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유독 평범하게 사는 일, 보통 사람으로 사는 일에 인색합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야 할 것 같고 특별한 장소를 가야 할 것 같으며 특별한 사람과 함께 해야 인생을 ‘잘’ 살고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나의 SNS에 그 특별함을 게시하고, 남의 SNS에 게시된 특별함을 소비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보내죠. 물론 평범한 건, 지루할지도 모릅니다만,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들이 쌓여야 특별하다고 느낀 ‘하루’가 만들어집니다. 때로는 평범함들이 모여 특별한 역사를 만들기도 합니다. 평범이 없다면, 특별도 없는 셈이죠.
세간을 뒤흔드는 사건과 경기도·인천의 특별한 이슈의 ‘과거’를 찾아 떠났던 레트로K가 시즌2 ‘보통의 역사’로 다시 시작합니다. 79년 경기도·인천 대표 정론지 경인일보의 기록 속에 숨겨 둔 ‘보통의 일상’을 공개합니다.
우리의 기록과 함께 경인일보 독자들이 간직해 온 보통의 추억도 공유합니다. 평범한 일상이 깃든 공간도 좋고 소중한 추억 속 만남의 장소도 좋습니다. 그 시절 보통 사람들이 살았던 일상의 이야기도 환영합니다. 레트로K 기사의 댓글로 참여해도 좋고 경인일보 페이스북·인스타그램·네이버포스트 레트로K 게시물, 카카오톡 제보를 통해 여러분의 추억을 제보해 주세요. 자, 지금부터 ‘보통 사람’ ‘평범한 일상’ ‘소중한 추억’을 찾아 출발합니다.
“어디서 볼까”
“일단, 남문 중앙극장 앞에서 보자”
수원에 살았거나 화성, 오산 등 경기 남부 도시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이 누군가 만나야 한다면 두말 않고 외치던 그곳. 전국에서 서울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사대문이 있는 도시, 그중에서도 팔달문을 중심으로 경기남부 최고의 상권이 형성됐던 수원 ‘남문상권’ 한가운데, 중앙극장이 있었습니다.
수원 중앙극장은 수원에선 세대를 불문하고 가장 ‘핫’했던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1952년에 수원남문 상권 중심부에 가건물을 지어 시작한 수원 중앙극장은 1960년대 조금씩 위상이 높아졌고 1970년대, 80년대 초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2009년 폐업까지 수원 대표극장의 명맥을 지켜왔습니다. 한국전쟁 직후에 설립된 수원 중앙극장은 초기엔 수원 최초의 극장이었던 ‘수원극장’에 밀려 삼류 극장으로 취급받았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수원 근현대사를 연구해온 한동민 수원화성박물관 관장은 당시 수원의 극장을 두고 ‘TV가 없던 시절, 보통 사람들의 유일한 문화여가생활’이라고 말했습니다.
“중앙극장은 영화를 보는 곳이기도 하지만 수원사람들의 만남의 장소였어요. 삼성전자 월급날이 되면 중앙극장 앞은 사람이 밀어터질 정도로 많았습니다. 그뿐인가요. 특히 명보관 같이 서울 주요 극장들보다 수원 중앙극장이나 수원극장 영화 티켓이 훨씬 쌌어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못한 서울 시내 대학생들의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했습니다. 서수원에 있는 서울 농대 인근 딸기밭에서 놀다가 버스 타고 남문 중앙극장에 와서 영화 보고 남문 시장 먹거리를 즐기는 게 대표적인 데이트 코스였죠.”
당시 수원에는 중앙극장보다 앞서 1920년대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수원극장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설립된 수원극장은 그야말로 우리 민족의 애환이 고스란히 묻어있죠. 지금의 수원중·고등학교의 전신인 수원상업강습소 학생들의 학비마련을 돕기 위해 수원 기생들이 수원극장에서 자선공연을 펼쳤다는 기록이 있고, 일제의 수원헌병분대와 수원수비대가 해산을 앞두고 수원극장을 빌려 송별연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후 1930년대 지금의 수원 교동사거리로 자리를 옮긴 수원극장은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 연면적 160평 규모의 적벽돌 조적조 건물을 새로 지어 수원의 극장 전성시대를 열었습니다. 영화 상영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열렸지만 해방 후에는 이념으로 두 쪽 난 한반도의 역사처럼 각종 정치행사들로 점철되기도 했죠. 하지만 1952년 팔달문 인근(팔달로2가 126번지), 영동시장 등 남문 상권의 중심에 중앙극장이 등장하며 독점적 인기를 누리던 수원극장의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중앙극장이 수원극장을 제치고 전성기를 맞이한 데는 교통이 편리한 ‘입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원 전역과 화성·오산 등 인근 도시를 잇는 이른바 황금노선 버스들이 팔달문 로터리 정류장을 지나는 지점에 중앙극장이 자리했기 때문이죠. 특히 1973년에 삼성전자가 수원 영통지역에 본사를 이전하면서 중앙극장, 그리고 남문상권의 ‘활황’이 본격화됐습니다. 삼성전자 직원들의 월급날이 되면 중앙극장 앞에 ‘만남’ ‘회식’을 즐기려는 사람들이 몰렸고 남문상권은 밀려오는 손님에 문전성시를 이뤘다고 합니다. 더구나 1980년대 초, 전두환 정권이 야간 통행금지를 해제하면서는 밤새 술 먹고 놀 수있는 자유를 만끽하려는 젊은이들로 남문상권은 말 그대로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는 최고의 시절을 누렸죠.
1975년에 남문에 문을 연 한일레코드 사장님은 당시를 생생히 기억합니다. “저는 그 당시엔 남문 다른 가게에서 일을 해서 잘 기억해요. 정말 남문상권의 황금시대였습니다. (월급날이면) 삼성전자 사원들이 봉투를 들고 찾아왔어요. 그때는 남문 길거리에서 노점상만 해도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다고 할 정도였죠. 실제로 노점상이 150~200개 정도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도매시장에 가서 수원 남문에서 왔다고 하면 큰 손님 왔다고 대접할 정도로 전국 1등 상권 중 하나였어요. 예전에는 변진섭같이 인기 많은 가수들 신보가 나왔다 하면 교복 입은 학생들이 몇 십 m씩 줄을 서서 기다렸어요. 주변 상인들이 장사에 방해된다고 항의할 정도였어요. 적어도 2000년대 초반까진 장사가 그럭저럭 잘 됐죠.”
지금도 수원영동시장에서 타월 가게를 운영하는 이봉우 사장님은 당시 남문상권을 두고 지금의 서울 동대문 상권과 같은 곳이었다고 회상합니다. “의류직물 도매시장의 메카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특히 포목점 같은 곳들이 활성화됐죠. 당시 주택 가격이 280~380만원 할 때인데, 하루에 100만원씩 벌기도 했으니까요.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도 총알택시를 타고 배달할 정도로 거래가 활성화됐던 곳이었죠.”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수원깍쟁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남문상권에도, 그리고 잘나가던 중앙극장에도 내리막이 시작됐습니다.
바로 ‘동수원 개발’이 시발점이었죠. 논밭만 있던 허허벌판 동수원에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남문상권 주변에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살며 수원에서 돈 있는 부자들의 자녀들이 하나둘씩 동수원에 개발되는 아파트로 옮겨가고, 큰 회사들이 자리를 옮겨 고층건물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사람과 돈이 동수원에 몰려드니 자연스레 상권이 형성되기 시작했죠. 중앙극장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수원 개발로 남문에 사람이 몰리지 않은 탓도 크지만 중앙극장을 비롯해 오래된 남문 상권엔 ‘주차장’이 있는 건물이 거의 없었습니다. 황금노선이 지나가는 대중교통의 요충지였지만 ‘마이카’ 시대엔 무용지물이었죠.
한동민 관장은 대규모 자본의 유입, 시대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한 패착이 중앙극장, 남문상권의 도태를 야기했다고 말합니다. “남문은 일단 땅값이 높고 공간도 부족해서 주차장을 만들지 못해요. 특히 이 점은 동수원이 개발되는 시점엔 큰 약점으로 작용합니다. 대형 자본이 동수원 쪽 지대가 싼 곳에 대형 쇼핑몰을 세우죠. 이때 상당수 가정에 자가용이 있는, 마이카 시대까지 도래하는데 남문에 가도 주차할 데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 동수원에 있는 대형 쇼핑몰로 가서 편하게 밥도 먹고 소비도 하죠. 여기에 극장도 대규모 자본이 세운 멀티플렉스가 유행하면서 완전히 뒷전으로 밀리게 됩니다.”
이같은 현상은 한때 ‘화춘옥’ ‘삼부자갈비’ 등 남문상권을 주름잡던 갈빗집들이 땅값이 싼 동수원으로 옮겨 너른 땅에 큰 전원주택 같은 대형 갈빗집으로 변신하는, 이른바 ‘가든형 갈빗집’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고 알려집니다.
이렇게 수원 중앙극장의 흥망성쇠는 가깝게는 수원남문상권의 역사와도 맞물려 있고 멀리 보면 수원 개발의 역사와도 연결돼 있습니다. 중앙극장은 2009년에 문을 닫은 이후 건물은 그대로 남았지만 병원, 미용실 등 다른 업종들이 영업 중입니다. 곳곳에 공실도 눈에 띄고요. 수원극장은 1999년에 폐업한 이후 그 건물에 한복점이 들어섰지만 현재는 이마저도 그만둔 채 비어있는 상태입니다. 내부는 바뀌었지만 건물의 뼈대는 1930년대 지어진 그대로라, 건물이 지닌 역사적 가치를 고민해 봐야 할 시점이기도 합니다.
중앙극장, 그리고 남문상권은 수원을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공간입니다. 오랫동안 수원에 뿌리내린 경인일보도 한때는 남문에 본사를 두고 왕성한 취재활동을 해왔죠. 그래서 경인일보에는 수원에서 나고 자란 기자들도 많습니다. 남문상권을 활발히 오가던 그들의 젊은 시절 추억을 전해드립니다.
1970년대~1990년대까지 수원 남문은 수원사람들에겐 뭐든지 다 할 수 있는 ‘만능’이었어요. 그 시대를 풍미했던 사람으로 정말 추억이 많죠. 친구들과 주로 코끼리만두, 남문백화점 지하1층에 있던 분식집에 자주 갔었고, 가족들과 레스토랑 ‘가무’에서 외식을 하기도 했어요.
남문은 2층건물이 많은데 2층에 있던 커피숍을 많이 다닌 기억이 나네요. 전화기도 공짜로 쓸 수 있어서 좋았고 당시엔 파르페가 유행이었거든요. 특히 고등학교 연합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남문 카페에서 일일카페를 많이 했는데 쿠폰을 나눠주기도 했어요.
일단 중앙극장 앞에서 친구들과 만나 바빌론이라는 유명한 옷가게에 가서 쇼핑하고 근처 코끼리만두에서 분식을 먹는 게 코스였죠.
남문은 왠지 잘나가는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곳이란 인식도 있었어요. 우리땐 DDR,펌프 같은 오락이 유행이었는데, 동네 오락실에서 마스터를 한 뒤 남문 오락실에 진출했어요. 수원의 중심이었기 때문에 학창시절 내내 친구들과 무작정 남문 근처를 헤매고 다녔던 기억이 있네요. 지금은 쇠퇴해 아쉽지만 늘 지날때마다 추억이 떠오르네요.
2000년대 초반까지 남문은 여전히 젊은이들에겐 만남의 장소였어요. 제가 거의 ‘끝물’이긴 하지만 시험 끝나면 쇼핑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꼭 왔죠. 당시에 ‘반윤희’ 패션이 인기였는데 행궁동 공방거리에 구제상점들이 많아 자주 가곤 했습니다. 이후에 백화점들이 많아졌지만, 전 수직적인 백화점보다 수평적인 시장이 좋았어요.
지금까지 수원 중앙극장과 남문에 얽힌 이야기, 잘 읽어보셨나요. 이제 이들 장소에 간직한 여러분의 추억도 들려주세요. 기사의 댓글도 좋고 경인일보 SNS(페이스북·인스타그램·네이버포스트)에도 좋습니다. 소중한 추억을 담아 좋은 콘텐츠로 보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