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 전세사기 기록: '행복'계약서에 속다·(中)] 1년 6개월의 기록


'건축왕' 남헌기 재판 308일만에 1심 선고
피해자 안타까운 사연·호소 곳곳 눈물바다
법정 최고형에도 이례적 '개정 입법' 역설
"판사님, 우리 이해해주신듯" 뜻밖의 위로
 

118쪽짜리 판결문

빨리 오세요! 곧 시작해요

2024년 2월7일. 인천지법 324호 앞에 취재진이 몰렸다. 인천 미추홀구 '행복마을'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 수백억원을 앗아간 '건축왕' 남헌기(62)의 1심 선고 재판이 열린 날이다.

전세사기 피해자인 주민들이 법정으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기자를 유독 반겼다. 이 사건이 불거진 뒤 1년6개월여 동안 피해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지역신문 기자가 혹시라도 인파에 밀려 재판을 보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했던 것이다. 법정 경위가 재판 전 취재진 자리를 안내하자 주민들이 "기자님이 제일 먼저 들어가셔야죠"라며 등을 떠밀었다.

취재진과 주민들로 법정은 가득 찼다. 재판장인 오기두 판사와 연녹색 수의를 입은 남헌기 등 일당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자 고요했던 법정의 정적은 깨졌다.

이날 재판의 쟁점은 1차 기소된 남씨 사건에 대한 사기죄 인정 여부였다. 남헌기 일당은 행복마을 주민 191명을 속여 전세보증금 148억원을 가로챈 혐의로 법정에 섰다.

이 재판은 봄비가 거셌던 2023년 4월5일부터 장장 308일간 이어졌다. 남헌기 일당의 거듭된 증인 출석 요구에 주민들도 생계를 뒤로하고 50차례 넘게 법정에 불려 나와야 했다.

정년퇴임을 앞둔 오 판사는 그동안 재판에 출석한 피해자들의 호소와 사연들을 하나하나 읽어 나갔다.

'법의 날'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됐어요. '법은 어렵지 않아요. 법은 우리를 도와줘요' 이런 노래 가사가 나와 있습니다. 지금같이 제가 제 돈을 찾지 못한다면 60이 넘은 나이에 은행 빚을 5천만원을 갚아야 하는데 그것을 갚지 못하면 저 역시 앞서간 세 사람, 네 사람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 피해자 A씨
우리는 365일 야간작업을 하는 사람입니다. 월급이 200만원이 안 됩니다. 이자 내고 생활하려면 너무 힘이 듭니다. 그런데 이 전세사기를 당하고 나서 아무것도 못하고 있습니다. 작년에 딸 결혼식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습니다. 저희는 자살시도까지 했습니다
- 피해자 B씨
어제 저희 딸이 '엄마, (피고인들 때문에 생긴) 내 빚이 1억원이나 되는데 내가 남자친구가 생기면 (내가 이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얘기를 해야 할까? 나 결혼은 할 수 있을까?'라고 물었습니다. 공인중개사, 집주인, 그 집주인 위에 있는 사람, 다 한통속이 돼 사람의 일상을 이렇게까지, 그냥 편안하게 살고 있는 내 삶을 이렇게까지 흔들어도 되는 겁니까?
- 피해자 C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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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미추홀구 '행복마을' 2단지에 사는 호준(가명)은 세입자들의 전세보증금을 가로챈 '건축왕' 남헌기 일당의 1심 선고 재판 날 '다시 시작된 경매를 한번 더 미뤄달라'는 탄원서를 법원 경매계에 냈다. 호준의 사연은 7편에서 이어진다.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차분한 어조로 사연들을 모두 읽은 오 판사는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시 판결문을 읊어나갔다. 방청석 여기저기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먹는 것, 입는 것과 더불어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 조건 중 하나인 집에서 평온하게 거주할 권리는 실정 헌법이 부여하는 기본권을 넘어선 일종의 천부인권이라고 해야 한다. 이 법원도 형을 정함에 있어 기본권 보호의 관점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런데 법원은 국회가 만든 법률에서 정한 그 처단형 이상의 형을 선고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이 법원은 입법부에서도 이 사건과 같은 집단적 사기 범죄에 적절한 구성 요건과 처벌 정도를 정한 법률을 제정해 줄 것을 제안한다."

오 판사는 선고에 앞서 이례적으로 사기죄 형량에 대한 개정 입법 필요성을 이렇게 역설했다. 그러면서 남헌기에게 현행법상 사기죄 최고형인 징역 15년을, 일당 9명에겐 각각 징역 4~13년을 선고했다.

전세사기 주범 남헌기에게 법정 사기죄 최고형이 내려졌으나 평온하던 일상을 송두리째 빼앗긴 행복마을 주민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씁쓸했다. 그런데 판결 직후 한 주민이 기자에게 뜻밖의 말을 건넸다.

"판사님이 우리를 이해해주신 것 같아 감사하죠." 행복마을 주민들의 상처받은 마음을 보듬어준 이례적인 판결문이 그들에게 담담한 위로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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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팀

→6편에서 계속 (마음속 깊게 파인 홈(Home)… 벼랑끝 사투는 '현재진행형')

※기획취재팀= 변민철·백효은 기자(인천본사 사회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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