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전 학생 알아본 책방주인… "도시가 날 기억할때, 도시와의 사랑이 시작"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
'무감독 시험' 전통 제물포고 출신
"양심훈련 3년, 소중하고 대단한 경험"
대학졸업후 코트라 입사… 해외 파견
"오일쇼크 독일, 그때부터 에너지 전환"
1980년 서울 올림픽 유치현장 지원도
현지서 김대중 만남… 통일 의견 구해
대통령 당선뒤, 2년여간 청와대 근무
'인천재발견' '도시재생' '산업재건'
인천발전연구원장 부임, 정책방향 제시
"과거가 곧 미래… 현재서 출발해야"
김대중 대통령 국민의 정부 시절 헌신한 이인석(81) 전 청와대 건설교통비서관을 '아임프롬인천' 지면에 초대하기까지 작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인석 전 비서관은 1943년 황해도 연백 출신인데, '너무나 끔찍한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하나 있었다.
"내 스스로 만들어 낸 기억이 절반은 될 것"이라며 기억의 오류를 염려하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남겨줄 만한 것도 아닌, 숱하게 흔하디흔한 이야기…"라는 걱정도 내비쳤다. 어렵게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그는 비교적 또렷한 기억으로 자신의 삶을 들려줬다.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흔하지 않던 시절 넓은 세상에 나가 몸으로 직접 부딪치며 체득한 경험은 지금 다시 들어도 충분히 흥미진진했다.
이인석 전 비서관은 제물포고 재학 시절 '무감독 시험' 이야기부터 들려주겠다고 했다. 무감독 시험은 지금껏 살아온 그의 인생에서 "더없이 엄격한 내 인생의 감독 역할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무감독 시험은 제물포고를 '양심'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무감독 시험은 제물포고 초대 교장을 지낸 길영희 선생 제안으로 시작됐다. 때는 1956년 봄. 길영희 교장은 교직원 회의에서 무감독 시험을 제안했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파격 제안에 교사들의 반대도 많았지만 길 교장은 끝내 뜻을 관철시켰다. '양심의 1점은 부정의 100점보다 명예롭다'라는 선서를 하고 시험을 치르는 전통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런 무감독 시험에 대한 제물포고 동문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그 자부심이 얼마나 컸으면 인중제고(인천중·제물포고)총동창회는 한때 제물포고의 무감독 시험 전통을 무형문화재로 등록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지금 돌이켜보면 다른 건 몰라도 길영희 선생의 교육자적 정신 만큼은 정말 훌륭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연히 대학 진학이 목표인 고등학생이었고요. 19살에 인생이 결정된다는 시기였어요. 시험 점수 하나하나가 까까머리들의 운명을 좌우했던 시기였어요. 남의 정답을 보고 싶은 유혹도 많았을 텐데, 또 친구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죄책감도 컸을 것이고요. 그렇게 철저하게 '양심훈련'을 받은 3년이 소중하고 대단한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창 시절 이인석은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 자주 들렀다. 이 전 비서관이 다녔던 동구 창영초등학교와 가까웠고, 제물포고와도 멀지 않았다. 오래전 인천에 살았던 많은 사람에게 헌책방 골목은 추억의 장소다.
지금은 영업하는 헌책방 수가 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1970년대 이 골목에는 40개 가까운 서점이 모여 있었다. 한때는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과 더불어 '전국 3대 헌책방 골목'으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이 정확히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선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2019년 발행된 '인천 동구 도시생활사 조사'를 보면 1945년 광복 직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두고 간 다양한 서적이 배다리 시장에 쏟아져 나왔고, 이로 인해 그 근방에 헌책방 거리가 형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전 비서관은 1961년 서울대 독어독문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후 사병으로 입대했다. 국방부 소속 고위 간부 교육기관인 국방대학원에 배치받았다. 외국 출판물과 간행물을 본 뒤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가 작성한 보고서의 결론은 늘 '무엇무엇이 한국 안보에 미치는 영향'이었다. 바다 건너 다른 나라의 소식을 전해주는 신문·잡지 등 출판물을 늘 접할 수 있었다. 이 전 비서관은 그 시절이 무척 행복했다고 기억했다.
1969년 전역 후에는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에 입사한다. 자유롭게 외국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으로 느껴져 택한 직장이었다. 입사 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오스트리아 빈 출장길에 오른다. 꿈에 그리던 그의 첫 해외여행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반세기 전 1970년대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00불이 안 됐을 때일 겁니다. 지금과 같은 여행용 캐리어도 없던 시절이었죠. 한마디로 타잔이 문명사회와 맞닥뜨렸다고 해야 할까요. 신문으로 책으로 알던 유럽과는 전혀 다른 현실을 봤어요. 백화점,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의 온화한 모습, 정갈한 도시 풍경, 질서 정연한 시민들. 심지어 도시의 냄새까지. 이런 세상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여행 가방도 그때 구입했고, 책도 사고 '타이프라이터'도 샀어요. 그때 가방은 지금도 잘 보관하고 있네요."
당시 한국 경제 상황은 넉넉하지 못했다. 외화가 부족했다. 단 1달러라도 해외에서 낭비하는 것이 금기시 됐던 때다. 여권도 사흘짜리 일주일짜리가 대부분이었다.
그가 체류한 기간은 한 달 반 정도였으니 엄청나게 긴 출장이었던 것이다. 어찌나 특별한 경험이었는지 KBS에 대담 프로그램이 편성돼 현지에서 그가 보고 느낀 것들을 사흘 동안 풀어놓았을 정도였다.
1973년에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무역관에 발령을 받는다. 그의 첫 해외 근무 부서다. 그해 10월 1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페르시아만의 석유 수출국이 원유 가격을 인상하고 감산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경제 혼란 상황이 벌어졌다. 1973년 시작돼 1974년으로 이어지면서 유가가 무려 70%까지 급등했다.
"당시 독일 정부 유류파동 대책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일요일에는 독일의 모든 고속도로의 차량 통행이 금지됐죠. 외교관 차량이라고 예외도 없었죠. 단 한 대도 다니지 않았어요. 일요일이 되면 신문·방송에서 그런 고속도로 상황을 보도했습니다. 현지에서 지켜보면서 '이런 게 바로 선진국이구나' 생각했습니다. 대중을 이끄는 리더십도 중요하지만 정부 방침을 온 국민이 따르는 능력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독일은 그때부터 화석 연료 의존도를 낮추려고 노력했다. 재생에너지 비중을 늘려 2050년 재생에너지 100% 목표를 세운 것도 그 당시였다.
"우리나라는 지금에서야 '신재생에너지 확대'를 얘기하지만 독일은 유가 급등 위기를 사회적 전환기로 삼았죠. 저는 오일쇼크가 문명의 전환을 앞당길 것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는데 독일에 머무르면서 그 의미를 차차 알게 됐죠. 아무튼 그 충격은 굉장히 컸습니다."
그는 1980년 스위스 취리히로 근무지를 옮긴다. 1981년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독일의 작은 도시 바덴바덴에서 벌어진다. 아시아 경쟁국 일본을 제치고 대한민국이 1988년 하계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된 것이다.
'쎄울'이라고 발표하는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장의 모습은 한국 국민에게는 익숙한 장면이다. 현장에는 올림픽 개최지 발표를 앞두고 정주영(1915~2001) 현대그룹 회장을 비롯한 국내 재벌 총수들이 올림픽 유치단 자격으로 바덴바덴에 모여 있었다.
이 전 비서관은 잠시 취리히를 벗어나 독일 바덴바덴에서 유치단을 지원하며 현장을 지켜봤다.
"우리가 일본을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이가 많지 않았어요. 그저 나고야와의 득표 차를 줄여보자는 것이 유치단의 분위기였어요.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한국이 개최국이 된 겁니다. 세계가 놀랄 일이었지요. '한국 5천년을 기다렸다'고 대서특필된 독일 현지 신문사의 기사 제목이 지금도 기억납니다."
서베를린 근무 경험이 있던 이 전 비서관은 동베를린 무역관장으로 일한다. 그러다 통일 독일을 경험한다. 김대중(1924~2009) 전 대통령과의 인연도 이때 만들어진다. 김대중은 1992년 대선에서 낙선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한 뒤 런던에서 공부했다.
독일 베를린 자유대학 강연이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이 그를 불러 만났다. 김대중은 독일 통일을 현지에서 지켜본 이 전 비서관에게 한반도 통일 방안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이 전 비서관은 독일의 사례를 모방할 것이 아니라 한국만의 통일 모델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1997년 대선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된 후 보좌관에게서 연락이 왔다. 긴 설명도 없었다. 한국으로 들어오라는 연락이었다. 코트라에 사표를 제출하고 귀국했다. 1998년 2월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청와대에 들어가 2년6개월간 근무했다.
2000년 8월 인천발전연구원(현 인천연구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이 전 비서관 눈에 고향 인천은 삭막하고 황량했다. 어느 날 학창 시절 기억을 떠올리며 배다리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한 헌책방 노인이 "아주 오래간만입니다"라는 인사를 건넸다. 40년 전 학창 시절 책방을 드나들던 까까머리 학생의 얼굴을 헌책방 노인이 단박에 알아본 것이다.
"그때 아주 뒤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하고 있구나' '도시가 나를 기억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제가 인천에 착근하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인천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그는 곰곰이 생각하고 결론을 내렸다. 자신이 인천발전연구원장으로 재직하며 초점을 맞출 세 가지 주제를 모든 연구원 모든 직원과 공유했다. 첫째 '인천 재발견', 두 번째 '도시재생', 세 번째는 '산업 재건'이다.
"내가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시가 걸어온 길을 다시 살펴보자는 의미로 '인천 재발견'을 내세웠습니다. '도시재생'은 인천을 하나밖에 없는 도시로 만들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자는 의미였습니다. 공업단지가 많고 산업 인프라가 잘 갖춰진 도시에 공항이 개항하고 항만이 새롭게 갖춰져 현대화된다면 시민이 자부심을 갖는 활력 있는 도시가 될 수 있어 '산업 재건'이 필요하다고 봤습니다."
그가 세운 인천의 세 가지 방향성은 2000년대 이후 인천시 정책의 '핵심 줄기'로 작용했다. "한쪽은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데 동시에 다른 한쪽은 무너지고 있는, 명암이 혼재된 도시"가 이인석이 본 인천의 현실이었다.
이인석 전 비서관은 제6·7대 인천발전연구원장을 지내고 2005년 7월 퇴임했다. 이후에도 인천상공회의소 상근부회장, 인천대 석좌교수 등을 지내며 인천을 탐구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했다.
이인석 전 비서관은 인천시에 꼭 하고 싶은 조언이 있다고 했다. "인천이 어떤 방향을 선택하든 반드시 지금 현재 있는 곳에서 출발하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어요. 인천의 과거가 곧 미래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