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 전세사기 기록: '행복'계약서에 속다·(上)] 행복마을 사람들
관리업체 감감무소식에 입주민 대책회의
전셋집 잇단 경매통지서에 다급해진 마음
1년6개월간 쫓겨나거나 삶의 끈 놓기도
인천 미추홀구에서 수백억원대 전세사기 행각을 벌인 일명 '건축왕' 남헌기(62)에게 보증금을 떼인 청년 등이 신변을 비관해 잇따라 세상을 떠난 지 어느덧 1년이 됐다. 건축왕이 지은 아파트와 빌라 등 수많은 건물 이름에는 역설적이게도 '행복'이란 단어가 많이 쓰였다.
이 사건이 불거진 뒤 1년 6개월여 동안 경인일보 기자들은 피해자들을 만나 보고, 듣고, 겪은 것을 기록했다. 희생자 1주기 추모제에 맞춰 그동안 독자들에게 미처 전하지 못한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벼랑 끝 삶과 이를 지켜본 기자들의 못다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천 미추홀구청에서 숭의오거리 방향으로 5분 정도 걷다 보면 '행복마을' 1단지가 나온다. 전셋집 보증금 시세는 8천만~1억원 정도로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 경인전철 1호선 제물포역과 가까워 서울로 출퇴근하기도 좋다. 버스를 타고 조금만 가면 아이들이 다닐 만한 학교들도 있다. 1단지 말고도 행복마을에는 이런 단지가 수십 개 있다. 가구수로만 보면 2천700여 가구에 달한다.
행복마을 1단지는 60가구가 사는 작은 아파트다. 도심 여느 단지처럼 이웃 간 왕래가 적고 층간소음 등으로 소소한 갈등도 있다. 청년부터 신혼부부, 노인가구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것조차 어색했던 입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인 건 2022년 8월 여름이다. 6월부터 이어진 장마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고치겠다"고 했던 아파트 관리업체는 한 달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걸어서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리던 주민들은 단단히 뿔이 났다.
'채팅방을 만들었으니 의견을 나눕시다'. 현관문 앞에 붙은 안내문을 보고 주민 60여 명이 속속 카카오톡 채팅방에 입장했다. 주민들은 약속한 날 밤 옥상에서 대책회의를 열었다. 주민 여럿이 모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어색한 공기를 바꾼 건 전단지를 붙인 505호 선호(가명)였다.
"일단 사비로 수리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최대한 저렴하게 견적을 받아볼게요." 기계설비 일을 한다는 304호 우석(가명)의 제안에 입주민들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날 다 끝내지 못한 이야기는 채팅방에서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505호 선호가 "경매 통지서 받으신 분은 없나요?"라고 물었다.
"어! 저희도 받았어요." 비슷한 답글이 줄줄 나왔다. 1단지 집들은 앞서 3월부터 경매에 넘어갔다. 하지만 주민들은 고장 난 엘리베이터로 모임을 가진 뒤에야 전셋집 대부분이 경매에 넘어갔단 걸 알았다. 주민들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서둘러 무슨 상황인지 알아봐야 했다.
인터넷을 뒤지다 행복마을 다른 단지 주민들이 만든 단체 채팅방을 발견했다. 상황은 판박이처럼 똑같았다. 행복마을 집들이 속속 경매에 부쳐지고 있었다. 전셋집 주인들이 모두 가짜인 속칭 '바지 임대인'이고, 진짜는 따로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결론은 점점 한 방향을 가리켰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집이 경매에서 낙찰되면 많은 세입자가 돈을 한 푼 받지 못하고 거리로 쫓겨날 처지였다. 1단지 주민들은 머리를 맞댔다. 1102호 병호(가명)가 나서 주민대표를 자처했다.
그는 옆 단지 대표들과 함께 국회, 인천시청, 인천경찰청 등을 찾아다니며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다른 주민들은 전세사기 피해 사실을 알리는 현수막을 만들거나 법률 자문을 받으며 정보를 모아갔다.
뒤늦게 안 사실인데 아파트 관리업체도 전세사기 일당과 한통속이었다. 주민들이 항의차 관리비를 내지 않자 전기와 수도를 끊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엘리베이터 등 시설은 고장 난 채로 방치됐다. 쓰레기조차 치워지지 않았다. 행복마을 1단지는 점점 엉망이 됐다.
'흡연은 지정된 장소에서만 해주세요', '분리수거는 철저히 부탁드립니다'. 행복마을 1단지 주민들은 하나하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다 보면 언젠간 예전의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거라 믿었다. 서로 의지하며 버티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벌써 1년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주민들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1단지 세입자 절반은 경매에 집이 넘어가 쫓겨났거나 빚을 내 다른 아파트로 이사 갔다. 전세보증금을 떼인 청년 등 행복마을 주민 4명은 잇따라 삶의 끈을 놓았다.
빈집은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졌다. 1단지를 지키기 위해 주민들이 한 약속들은 흐지부지됐다. 비상계단이나 복도에선 담배 냄새가 다시 풍겼다. 분리수거장에는 쓰레기가 너저분하게 뒹굴었다. 행복마을 1단지 현관문 앞에는 '이곳은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입니다'라는 스티커 등이 여전히 덕지덕지 붙어 있다.
/기획취재팀
→2편에서 계속 (생이별 당한 세가족, 누가 그들의 '일상'을 앗아갔나)
※기획취재팀=변민철·백효은 기자(인천본사 사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