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 전세사기 기록: '행복'계약서에 속다]

 

명의 신탁해 대출… '돌려막기식' 임대
'제도적 문제' 10년 전에도 유사한 사례
 

'건축왕' 남헌기

2024022701000278600027641

남헌기(62). 그 사람이 부동산 사업에 손을 댄 건 2010년대 초반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천 미추홀구 주안 등지에서 경매에 싸게 나온 집들을 사들이기 시작했어요. 그런 집을 세놓고, 그러다 돈이 모이면 대출을 받아 직접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2천700여개에 달하는 집이 그 사람 소유입니다. 물론 모두 본인 명의는 아니죠. 명의를 신탁해 은행 대출을 최대한 끌어왔어요. 명의를 신탁한 사람에게는 대출금의 1% 정도를 보상으로 지급했습니다.

이런 집들을 소개하고 중개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습니다. 50여 명이 조직적으로 움직였어요. 부동산 중개 애플리케이션이나 인터넷 사이트에 공격적으로 집을 홍보했습니다.

사통팔달이라고 하죠. 특히 미추홀구는 교통 요지에 학교도 많고, 주위 시세보다 저렴하고. 나름 매력적이죠. 근데 집에 근저당이 잡혀 있어서 세입자가 계약을 꺼릴 때가 있어요. 그럼 공인중개사가 경매에 넘어가더라도 보증금을 대신 갚겠다는 이행각서를 써줍니다. 하지만 이 각서는 법적 효력이 없어요. 세입자는 그냥 공인중개사를 믿고 계약하는 거죠. 나라에서 공인한 사람이 사기를 칠 거라고 누가 생각하겠어요.

사실 부동산을 조금만 알아도 구조가 이상하다는 게 바로 보이거든요. 자기 자본 없이 전세보증금에 은행 대출을 더해서 집을 짓고 임대사업을 하는 구조입니다. 카드 돌려막기식으로 이 집 보증금으로 저 집 보증금을 갚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공인중개사들도 돈의 유혹을 못 참았던 거죠. 계약을 마치면 성과급을 주니까요. 보기엔 이상했어도 '설마 큰일 나겠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이런 구조의 임대사업은 비싼 아파트로는 못해요. 시중은행에 한도가 1억~2억원 수준인 전세대출 상품이 많고, 또 그런 상품을 이용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이런 집을 찾는 사람들은 다 평범한 서민들이에요.

어떤 사람들은 이 구조를 모르니까 "세입자들이 멍청해서 사기를 당한 것 아니냐"고 말하죠. 하지만 누구나 걸려들 수 있습니다.

82022.jpg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 관계자들이 10일 오전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검찰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세사기 공모자 전원의 범죄단체 조직죄 적용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경인일보DB

남씨는 이렇게 집을 늘려나가다 언젠간 집을 모두 매각할 계획이었을 거예요. 아마 그 시점은 집값이 크게 올랐을 때겠죠. 근데 미추홀구에서 금광이 발견되지 않는 이상 집값이 크게 뛰긴 힘들거든요.

결국 언젠간 터졌을 겁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이자가 오르고 자금이 경색되면서 조금 빨리 터졌을 뿐이에요. 10년 전에도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던 일은 꽤 있었거든요. 근데 이게 남씨만의 문제는 아니에요. 나라는 부동산 개발하라고 대출 규제 완화해주고, 은행은 집 짓는다고 하면 쉽게 대출을 해줬거든요. 우리 같은 사람은 그걸 이용만 하면 되는 거예요. 이런 대한민국에선 '건축왕'이 아니고 '건축황제'도 나올 수 있을 겁니다.

 

※ 경인일보는 한때 '건축왕' 남헌기 일당과 함께 일했던 익명의 제보자를 인터뷰해 남씨가 선량한 서민들을 상대로 어떻게 사기 행각을 벌였는지 구체적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남헌기는 서울 강남 등에서 컴퓨터 학원 등을 운영하다 2010년께 부동산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인천 미추홀구 등지에 아파트와 빌라 등 2천700여 가구에 달하는 공동주택을 지었다. '건축왕'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이유다.

남씨 일당이 빼돌린 전세보증금은 검찰에서 현재까지 확인한 것만 총 430억원(533가구)에 달한다.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대책위원회가 파악한 남씨 사건의 피해 가구는 총 2천753가구, 보증금으론 약 2천억원이다. 아직 드러나지 않은 피해가 많다는 의미다. 남씨 일당에게 전세보증금을 떼인 20~30대 청년 등 4명은 지난해 세상을 등졌다.

/기획취재팀


→5편에서 계속 ('집 밖에' 내몰린 생존권… '법 밖에' 놓인 아픔 보듬다)


※기획취재팀=변민철·백효은 기자(인천본사 사회부)


20240227010002786000276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