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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듣는 머슴… 지역 주민이 직접 정치 나섰다 ①

2024년 봄, 국민들이 또 회초리를 쥐고 섰다

우리동네 대표선수를 뽑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금 대한민국 국민의 정치성향을 분류하자면 크게 2가지다. 아무도 못 믿거나, 아묻따 믿거나. 참고로 아묻따는 ‘아무것도 묻고 따지지 않는다’는 요즘 은어다. 아무도 못 믿는 이들을 집계해보니 지난 대통령 선거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꾸준히 30%대를 기록하고 있다. 좋게 말해 어떤 당도 지지하지 않는 무당층. 이정도면 무당층이 하나의 정당이라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아묻따 믿는 이들은 아이돌 사생팬과 모습이 흡사한데 강력한 ‘팬덤’으로 무장한 극렬지지층으로, 이들 역시 양극단에 30%대씩 차지하고 있다.

기이한 현실을 두고 전문가들은 거대 양당 정치의 폐해라고 진단한다. 3김 시대보다 더한 극단의 정치를 만들어놓고는 선거철이 다가오니 정치인들도 양당정치가 문제라고 한다. 그러면서 ‘제3지대’ ‘신당’ 바람을 일으켰다. 제3지대가 성공하면 우리 정치가 달라질까. 정치가 우리 삶에, 내 피부에 와닿을 수 있을까. 경기도민이 겪는 고질적인 교통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며, 인천시민이 고통받는 쓰레기 매립장 문제를 풀어낼 수 있을까. 우리동네 대표선수를 자처하며 표를 달라 구걸하던 이들이 선거가 끝난 후 ‘서울 여의도 후보선수’로 전락하는 현상이 끝날 수 있을까.

그래서 묻는다. 아니 따진다. 이준석 신당도 되고, 이낙연 신당도 되고, 하물며 허경영당도 되는데

왜 지역정당은 안되느냐고
경기도 지역정당의 태동 '과천' 

정당은 수도에 소재하는 중앙당과 특별시·광역시·도에 각각 소재하는 시·도당으로 구성한다
 정당법 제3조 

2023년 9월 26일. 정당법 제3조가 ‘위헌'이라는 헌법소원 청구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문제 없음(합헌)'의 결론을 내렸다. 현행 정당법은 지역에 중앙당을 둔 지역정당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조항이 '지역정당'을 금지하는 위헌적 요소가 있다는 주장에 대해 헌재가 결과적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은 것인데, 속사정을 알고보면 묘하다.

헌법재판관 9명의 의견은 5명과 4명으로 첨예하게 갈렸다. 심지어 5명은 '위헌', 4명은 '합헌' 의견을 냈다. '지역정당 허용'을 뜻하는 위헌의견이 다수였는데도 결정 정족수(6명)에 1명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기각 결정이 내려졌고 결과적으로 합헌이 됐다. 쉽게 말해 지역정당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법은 여전히 허용하지 않겠다는, 참으로 야속한 결론이다.

수도 소재 중앙당·시 도당 구성해야 '정당' 인정
지역에 중앙당을 둔 지역정당 허용하지 않는 법
헌법재판소 두드린 4개 단체 "깊은 유감" 성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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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정당법 위헌 주장 집회 모습. 2022.5.18

2년여의 심리 끝에 난 결과였지만 크게 주목도 받지 못했다. 대중에게 지역정당은 개념도 생소할 뿐 아니라 정치변화를 '말'만 하는 기성정치권에선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아서다. 결정 사실도 8일이 지나서야 뒤늦게 알려졌고, 후속보도도 이어지지 않았다. 다만, "우리를 정당으로 인정해달라"며 2년 전 헌법재판소를 처음 두드렸던 4개 단체만이 외로이 들고일어섰을 뿐이었다. 2023년 10월1일. 4개 단체들은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공동성명을 냈다.

이 4개 단체는 수년 동안 지역에서 활발하게 정치활동을 이어온 자칭 지역정당들이다. 비록 "안되는 거 알면서 왜 그러세요?" 라는 무시와 무관심 속에서도 이들은 끝까지 나아갔고 법의 정점에 있는 헌법재판관들마저 팽팽하게 의견이 갈리는 '화두'를 던져냈다. 하마터면(?) 정당법 개정의 주역이 될 뻔한 이들이기도 하다. 이 유별난 단체 중에서도 가장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실제 지역정치에 뛰어들어 기성정치를 무릎꿇린 '형님' 지역정당의 이야기부터 들어보자. 형님은 경기도, 특히 '작은 계획도시' 과천에 터 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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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설립된 비영리법인 주민공동체 '과천풀뿌리' 전현직 대표들이 취재진에 10년간 활동 연혁을 설명하는 모습. 2024.2.20 /이영선기자zero@kyeongin.com
 

과천은 1980년대 정부청사가 들어서면서 개발된 계획도시다. 인구 8만여명, 면적도 전국에서 두 번째로 좁다. 작아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시 행정을 비롯해 동네 돌아가는 이야기가 오고 가기 쉽고, 그 안에서 의견을 교류하는 것도 용이하다. 옹기종기 모여 살다 보니 지역 현안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의견을 나누는 게 문화처럼 자리잡았다. 대안학교학부모회, 친환경먹거리모임, 지역화폐모임, 마을기업운영위원회… 주제와 분야를 가리지 않고 생활과 연계한 지역 모임들이 여럿 생겨났다.

이렇게 자주 얼굴 보고 이야기하다보니, 무엇이라도 함께 해보는 일에 보람과 재미를 느꼈다. 내친김에 본격적으로 '지역정치'를 통해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자는 데 생각이 모아졌다. 당적에 관계없이 과천 주민들의 생각을 실현시켜줄 만한 후보를 골라 '밀어주기'를 실행했고 밀어준 후보들은 시의회에 입성했다. 그 결과 정당공천제가 도입된 2006년 지방선거에 과천시의회 의석 7명 중 주민들이 밀어준 후보가 2명, 2010년 지방선거엔 4명이 당선됐다. 주민들 덕에 '뺏지'를 달았고 주민들을 위해 뺏지를 활용할거라 기대가 커졌다. 그런데,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다.

머슴이 말 안들으면 주인이 직접 나선다
2010년 지방선거 이후 굳건하다 믿었던 시의원과 주민들의 관계에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지역현안을 두고 '중앙당의 기조'를 핑계로 주민 다수의 의견과 반하는 의사결정을 하는가 하면, 과천을 전혀 모르는 외지인 출신 정치인이 선거철에 지지받을 요량으로 주민들에게 접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자 과천주민들 사이에선 "우리가 밀어준 시의원들이 진정 주민을 대표하는 것이 맞느냐"는 회의가 커졌다.
주민들이 직접 준비하고 참여하는 지역행사가 열리면 끝날 때쯤 와서 사진만 찍고, SNS에 마치 자기가 다 한냥 홍보만 하는 경우가 많았죠. 선거철 전후엔 특히나 자주 찾아왔었구요. 이런 상황이 반복될 때마다 지역정치에 대한 효능감도 떨어지고 상실감도 커져갔습니다

주민들의 성토가 커지는 중심엔 '파프리카'가 있었다. 생협, 공동육아, 학부모회처럼 당시 과천 주민모임들은 대체로 중년 여성들이 중심이었고 파프리카 역시 그런 모임 중 하나였고 조직력이 큰 편이었다. 특히 이들이 힘을 모아 밀어준 시의원들은 모두 남성이었는데, 각종 행사에서 여성 주민들이 무보수로 봉사하는 것은 당연시 여기면서도, 주민공용 공간·양육시설 등 정작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정책 요구는 '무리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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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지방선거에 출마할 주민후보를 최종 확정한 과천풀뿌리 '시민공천파티' 모습. 2014.3.22

 

파프리카가 느낀 박탈감은 비단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여러 모임 사이에서 분위기는 점점 심각해졌다. '이럴 바엔 직접 나서자'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마침 선거를 앞두고 있었고 주민들은 특정 정치인 지지 모임을 박차고 나와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할 정치 참여 공동체를 꾸리기로 했다. 산발돼있던 과천 주민 모임들이 '과천풀뿌리'라는 빅텐트로 모였다. 생각이 정리되고 뜻이 모이니 과천의 주민들답게 일사천리로 일이 추진됐다.

 

2013년 11월. 과천풀뿌리는 창립준비위원회 출범과 동시에 이듬해 6월에 실시하는 지방선거 대비에 착수했다. 목표는 시의원 당선. 10명으로 시작한 조직원은 공개토론회와 회원모집 등을 거쳐 금세 세자리수로 불어났다.

해볼만하다는 자신감은 커졌다. 하지만 예상치못한 데서 암초를 만났다. '지역정당 불가(不可)'. 과천풀뿌리는 정당으로 등록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정당법'을 통해 정당 설립에 조건을 두고 있는데, 중앙당을 서울에 두고 전국단위 당원 규모를 충족해야 한다는 창당 조항에서 발목이 잡혔다. 과천은 '서울'이 아니라서, 한마디로 서울이 아닌 지역에 중앙당을 만들면 정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주민 의견과 반하는 의사결정… 시의원과 '균열'
"진정 주민을 대표하는 것이 맞느냐"는 회의감

과천풀뿌리, 창립위 출범과 동시에 지선 대비
하지만 '지역정당 불가'하다며 인정 받지 못해
무소속 후보가 됐고 많은 제약… 집회도 불가

법이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무소속 후보가 됐고 선거에 많은 제약이 따랐다. 으레 정당의 후보들은 정당활동을 명분삼아 여는 집회조차 개최할 수 없었다. 정치후원금을 모금하는 것조차 금지됐다. 선거는 '돈'이라고 하는데, 무소속의 주민후보는 어쩔 수 없이 뜻을 함께하는 주민들의 자발적인 봉사에 많은 부분을 의지해야 했다.


그럼에도 개의치 않으려 했다. 처음으로, 우리 손으로 우리 동네 일꾼을 뽑는 과정에서 정당 체제는 필수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되레 소속 없는 '진짜 주민후보'라는 진정성이 전해지길 기대했다고 한다. 법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최대한 정당 꼴을 갖춰 절차도 진행했다. 2014년 1월부터 총회를 열고 공천 절차, 주민 후보가 지켜야 할 원칙 등을 확정했다. 3월에는 '시민공천파티'를 열어 2개 선거구에 각 1명씩, 시의원 후보 2명을 최종 확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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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원 121명 중 참석인원 69명, 찬성률 95.6%(66명)라는 압도적인 지지가 뒤따랐다. 회계사로 일하면서 주민후보 1호가 된 안영(54)씨는 처음 공천이 확정됐던 당시를 "얼떨떨했다"고 회상했다.

(저는) 평소 나서는 사람도 아니고 처음부터 후보로 거론됐던 것도 아닌데, 의견을 나누다 보니 후보로 추천을 받게 됐어요. 뭐라도 해보겠다고 하나둘씩 같이 이뤄가다 보니 그 과정 자체가 굉장히 행복했어요. 후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이렇게 다같이 참여하는 주민들의 대표로 나선다는 생각에 점점 책임감도 커졌습니다
진짜 주민자치가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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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지방선거 과천풀뿌리 주민후보 선거운동. 2014.5

 

2014년 5월. 후보자 등록을 마치고 선거운동본부가 출범됐다. 주민들은 본인들의 차에 주민후보를 홍보하는스티커와 공보물을 붙였다. 지하철역 앞, 사거리마다 20~30명 주민들이 연두색과 분홍색 옷을 맞춰 입고 섰다. 처음 해보는 선거유세운동이라 어색했지만 율동도 함께 하며 신나게 운동을 해나갔다.

 

무소속이지만, '주민후보'라는 홍보문구를 신기하게 보는 이웃들에게 과천풀뿌리를 설명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그렇게 선거의 달이 숨가쁘게 지나갔다. 2014년 7월1일. 민선 6기 과천시의회는 새누리당 3석·새정치민주연합 2석·무소속 2석으로 문을 열었다. 무소속 2석은 간호사, 회계사로 일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던 과천의 주민후보들 몫이었다. 또 이 즈음 과천풀뿌리도 창립총회를 열고 비영리법인형태의 공식단체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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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과천풀뿌리 창립총회 모습. 2014.7.12
 

주민후보에서 '주민'의원이 된 이들은 의정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의정활동을 해보니 의원이 가진 권한도 생각보다 막강했다. 주민일 때는 잘 볼 수 없었던 깜깜이 예산심의도 회계사 출신 주민의원의 꼼꼼한 지적 앞에선 꼼짝하지 못했다.

 

또 '예산 읽어주는 의원' 행사를 열고 이해하기 어려운 예산 목록과 그 맥락을 쉽게 풀어 설명하기도 했다. 본예산은 물론 추경안까지 심의때마다 앞서 주민을 대상으로 '모의 시의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주민들이 증액·삭감한 예산들은 매 심의마다 주민의원이 직접 전달했다.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어 조직은 내실 다지기에 박차를 가했다. 과천풀뿌리는 활동소식지를 발간하고 자유롭게 참석 가능한 정기모임도 열었다. 동네에 입소문이 나면서 조직 규모도 나날이 커졌다.

 

내친김에 과천풀뿌리는 '판'을 키웠다. 주민들이 체감하는 '자치(自治)'의 효능감이 높아지면서 다음 선거가 다가올수록 분위기가 고조됐다. 이윽고 2018년 지방선거가 도래하자 과천시장 후보까지 내기로 결정했고 정의당, 녹색당 등 소수정당과 연대도 주도했다.

 

여전히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당은 법적으로 '불가'한 상황이었기에 '과천시민정치 다함'(이하 다함)이라는 소수정당들과의 연합을 결성해 제3지대 단일후보를 내는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다. 적어도 주민들에게 양당 이외의 선택지를 제공하고 어엿한 정치참여 주체로 인정받기 위함이었다. 다함은 시민공천파티를 열었고, 소수정당 당직자들까지 포함해 경선 투표를 진행했다. 그 결과, 시장과 시의원 후보 모두 과천풀뿌리 소속 주민후보들이 선출됐다.

장밋빛 전망이 이어지는 가운데, 누구도 예상치 못한 '암초'가 등장했다. 선거를 불과 한달여 앞두고 남북정상회담이 열렸다. 11년만에 남과 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만나 군사분리선을 오가는 모습이 전국에 생중계됐다. 말 그대로 선거판에 '북풍'과 함께 민주당 바람이 불었다. 과천시정 20년 만에 민주당 시장후보가 과반 지지로 당선됐다. 시의회도 더불어민주당이 5석, 자유한국당이 2석을 석권했다. 주민후보는 단 한명도 당선되지 못했다. 과천의 지역정치는 거대양당이 장악했다. 당시 시의원 주민후보로 출마했던 구자동(54)씨는 쓰라린 기억을 떠올렸다.

주민 모두가 자발적으로 열심히 참여했고, 시장 후보까지 내면서 정치 참여의 규모도 커졌는데, 모조리 다 떨어질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어요. 남북정상회담은 얼마나 큰 변수였냐면, 과천이 소위 '보수 텃밭'이라 매번 민주당계 정당은 시의원 선거에서 1명만 입후보를 했었는데, 이때는 2명을 내더라구요. 아마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내부적으로 계산을 했겠죠
자치 잃은 지방의회, 자치와 거리 먼 '정당법'

'주민의원'이 없는 민선 7기 과천시의회는 논란의 중심에 섰다. 임기 시작한 지 채 반년도 안된 2018년 11월, 여당(민주당)의 한 시의원이 세금으로 운용되는 공무해외연수를 통해 자신의 가족이 살고 있는 캐나다에 다녀온 사실이 폭로됐다.

 

언론에 대서특필되며 전국적으로 지방의원 자질 논란을 낳았고 해당 의원은 탈당했다. 민선6기부터 협치를 위해 이어온 의원 정례 간담회도 여·야 갈등이 계속되며 폐지됐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는 각 당의 내부 분란이 커지며 '서로를 오가는' 탈당과 입당이 반복됐고 여대야소(5:2)였던 원내 구성이 여소야대(3:4)로 역전되는 촌극도 빚어졌다. 다수를 차지한 야당 의원들은 여당 의장에 대한 불신임안을 의결하고 의장직을 차지하기도 했다.

주민들이 직접 지역정치에 참여하는, 신선한 '자치' 바람은 불과 4년 만에 '아사리판'으로 전락했다. 대중이 늘 보아왔던, 익숙한 그 지방의회의 전형으로 돌아왔다. 그 시점도 참 공교롭게 과천시의회 역사상 처음으로 거대양당이 의석을 모두 장악한 때였다. 거대양당 소속 지방의원들이 공천을 좌지우지하는 지역구 국회의원과 중앙당에 예속되면서 자치는 사라지고 정쟁만 남은 셈이다.

중앙당의 영향력이 강한 한국의 정당 현실에서 정당공천은 지방정치의 중앙 예속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지역의 일꾼을 선출하는 선거 과정에서도 지역의 현안이나 지역민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되기보다 중앙정치의 이슈가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사례를 볼 수 있다."
 국회입법조사처 '지방선거 정당공천의 문제점과 개선방안'(2018) 연구보고서 中 

지방의회에 거대양당 소속 의원의 비중이 클수록 지역 현안에 집중하기 힘든 구조로 변질된다. 이런 부작용이 드러난 사례가 2년 전 출범한 민선 8기 경기도의회다. 유례 없는 여야 동수(78:78)로 양당이 정확히 반씩 의석을 차지했다. 제3지대 몫은 단 1석도 없었다. 어느 때보다 협치가 원활한 의정운영에 핵심이 됐지만, 임기 시작 직후부터 의장단· 원 구성 문제로 파행을 거듭했고, 두 달 가까이 지나서야 개원할 수 있었다. 여기에 도의회 야당(국민의힘)은 초반부터 당내 파벌 싸움으로 삐걱거리더니 대표의원 자리를 두고 법정 싸움까지 이어졌다. 이 여파로 지난해 일부 상임위원회는 행정사무감사를 열지도 못하는 사상 초유 사태를 맞았다.

현재의 정당법이 계속되는 한, 주민들의 지역정치는 여전히 '무소속'일 수 밖에 없고 자치를 쟁취하기 위한 분투도 어쩌면 결말이 정해져 있을지 모른다. 과천풀뿌리 대표를 역임했던 추경숙(58)씨는 과천에 살기 전, 서울시 도봉구에서 2002년부터 4년 동안 구의원을 지냈다. 2006년 정당공천제가 도입되기 전, 지방의회를 경험한 경숙씨는이런 현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지방의원이 정당 영향력 바깥에 있을 때는 아무래도 주민들이 관심 갖는 주제에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 정책으로 입안되는 흐름도 지금보다는 활발했었구요. (저는) 정당공천제 도입에 크게 반발했는데, 결국 저를 포함해 정당으로 넘어가지 않았던 의원들은 다음 선거에서 모조리 떨어졌죠 
과천으로 와서도 주민들과 함께 하나둘씩 직접 이뤄가면서 어쩌면 양당의 장벽을 허물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하기도 했었는데, 결국 한계를 절감하게 됐죠. '삶이 정치고 정치가 삶인데, 이 사이를 멀게 만드는 게 정당법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김산·공지영·이영선기자 mountain@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