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평안남도 진남포시 억량기리 114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박영복 박물관장의 기억 속 진남포는 평화롭고 고요한 바닷가 마을이었다.
박 전 관장의 기억 속에는 어린 시절 고향 진남포에 대한 비교적 소상히 남아 있다. 그는 마을에서 유일한 이층집에 살았다. 아버님이 2척의 배를 부렸다. 2층에서는 배가 보였다.
“2층에 올라서면 멀리 바다가, 배가 들어오는 게 보였죠. 아버님하고 2층에서 이제 우리 배가 나갔다 들어올 때 만선 깃발이 보이면 흡족해하는 표정을 지으셨죠.”
진남포 하면 남포제련소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거대한 굴뚝이 ‘랜드마크’와도 같았다. 박영복 관장은 “특히 그 굴뚝이 얼마나 컸는지 어른 30여명이 팔로 손을 잡아야 굴뚝을 에워쌀 수 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고지식한 아이였다. 부모님이 출타하시면서 “집을 잘 지키고 있으라”고 말하면 꼼짝없이 문간방에 앉아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아이였다.
박 관장은 언제였는지 모르겠지만, 진남포에서 소련군을 본 기억이 있다고 했다.
“어느 날 소련군이 들어왔어요. 그래서 그 사람들이 행진하는데 이상한 게 뭐냐 하면 손을 앞뒤로 흔들지 않고 좌우로 흔들어요. 좌우로 흔드는 겁니다. 어린아이 눈에는 그게 이상하니까 팔짓을 따라서 해보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박영복 관장은 “인천과 남포가 닮은 꼴 도시였다”고 기억했다.
배로 서울에 가려면 인천 한강 하구를 거쳐야 했듯이 평양에 가려면 진남포 대동강을 거쳐야 이르렀다. 수도 서울과 평양으로 향하는 관문항 역할을 했던 것이다. 두 항만은 모두 서해에 있는데 조수 간만의 차를 극복하기 위해 갑문을 운영한다는 공통점도 있다.
남북관계가 경색되기 전 인천에서 남포를 잇는 뱃길이 열린 적이 있다. 1998년부터 2011년까지 인천항과 남포항을 화물선이 오갔다. 특히 2002년부터 2011년까지 국양해운이라는 이름의 선사가 화물선 ‘트레이드포춘’을 본격 운영했다. 이 뱃길은 남북 교류의 상징과도 같았다. 당시 인천항에서 남포로 가는 배에 섬유·화학·전자·전기제품 등이 선적됐다. 이 배는 북에서 농수산물·광물자원·바닷모래 등을 싣고 인천항으로 돌아왔다. 민간단체의 대북 지원 물품도 이 트레이드포춘호에 실려 북으로 향했다. 국양해운은 적자를 기록하다 2006년 첫 흑자를 냈고 2007년에는 이 항로에 추가 선박을 투입했다. 한국 정부가 2010년 벌어진 천안함 폭침 사건으로 남북 교역을 중단하는 5·24 조치를 발표한 이후 이 항로의 물동량이 급격히 줄었다. 트레이드포춘 호는 2011년 10월 운항을 멈췄고 2012년 폐선됐다.
서로 닮은 두 항만은 분단 이전에도 교류가 활발했다고 전해진다. 인천항은 남포항에서 중국 또는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일본에서 수입하는 화물이 모이는 환적항 또는 허브(HUB)항만 역할을 했다.
일본 언론인 가세 와사부로(加瀨和三郞)가 1908년 편찬한 ‘인천개항 25년사’를 보면, 인천항과 남포항의 관계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국내 무역 중 당시 인천과 관계가 가장 깊은 곳은 진남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진남포에서 수입하는 것은 대개 인천항이 중개하였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인천항이 진남포의 중개소 위치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즉 진남포에서 일본으로 수출하는 곡류와 일본 혹은 청국에서 수입하는 각종 화물은 모두 인천항을 거쳤다”
박영복 관장은 1·4후퇴와 함께 고향을 떠나야 했다. 유년기 박 관장의 기억에는 작은 돛단배를 타고 인천항으로 떠나던 피란길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믐달이 뜬 깜깜한 밤이었다. 어머님과 이모 박 관장 누님과 동생 모두 다섯이 손을 잡고 부두로 이동했다. 바닷가에 이르니 여기저기서 “누구, 어디에 있느냐”며 찾는 목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모두 다 함께 손을 꼭 붙잡고 가야 했어요. 실수로 놓치기라도 하면 다시는 찾을 수가 없는 거예요.”
어촌에서 마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작은 어선에 박 관장 가족과 또 다른 팀이 배에 올라탔다. 배 길이가 10m 조금 못 됐던 것으로 박 관장은 기억했다. 보름 정도만 지나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고 한다. 집에 있는 그릇, 재봉틀 등 값이 나가는 모든 걸 마당을 파고 독에 넣어뒀다고 했다. 그리고 어머니 여동생인 이모가 남아 집을 지키기로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출발하는 날이 되니까 이모도 무서웠는지 결국 집을 비워두고 함께 따라나섰다. 추운 겨울 힘든 기억 보다는 피란 배에 마련된 간이 화장실이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박 관장은 말했다. “발을 올려두는 발판만 나란히 있었던 것 같아요. 바닥을 보면 바다가 보이고 손잡이도 제대로 없었 거든요.”
배에 몸을 실은 지 며칠이 지났을까. 빨리 배에서 내리고 싶어졌을 때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이 보였다. 꼭 사람들이 전등을 켜두고 있는 것 같았다. 박 관장 “아마 월미도 즈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그렇게 인천에 도착했는데, 바로 배에서 내리지 못하고 해가 뜬 뒤에야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어머니를 ‘누님’이라고 부르며 의남매처럼 지내던 이북 지인이 인천 월미도에서 박 관장 가족을 맞아주었다고 했다. 인천에서 경찰로 일하던 이였는데, 북에서 피란민을 태운 배를 하나하나 일일이 확인해 도착하자마자 박 관장 일행을 부두에서 찾아냈다고 한다. 그 지인은 이북에서 경찰 생활을 하던 이였는데, 남으로 내려가 다시 경찰로 일하던 이였다고 한다.
인천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부산으로 피란을 가야 했다. 박 관장은 미군 상륙함(LST)을 타고 부산까지 이동했다고 기억했는데, 그 배가 “마치 운동장 같았다”고 했다. LST에는 아무나 탈 수 없었다고 한다. 박씨 가족은 경찰 가족으로 신분을 위조해 탑승할 수 있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이 한국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면서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 이남 지역까지 퇴각했다. 북한군이 다시 수도 서울을 점령한 1951년 1월4일 날짜를 따 ‘1·4후퇴’라고 한다.
인천시민의 경우 1·4후퇴 전인 12월 30일까지 상당수가 피란을 떠난 것으로 ‘인천시사편찬 50주년 기념 인천광역시사’(2023년 발간)에 기록돼 있다. 당시 지중세(池中世) 인천시장은 시 직원들에게 “사태가 급박하니 시 직원은 집단 피난하기로 했다. 희망자는 이에 참가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시 직원 절반갸량이 참가해 중요 서류를 휴대하고 부산으로 피란했고 일반 시민도 다시 피란길에 올랐다.
미8군사령관은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교두보에서 철수하며 경인지역에 설치된 보급소가 위태롭게 되자 제3군수지원사령관에게 인천항을 1·4일 후퇴 당일 정오에 폐쇄토록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했다. 2월 10일 미 제25사단 기갑부대가 인천으로 진출해 시가지를 정찰했다. 북한군은 이미 주둔지를 포기하고 철수한 뒤였다. 인천이 재수복되자 피란 갔던 시민들이 속속 귀환했다. 가옥과 재산이 모두 파괴됐고, 생필품마저 모자랐다. 당시 인천시청은 부산 사무소를 두고 군산·목포·제주에 지소를 두어 피란시 인천시민 편의를 도모하고 있었다. 2월 11일 인천항 복구작업이 시작됐고 교육기관들도 이때부터 점차 정상화 수순을 밟았다.
박 관장 기억에 인천항에서 출발해 한 3일쯤 지난 뒤 부산에 도착했다. 첫날은 부산의 한 극장에서 머물렀다. 빵하고 먹을 걸 줬다. 다음 날부터는 어느 ‘국민학교’에서 생활했다. 며칠 뒤 다시 피란민 수용소가 생겼다. 부산에 있는 조선방직 건너편 큰 뜰에 생겼다. 거기서 한동안 먹고 살았다. 경찰 가족이라는 위조된 신분 증명이 있어 배급을 받을 수 있었다.
박 관장은 당시 부산 동네 꼬마 아이들하고 돌멩이를 던지며 싸우는 ‘석전’을 벌였다고 기억했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피란 온 우리를 보면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그렇게 놀리더라고요. 그렇게 돌 던지고 싸우며 놀았지요.”
얼마나 지났을까. 부산 피란 생활을 접고 박 관장 가족은 다시 고향에 가려고 인천에 올라왔다. 하지만 전쟁은 교착상태였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부산으로 향하던 피란길 LST에서 만났던 부평경찰서 경찰 가족과 친분을 쌓았는데, 그 가족이 쓰지 않는 ‘적산가옥’에서 박 관장 가족은 머물렀다.
박 관장은 부평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머님은 부평 미군부대 주변 ‘양공주’ 집에 드나들며 구해 온 초콜릿 등 ‘양키물건’을 좌판에서 팔아 어린 자식들을 돌보며 생계를 꾸렸다.
좌판을 펼쳐 놓으면 미군 헌병이 단속을 나왔다. 집으로 도망오는 어머님을 따라 헌병이 집까지 찾아오는 경우도 있었다고 했다.
박 관장은 “그럴 때면 어머니는 좌판을 이불로 덮고 ‘아이고 아이고’ 소리를 내며 아픈 척을 하며 헌병을 따돌렸다”면서 “어머님이 억척스러웠다”고 했다.
또래보다 2년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한 박 관장은 운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1957년 경기도육상연맹이 주최한 제1회 인천 초등학생 체육대회에서 ‘주폭도’(멀리뛰기) 종목에서 3m95㎝를 뛰어 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공부에도 소질이 있던 박 관장은 인천중학교에 입학한다. 부평서초등학교 졸업생 200여명 가운데 인천중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인천중학교는 공부도 유명했지만, 체육 활동도 적극적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원칙이 있었다. 운동부 학생들도 수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모든 교과 수업이 끝나고 나야 운동부의 연습이 있었다. 처음에 농구부로 잠시 활동하다, 이어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국가대표 농구선수로 활동하고 연세대학교와 인천대우제우스 감독을 역임한 최종규 감독이 박 관장의 동창이다.
개교 기념일마다 학교에서는 마라톤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전교생이 학교에서 출발해 인천교도소 반환점을 돌아 학교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마지막 홍예문 언덕길이 가장 힘든 구간이었지만 성취감을 주었다. 석 달에 한차례 소풍을 떠나는 ‘원적’도 너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걸어서 송도유원지를 다녀오곤 했는데, 걷는 동안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며 사귀던 시간이 그는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가 역사학을 공부하게 된 것은 인천중학교 재학 시절 만난 선생님들의 영향이 컸다.
‘인민복’을 입거나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중국 역사를 이야기하는 길영희 교장 선생님이 어린 중학생의 눈에도 그렇게 멋져 보였다.
“그냥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언제나 아주 자신감 있게 아주 ‘파워풀’하게 말씀하셨어요. 늘 가슴 속에 울림을 주는 얘기를 하셨죠. 특히 중국 고사를 아우르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교장 선생님과 중국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역사 과목 선생님들의 모습도 매력적이었다. 2학년 시절 담임 이근필 선생님은 퇴계 이황의 16대 종손이었다. 삼국지연의를 중국 원서로 읽으시던 유기화 선생님 등도 기억에 남는다.
박 관장은 친척 어른 권유로 서울중앙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서울로 학교를 진학한 덕에 “중학교 동창이 1천명, 고등학교 동창도 1천명”이라고 했다. 장단점이 있다고 했다. 동창이 많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단점은 깊이 사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윤성 전 국회부의장, 정홍식 전 정보통신부 차관 등이 중학교 동창이고, 김병일 기획예산처 장관과 최혁 주제네바대표부 대사 등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는 고려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선배가 학과 ‘써클’인 인류고고학회에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예 알겠습니다’ 하고는 써클에 가입하게 된다. 동양사나 중국사를 배우고 싶어 진학한 사학과였는데 써클 활동을 계기로 고고학을 접하게 된다.
염불 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많았다. 1964년 창원 성산 패총 현장이 그가 따라 나선 첫 발굴 현장이었다. 발굴이 뭔지도 모르면서 멀리 부산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는 얘기를 듣고는 무작정 따라나섰다. 매일 선배님들이 찾아와 사주는 공짜 술도 너무 즐거웠다. ‘지표조사’라는 활동도 자주 나갔다. 봄·가을로 농민들이 밭을 갈고 난 후 버리는 돌을 모아 조사하는 것이었다. 그 돌 속에 돌도끼, 돌칼 등이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큰 비로 둑이 무너지는 곳에서 토기 파편 등도 선배들과 함께 주우러 다녔다. 유물에 눈이 밝아지면서 4학년 때 이제 학회 회장도 맡았다.
박 관장은 1971년 군대를 제대하고 인천중학교 은사였던 심재갑 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선거 캠프에서 뛰기도 한다. 당시 심재갑 선생님은 38세 나이로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일당 후보로 출마했다. 친구들과 정책실장, 홍보실장 등을 맡아 무보수로 뛰었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선거가 끝나고 함께 선거를 뛰었던 친구는 한 사립대 대학교 총장 비서실에 취직했다. 그 친구 덕에 대학원에 입학해 다시 고고학 석사 과정 공부를 이어간다.
박 관장은 대학원 공부를 하며 임시직 연구원 신분으로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해 천마총 발굴 후 정리 작업과 황남대총, 안압지 등 발굴에 참가한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은 우리나라 고고학 역사상 가장 중요한 조사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국내 발굴 조사 수준을 한 단계 올려놓은 계기로 평가받는다. 이 경험으로 인해 박 관장은 신라 고분 연구를 전공하게 됐고, 마지막 공직 생활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경주 전역에 무수히 많은 무덤이 있는데 일제 때 조사·정리된 것이 겨진 것이 155개다. 그 무덤에는 각각 번호가 붙어 있었다. 1호부터 155호까지다.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이 고분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왕릉을 발굴해 문화관광 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을 세워뒀고 발굴을 지시했다. 이 고분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이 ‘98호 무덤’ 지금의 황남대총이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발굴 경험이 전무했다. 그래서 발굴 경험을 쌓기 위해 그 가운데 가장 작은, 번호도 가장 나중인 ‘155호 무덤’을 시범적으로 발굴하기로 했다. 1973년부터 발굴을 시작했다. 시작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금관이 발견됐고 유명한 ‘천마도’도 이때 발굴됐다. 그래서 155호 무덤에 ‘천마총’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무덤 주인은 밝혀내지 못했다.
박 관장은 천마총이 ‘대박’을 터뜨린 후 정리 작업을 하던 시기부터 경주 고적발굴 조사단에 참여했다. 황남대총 발굴도 시작했다.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만 5만8천여 점에 이르렀다. 금관, 금동관, 둥근 고리 큰 칼 등 사치품이 엄청났다. 당시 경주 발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대단했고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발굴현장을 찾기도 했다. 취재 경쟁도 치열했다. 무덤에서 어떤 유물이 발견됐다는 사실을 알리면 특종으로 여겨졌다. 특히 금관이 발견되는 순간을 포착하려는 기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박 관장은 “기자들을 피하려고 일부러 2kW 대형 조명 4대나 설치해두고 밤에 발굴작업을 진행하기도 했다”면서 “취재 경쟁이 너무 심하다 보니 경주지역 전화 교환원을 통해 본사와 전화 통화를 하는 다른 기자의 취재 내용을 몰래 파악하려 한 기자가 있을 정도로 치열했다”고 말했다. 이 모든 발굴 과정은 국립영화제작팀이 상주하면서 기록했다.
박 관장은 이러한 경력을 바탕으로 1976년 시행된 제1회 4급 을류 학예연구직 공개채용에 합격하며 ‘학예연구사 시보’로 정식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박 관장은 이후 독일 초청으로 쾰른 동아시아박물관에서 보존과학에 대한 기법을 배우는 행운을 얻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해외 전문기관의 초청을 받아 교육받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독일 친구들이 한국에서 발굴 전문가가 왔다고 환대해 줬다”면서 “그곳에서 유럽의 박물관을 자주 돌아다니면서 발굴·복원 기술을 배우는 좋은 기회였다”고 말했다.
이후 국립공주박물관장과 초대 국립청주박물관장 등을 거치고, 국립중앙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에서 주요 보직을 맡았다. 1999년 출범한 문화재청에서 초대 문화유산국장으로 일하고, 2000년 국립경주박물관장으로 취임 후 4년 동안 경주박물관을 이끌고 공직 생활을 마감했다.
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은 역사학도이면서 고고학자로, 또 문화재 행정가로 살아온 인생이라고 요약할 수 있는 삶을 살았다. 그가 인천에 건네는 조언은 이렇다.
“보통 전문가들은 고집이 센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무슨 일이든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많이 듣는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문화재’라는 옛것을 지키는 일을 해왔지만 현재도 중요합니다. 살아가고 있는 ‘우리’하고 맞춰가야 해요.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려 하고, 보존하려 하면 현재가 견딜 수 없어요. 저는 그렇게 국가 시책을 국민 마음에 가닿도록 하는 것이 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인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해요. 인천이 항구도시로서 이미지를 복원하려 굉장히 애를 쓰는 것을 많이 봅니다. 너무 옛날 것만 고집하지 말고, 옛 것 속에 현재를 그리는 것도 중요해요. 너무 옛 것만 이야기하면 굳은 살이 생겨요. 새로운 걸 끌어내야 하는데 말입니다. 옛것에서 미래를 끌어내지 못하고 전통만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가라앉아요. 거기서 싹을 틔워서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