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병 향한 고정관념 돌아볼 시간
‘내 선에서 끝날 일’ 과연 맞을까
의무사항 아닌 선택할 자유 있어야
#‘간병할 자유’.
‘시간 빈곤자’, ‘간병 약자’, ‘누구나·언젠가’
앞서 경인일보 취재진은 ‘가족 간병―일상’을 사수하기 위해 고군분투 중인 다양한 시민을 만났습니다. 누구는 간병과 일상을 유지하려 압축적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어머니를 돌보면서도 꿈을 향해 조금씩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아예 노년의 삶이 송두리째 가족 간병에 빼앗긴 사람들도 만났습니다. 이들은 계층도, 세대도 모두 천차만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가족 간병이라는 굴레에 얽혀 저마다 불평등한 상황에 처해있었습니다. 이들의 시공간은 가족 간병을 하지 않는 이들과는 참 다르게 흘러갔습니다. 막상 이야기를 들어보니, 남일 같지 않았습니다. 저마다 시기의 차이만 있을뿐 언젠간 우리 모두의 삶으로 밀려 들어올 일들이죠.
가족을 간병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이 두 집단 사이에 불평등의 벽을 세운 건 그저 단순히 ‘가족 간병의 여부’가 아닙니다. 조금 더 구조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불평등의 핵심은 ‘완충지대’, 다시 말해 한 사람이 가족 간병을 할 동안 사회·정신적으로 소모되는 시간과 감정을 뒷받침해줄 사회 안전망이 없다는 데서 시작합니다.
이 완충지대가 없는 사회에서 위험부담과 기회비용은 오롯이 개인의 책임, 가족 간병을 맡은 자가 홀로 감당해야 할 몫이 됩니다. 김은희(40대 초반)씨, 이정민(20대 초반)씨, 최희숙(60대 중)씨(이상 가명), 김정희(80대 중반)씨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말이죠.
그렇다면 복잡하게 얽힌 실타래를 풀어갈 단서는 무엇일까요. 일차원적인 해법은 정책 설계와 예산 투입입니다. 그간 소홀했던 가족 간병 관련 정책을 개발하고 지원을 확대하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해결책에 단골로 등장하는 간호간병 통합서비스, 가족돌봄휴가, 치매 국가책임제, 희귀·난치병 지정 및 지원 강화 등이 대표적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이런 제도들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세심히 살피는 작업일 것입니다.
하지만 무언가 부족합니다. 가족 간병 관련 정책을 살피기에 앞서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건, 간병을 인식하는 우리 사회의 ‘철학적 접근’입니다. 자못 어렵게 다가올 수 있지만, 쉽게 말하자면 가족간병을 바라보는 공통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새로운 정책이 나오고 관련 법안이 국회 문턱을 통과해도 사각지대는 어느 틈에서든 생기기 마련이죠. 그럴 때마다 사회의 제도가 미처 보듬지 못한 공간을 메우는 것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간병을 할지라도 보통의 삶을 잃지 않게 할 최후의 보루로 공동체가 ‘사회 안전망’이 돼야 합니다. 공동체의 공감 아래 정책·법안을 신설하고 보강해야 뼈대가 튼튼한 울타리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적 접근에서 이 문제를 출발해야 합니다.
이건 우리가 만난 가족간병 취재원들이 어렵게 취재에 응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복지혜택을 더 달라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돌보는 일로 겪는 불행이 ‘나’에서 끝나기를 바라는 데 있습니다. 또 우리가 가족간병 문제의 주요자문을 교수, 행정기관 등 전형적인 전문가보다 당사자성이 분명한 이들에게 구한 연유이기도 합니다.
치매 진단을 받은 아버지를 간병하는 청년 가족간병인 이른바 ‘영 케어러’로 살아가면서 마주한 부당함을 담아낸 에세이, ‘아빠의 아빠가 됐다’의 저자 조기현씨. 그리고 루게릭병 환자 박승일씨의 누나이자, 승일희망재단의 상임이사 박성자씨는 그래서 우리가 찾던 ‘전문가’였습니다. 이들 역시 나이·성별, 처한 상황도 모두 다르지만, 경험을 통해 느낀 한국 사회 가족 간병을 향한 시선에 대해 동일한 문제의식과 결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간병 가족에게도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간병할 자유’. ‘간병=가족’ 공식에서 벗어나, 한 개인이 위험 부담 없이 간병을 할지 말지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간병할 자유’는 조기현 작가가 만든 조어입니다. 치매를 앓는 아버지를 돌보며 하루의 절반 이상을 내가 아닌 타인에게 쏟는 삶이지만, 조기현 작가의 이름 옆에는 여러 타이틀이 붙어있습니다. 영 케어러이면서 에세이 작가, 영화감독. 이런 이력에서 짐작할 수 있듯 간병할 자유가 전제되면 간병 외에 다른 일을 고르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난달 29일 서울시 영등포구의 작업실에서 만난 조기현 작가는 간병할 자유를 떠올린 까닭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일단 가족 중심의 돌봄 문화 자체가 사람한테 너무 죄책감을 많이 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의문이 들었어요. ‘왜 내가 부담감 없이 간병을 기꺼이 할 수는 없는 걸까’. 가족 간병을 하겠다고 하면 사회적으로 손해를 보지 않아야 하는데, 지금은 개인의 손실이 너무도 커요. 직장을 포기하고, 일상을 포기하고, 계속 모든 걸 다 포기해가는 점진적인 포기 상태가 되는 거예요.”
직장을 포기하고, 일상을 포기하고, 계속 모든 걸 다 포기해가는 점진적인 포기 상태가 되는 거예요.
“결국 ‘가족=간병’이라는 사회 규범에 대한 고민을 해야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처럼 그저 안타까운 불행으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사회적으로 가족 간병인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 ‘간병할 자유’를 말했던 거죠.”
그러면서 그는 이 간병할 자유가 계층에 따라 차등적으로 주어지는 간병할 자유의 ‘양극화’ 문제도 우려했습니다. 앞선 기사에서 가족 간병과 일상의 균형을 유지하는 핵심 필요조건으로 제시했던 ‘경제적 여유’와 ‘돌봄 인력’에 따른 격차말이죠.
이 격차는 결국 사회 시스템의 부재 속에서, 개인이 위험 부담을 떠안는 상황이 만들어내는 비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기현 작가는 이런 사회에서는 가족 간병을 맡는 사람이 ‘2등 시민’으로 전락한다고도 강조 했습니다. 간병할 자유가 없는 세상에서는 지위고하에 상관 없이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권이 박탈되고 마는 셈이죠.
“가족 간병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않은 이상 계층이 계속 하락하는 위치에 있을 수밖에 없는 구조예요. (풍족하더라도) 가족을 돌보는 순간 남들이 쓰는 시간만큼 내 시간에 대한 주도권이 사라지잖아요. 그렇다보니 돌봄을 맡은 사람이 결국 ‘2등 시민’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고요. ‘1등 시민’은 가족 간병을 하지 않는 사람이죠. 그나마 소득이 여유로운 사람들이 이 구조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굉장히 큽니다.”
가족 간병에 얽혀 살아가는 사람은 ‘2등 시민’이라는 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이 쓰러진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가족을 옆에서 돌보기로 선택할 때, 우리가 ‘2등 시민’이 되지 않을 방법은 과연 없는 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