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추홀 전세사기 기록: '행복'계약서에 속다]


작년 5월 국회서 제정후 경매 중단·우선매수권 부여
LH 매입후 거주·저금리 대출·분할 상환 마련됐지만
드러난 허점에 피해자들 발걸음 여전히 국회로 향해

신용도에 발목잡히고 설계도면 달라 공공매입 불가 등
생활고·빚더미 갇힌 이들 도와줄 '先구제 後회수' 원해
여야 합의 불발에 개정안 표류… 국토부 반대 입장 표명

특별하지않은법

2024022901000317900031861
전국에서 발생한 전세사기 사건의 수많은 피해자 가운데 첫 번째 희생자인 인천 미추홀구 '행복마을' 요셉(가명)의 1주기 추모제가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렸다. 한 참석자가 '집은 인권이다! 전세사기 없는 사회 함께 만듭시다'라고 적힌 손 피켓을 들고 있다. 2024.2.24 /조재현기자 jhc@kyeongin.com

서울 여의도 국회로 취재를 갔을 때 일이다. '전세사기 특별법'이 시행된 지 5개월 만인 2023년 11월21일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 방안 모색을 위한 전국 피해자 간담회'가 열렸다. 전세사기·깡통전세 전국 대책위원회가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야당 의원들에게 제안해 성사된 자리다. 평소 자주 보던 인천 미추홀구 '행복마을' 주민들도 왔다.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켰다. 빼곡하게 앉은 참석자들 사이로 '국토교통부' 명패가 놓인 빈자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해당 부처인 국토교통부 관계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게 그저 의아했다. 기자와 달리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그 상황이 익숙한 듯했다.

앞서 그해 2월8일 국회에서 열린 '미추홀구 깡통전세 피해 대책 마련을 위한 긴급 토론회'에선 이런 일도 있었다. "한시가 급하다. 경매를 멈춰달라"는 피해자들의 절규에 당시 참석한 국회 법원행정처 관계자는 "개별 법정의 독립성을 침해할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국토부를 대표해서 나온 고위 공무원도 "전세사기 피해 아파트를 직접 매입해달라"는 요구에 "검토해보겠다"는 말만 했다.

전국의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틈이 날 때마다 국회를 찾아갔다. 토론회, 간담회, 기자회견, 천막 농성….

현행법으로는 피해를 회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특별법을 만들어 주세요

이들의 요구는 한결 같았다.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 주범인 '건축왕' 남헌기(62) 일당에게 속은 행복마을 주민들에겐 특별법 제정만이 유일한 살길이라고 믿었다. 그해 2월부터 삶을 비관한 20~30대 청년 등 4명을 잇따라 떠나보낸 이들이었다.

인천 등 전국에서 희생자들이 속출한 뒤인 2023년 5월 국회는 '전세사기 특별법'을 제정했다. 이 법으로 경매는 잠시 중단됐다. 경매가 다시 시작되면 세입자가 살던 집을 먼저 낙찰받을 수 있는 권리인 '우선매수권'도 만들어졌다.

세입자가 넘긴 우선매수권으로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경매에 나온 해당 전셋집을 사게 되면 세입자는 쫓겨나지 않고 월세를 내며 거주할 수 있는 방법도 생겼다. 저금리 대출 상품과 10~20년 동안 기존 전세대출을 나눠 갚을 수도 있게 됐다.

그런데도 행복마을 등 전국의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국회로 향했다. 국회가 제정한 전세사기 특별법과 이를 토대로 정부가 내놓은 지원책들이 곳곳에서 허점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본문에_넣을거.jpg
전국에서 발생한 전세사기 사건의 수많은 피해자 가운데 첫 번째 희생자인 인천 미추홀구 '행복마을' 요셉(가명)의 1주기 추모제가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보신각에서 열렸다.

하루 종일 은행을 돌면서 특별법 대출 상담을 받았어요. 전세보증금을 마련하면서 받은 신용 대출의 이자가 밀려 신용도가 이미 떨어질 대로 떨어져서 대출을 받을 수 없다고 해요. 은행 직원이 안 된다며 저를 다그치는데 무안해서 눈물이 다 났네요. 도움을 받으러 온 피해자인데 죄지은 사람 취급을 받아야 하니 순간 너무 서럽더라고요
- 행복마을 6단지 주민 미경(40·가명)
특별법으로 생긴 '우선매수권'을 써서 집을 낙찰받을까 고민 중입니다. 몇 차례 가격이 떨어지면 경매에 참여하고 싶은데 혹시 이 집을 사려는 다른 사람이 경매에 참여할까 걱정입니다. 1차 경매에 다른 사람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우선매수권 사용을 취소하고 2차 경매에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건지 어디에 물어봐야 하나요? 낙찰보증금도 내야 하는데 그건 대출이 안 된다네요
- 행복마을 2단지 주민 호준(43·가명)
누가 전셋집을 구할 때 설계도면까지 확인하나요. 특별법 공공매입임대 신청을 하려고 했는데 집 구조가 설계도면과 달라 공공 매입은 불가하다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기댈 곳은 특별법이 유일했는데….
- 행복마을 4단지 주민 현오(36·가명)

행복마을 주민들도 저마다 다른 이유로 특별법의 도움을 온전히 받지 못했다. 반년마다 법을 보완해 나가겠다던 국회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간절히 바라던 특별법은 이런 게 아니었다. 이름만 특별법이지, 이들에겐 전혀 특별하지 않았다. 집주인에게 떼인 전세보증금의 채권을 공공(주택도시보증공사 등)이 먼저 사서 한날한시가 급한 피해자에게 보증금 일부를 주고, 공공이 그 채권을 적절한 시기에 되팔아 비용을 회수하는 정부 정책을 피해자들은 원했다.

이걸 '선(先) 구제 후(後) 회수'(선 구제 후 구상) 방안이라고 한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전세보증금을 빼앗긴 채 생활고와 빚더미에 갇혀버린 이들을 시급히 구제하고, 여기에 투입한 예산을 정부가 회수하는 방식이다. → 표 참조

2024022901000317900031862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이런 요구가 담긴 전세사기 특별법 개정안은 국회에서 여야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지난 27일 야당 단독으로 국회 본회의에 넘겨졌다. 국토부는 이날 입장문을 발표해 "수조원 규모의 국민 혈세가 투입되고 상당한 금액을 회수하지 못한다"며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현재 시행 중인 전세사기 특별법의 유효기간은 2년이다. 2025년 6월1일이 되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이 특별법조차 사라진다.

/기획취재팀

→ 10편에서 계속 (범죄가 만든 터전, 속아서 무너진 일상… '당신 잘못이 아니다')

※기획취재팀=변민철·백효은기자(인천본사 사회부)


2024022901000317900031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