 “이와 함께 인천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역사문화적 자산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