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언젠가’
누구나 아플 수 있습니다. 또 누구나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게 ‘언제’라는 시점조차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이 ‘예고’하고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죠. 갑자기, 불시에, 예기치 않은 순간에 찾아와 평범하고 평온했던 우리의 일상을 깨버립니다. 그렇기에 가족을 간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선 사례들처럼 젊은 시절 운좋게 경험하지 않았더라도 결국에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공평하게 흐르니 나이가 들 것이고, 그래서 아프고 결국엔 죽게 되니까요. 그게 나의 아버지이든, 어머니이든, 남편이든, 아내든 말입니다. 흔히 ‘노노(老老)간병’이라 일컬어지는 2명의 가족간병인을 만났습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족간병의 고통은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닙니다. 가족간병은 우리 모두의 문제입니다.
다음은 최명숙(가명·64세)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 scene1.
부모님은 참 단란한 부부였다. 어딜가도 늘 ‘정정하다’는 말을 들었다. 90세가 넘는 나이에도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도란도란 사는 모습에 안심했다. 어쩌면 나는 알면서도 몰랐다. 세월의 무게가 부모님만은 비껴갈 것 같았다. 아버지의 기력이 떨어지며 어머니가 아버지를 돌보기 시작하기 전까지는.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했다. 자식이 4명이나 있었지만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어머니의 헌신 덕에 우리 4남매는 각자의 삶을 살았다. 연로한 어머니 혼자 아픈 아버지를 간병한다는 게 늘 마음에 걸렸지만, 사는 게 바빠 그러려니 했다. 그만큼 어머니의 존재는 컸다. 어머니 덕에 ‘나의 일상’이 유지되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 scene2.
2018년, 어머니가 쓰러졌다. 어머니는 ‘뇌경색’이었다. ‘좌측 편마비’ 증상으로 어머니는 누군가의 돌봄 없이는 일상생활이 어려운 환자가 됐다. 오랜 시간 아버지를 돌봤던 어머니는 이제 간병의 대상이 됐다.
어머니의 입원과 아버지의 간병이 동시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4남매 중 누군가는 간병을 맡아야 했다. 건강이 좋지 않다, 생계때문에 안된다… 모두 눈치만 볼 뿐 나서질 않았다. 자연스레 고정된 일자리가 없었던 나에게 시선이 쏠렸다. 그렇게 나는 간병을 떠안았다. 처음엔 이 상황이 불편하지 않았다. 부모님을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고, 또 상황이 되는 이가 맡는 게 옳다고 생각해서다.
하지만 간병은 녹록지 않았다. 아버지의 아침식사를 차린 후 곧장 어머니가 있는 병원으로 이동해 하루 종일 간병했다. 그동안 집에 혼자 있는 아버지는 하루에 3시간씩 방문하는 요양보호사를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집에 돌아와 아버지를 챙겼다. 집과 병원의 반복이었다.
# scene3.
시간이 흐를수록 간병은 나의 ‘독박’이었다. 형제들은 무용지물이었다. 오히려 나를 더 외롭게 했다. 간병의 부담을 나누기는 커녕 혼자 간병하는 내게 오히려 당당했다. 도저히 감당이 안돼 병원비 명세서를 보내면 ‘이걸 나한테 왜 보내냐’는 식의 답변만 돌아왔다.
버려진 것 같았다. 홀로 간병을 감당하는 일도 벅찬데 나를 지지하고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가족들이 원망스럽고 미웠다. 서러운 마음이 들고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으면 딸은 격하게 분노했다. “엄마도 건강 안 좋은 거 뻔히 알면서 삼촌, 이모들이 어떻게 나 몰라라 할 수 있어!”
엄마를 병원에 모신 5년간 병원비 걱정은 항상 나를 쫓아다녔다. 일을 못해 수입은 없는데 고정적으로 큰 지출만 발생하는 악순환이 반복됐다. 카드 돌려막기와 대출로 간신히 막아보지만 매일이 버겁다. 그나마 기초생활수급자인 부모님 덕에 병원비와 간병비 일부는 보조가 돼 조금씩이라도 빚은 갚고 있지만 간병에 필요한 물품이나 생활비 등은 감당이 되질 않는다.
# scene4.
2023년 3월, 집에서 모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향년 100세. ‘봉와직염’으로 투병하셨는데, 입원 13일 만에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나의 간병은 끝나지 않았다. 아버지 간병으로 어쩔수 없이 요양병원을 전전했던 어머니에게 늘 마음의 빚이 있었다. 어머니도 집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해 11월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그 사이 어머니는 치매까지 앓고 있었다. 간병의 난이도는 예상보다 훨씬 고됐다. 온 힘을 써야 하는 중노동이었다. 어머니를 집에 모시고 단 하루도 쉬지 못했다. 요양보호사가 매일 3시간씩 어머니를 돌봤지만, 왠지 모르게 눈치가 보였다. 하루 24시간 중 21시간을 어머니 옆에 있었다. 쉼 없는 간병에 몸과 마음이 지쳐갔다.
한계가 왔다. 스트레스는 쌓였고, 몸은 아팠다. 한 달에 하루 이틀이라도 쉬고 싶었다. 결국 4개월만에 어머니는 다시 요양병원으로 돌아갔다. 잠시라도 쉴수만 있었다면, 교대할 누군가가 있었다면…나는 요즘 매일 어머니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린다.
다음은 김정희(84세)씨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논픽션’입니다.
# scene1.
장난인 줄 알았다. “저 놈이 왜 우리 집에 있어! 빨리 내보내!” 남편이 삿대질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의자에 걸어놓은 겉옷. 저 놈이 시비를 건다며 씩씩대는 남편에게 집에 아무도 없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런 일이 반복됐다.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으면 남편은 TV를 처음 보듯 “이게 뭐예요?” 하고 물어봤다. 이상했다. 나를 놀리는 것치고는 이해할 수 없는 장난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남편을 데리고 인근 병원에 갔다. “아버님은 치매입니다.” 의사의 진단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눈 앞이 깜깜했다. 치매 걸린 남편을 감당할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섰다. 2011년 6월의 일이다. 내 나이 71세. 그렇게 치매 걸린 남편을 간병하기 시작했다.
남편의 치매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행됐다. 병원을 다니고, 약을 먹었지만 병의 속도를 늦출수가 없었다. 심지어 남편은 자고 있는 나의 목을 조르기도 했다. 삶이 고통스러웠다. “당신도 고생하고 나도 고생하니까, 아파트에서 뛰어내릴까?” 남편에게 토로도 해보았다. 그때마다 그의 증세는 심해지기만 했다.
# scene2.
치매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병을 모르면 남편을 감당할 수 없다. 꼬박 2년을 치매와 관련된 글과 영상을 모조리 찾아 공부했다. ‘치매는 완치가 없다. 보호자가 하는 것에 따라 진행이 늦어질 수 있고, 최소한 제자리걸음은 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었다. 용기를 내기로 했다. 10년 동안 나빠질 치매 증세를 20년으로 늘려보자. 그때부터 남편의 간병에 모든 것을 쏟았다. 남편이 치료 교육을 받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찾아갔다. 인근 병원에서 운영하는 ‘100세 총명학교’는 5년 동안 단 하루로 빠지지 않았다. 동네의 치매안심센터 프로그램은 무조건 참석했다. 치매에 좋은 음식이라면 늘 최고의 것으로만 준비했다. 유일한 소득인 연금의 대부분을 남편의 식비로 사용했다. 남편의 상태를 지금정도로만 유지할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었다. 아니, 해야 했다.
# scene3.
남편의 간병을 혼자 감당하는 것이 벅찰 때가 있다. 치매로 인해 미운 행동을 하는 남편을 감당하는 일, 고된 간병으로 약해지는 내 몸을 보면 마음이 우울하고 답답해졌다. 너무 지쳐서 요양병원에 보낼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다른 이의 손을 타는 걸 싫어하는 남편과 내가 직접 간병해야 남편이 지금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접었다.
남편의 치매 투병을 두 자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자식들의 일상만은 지키고 싶었다. 가끔 집에 오면 남편의 이상한 행동을 보고 “아버지 왜 저래?”라고 물어본다. 그럼 나는 “늙으면 다 그래, 나이가 몇 인데!” 라고 대충 얼버무린다. 간호사인 딸이 눈치를 채고 걱정했지만 나는 “나 혼자 다 짊어질게. 내가 하는 데까지 하고 만약 내가 먼저 가면 그때 너희가 맡아라”고 돌려보냈다. 부모 잘못 만나서 자식한테 물려주는 게 이것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자격지심이 올라왔다. 나만 참고 견디면 모두가 편하다. “내가 책임지자” 벅차고 힘들어도 나의 헌신이 남편의 치매 증세 악화를 막고, 제자리걸음 할 수 있게 한다면 나는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