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들의 기억법

정치 이야기 나누자면 프레임 난무

폭력적인 발언 목격하며 소모되기만

건강한 토론 나눌 수 있는 장소 부족

양당 택일, 의지 꺾는 이유 중 하나

‘20대를 무당(無黨)이 지배했다.’

이름은 하나인데 별명이 서너개인 내동생처럼, ‘중도’라고 불리고 ‘부동’층이라고도 일컫는 대한민국 20대. 선거철만 되면 캐스팅보트로 막강한 힘이라도 쥐어준 듯 띄우다가 철 지나면 쪼그라든 풍선마냥 사라지는 우리 사회 20대. 여론조사에서 이토록 꾸준히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절반의 무당(無黨)’이 존재하는, 이상한 세대.

이러한 이상현상을 두고, 20대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자평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론 ‘정치 혐오’라고도 자조하기도 한다. 20대를 바라보는, 인생을 조금 더 살았다는 어른들은 현상을 무관심으로 뭉뚱그려 손가락질하거나, 놀고먹는 쾌락만 좇는 ‘정치 무지렁이’로 격하하기도 했다.

취재는 아주 근본적인 호기심, “대체 왜?”에서 비롯됐다. 무당(無黨)이 된 20대를 찾아 나섰다. 그리고 20대 무당을 마주한 우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럴 수도 있지’로 쿨하게 넘어갈 현상이 결코 아니었다. 혹은 반대로 20대를 손가락질하거나, 기성 정치권을 손쉽게 탓하는 일차원적인 분석은 오히려 현실을 오독하는 것이라 결론내렸다.

복잡한 이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고민이 깊었다. 결론은 쉽게 말해보자.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로 했다. 1편은 ‘무당이 된 그들만의 사연’을 20대 청년들이 직접 진단했다. 2편은 20대 유권자를 상대로 ‘표 장사’를 해야 하는 정치인과 20대 무당을 연구하는 전문가를 만나 그들만의 진단을 들어봤다.

솔직히 말해서, 정답은 없다. 세상에 정답있는 질문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신 정도(正道)를 함께 찾아볼 뿐이다. 20대 무당(無黨)이 바라는, 우리 정치사회의 건강한 정도를. →편집자주

‘정치에 무관심한 청년’ 이라는 문장을 챗지피티에 입력한 후 출력된 모습.
‘정치에 무관심한 청년’ 이라는 문장을 챗지피티에 입력한 후 출력된 모습.
취재팀은 지난달, 2차례에 걸쳐 아주대학교 학보사 학생 3명을 대면 인터뷰했고, 국민의힘 경기도당 청년 당직자 7명과 함께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긴시간 토론을 했다. 아래는 이 곳들에서 나온 내용 중 주요 맥락들을 중심으로 ‘단톡방’을 재구성했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가상의 3인을 정해 대화를 요약했다.

“친구들과 모인 자리조차 정치·사회적인 의견을 나누기를 꺼리나?”

“왜 많은 청년들은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가?”

가벼운 질문에서 시작한 답변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서 긴 논의로 이어졌다. 대화에서는 의도적으로 침묵을 택한 20대 무당의 현상이 여실히 드러났다. 모든 일이 그렇듯 이유 없는 현상은 없었다. 20대 무당은 줏대 없는 ‘문제아’가 아니었다. 손쉽게 ‘20대 개새끼론’을 꺼내기엔 꺼림칙한 것들 투성이었다. 기존의 진보와 보수 이념이 이들에게 어울리는지도 의문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0대 무당은 한국 사회가 만들어낸 ‘문제적인 정체성’이었다.

취재팀은 지난달 2차례에 걸쳐 아주대학교 학보사 학생을 대면 인터뷰했고, 국민의힘 경기도당 청년 당직자 7명과 함께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토론을 나눴다. 2024.5.24 /박소연기자 parksy@kyeongin.com
취재팀은 지난달 2차례에 걸쳐 아주대학교 학보사 학생을 대면 인터뷰했고, 국민의힘 경기도당 청년 당직자 7명과 함께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토론을 나눴다. 2024.5.24 /박소연기자 parksy@kyeongin.com

# 서로 씌우는 정치 프레임… 달려들자니 피곤하다

신문은 경인일보(기자): 다 모였으니 대화를 시작해볼게. 질문은 간단해. 너희는 왜 친구들하고도 정치·사회적인 이야기를 하기 꺼리지? 오프라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익명으로 말할 수 있는 온라인 커뮤니티는 어째서 그런 건지도 궁금해. 특히 대학생들은 대부분 에브리타임* 쓰잖아. 그 곳에서도 대화를 꺼리는 현상이 두드러진다더라.

*[에브리타임] 대학생들이 사용하는 익명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 자신이 속한 대학교의 게시판에만 접속할 수 있다. 시간표 공유, 강의 정보 확인을 비롯해 시사·이슈 게시판 등에서 익명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구성됐다. 대학생 10명 중 9명이 사용할 정도로 보편화 된 앱.
*[에브리타임] 대학생들이 사용하는 익명 커뮤니티 애플리케이션. 자신이 속한 대학교의 게시판에만 접속할 수 있다. 시간표 공유, 강의 정보 확인을 비롯해 시사·이슈 게시판 등에서 익명으로 의견을 나눌 수 있도록 구성됐다. 대학생 10명 중 9명이 사용할 정도로 보편화 된 앱.

브로콜리: 난 에브리타임은 그냥 시간표 보는 용도로만 쓴 지 오래야. 특히 시사·이슈 게시판은 제목만 봐도 벌써 피곤해지거든? 극단적인 애들이 진짜 많아서. 물론 극단적인 1%가 99%인 거처럼 보인다는 걸 알고는 있는데, 굳이 온라인 게시판에 내 의견을 이야기하진 않는 것 같아. 괜히 잘못 말했다가는 ‘특정한 정파’로 보일까봐 걱정된달까. 내 말을 100% 이해 못 하고 특정 부분만 가지고 넌 좌파니 우파니, 일베, 펨코, 페미 이렇게 프레임이 씌워질까 하는 우려가 있는 거지.

경기도 내 대학교 에브리타임 시사·이슈 게시판. 주요 언쟁의 내용은 성별이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경기도 내 대학교 에브리타임 시사·이슈 게시판. 주요 언쟁의 내용은 성별이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신문은 경인일보: 안 그래도 한번 에브리타임에 들어가 봤어. 경기도 내 한 대학교 에브리타임 시사·이슈 게시판(6일 기준)이야. 댓글이 많이 달린 게시물의 제목들을 말해볼게. “페미들이 부정할 수밖에 없는 성경의 진리”, “씨X 한남들은 뭔 죄를 지었길래”, “남자들아 명심해라, 한녀는 반드시 오답이다 차라리 국제 결혼을 해라”. 특히 최근 불거진 이른바 ‘서울대 N번방’ 사건으로 언쟁 중이더라고. 주로 언쟁의 내용이 피해자의 성별에 초점을 두고서 남성 피해자가 역차별을 당한다는 맥락. 비슷한 시기에 보도된 여성 커뮤니티 내 외국인 남성 성희롱 사건과 비교를 하는 걸로 게시물과 댓글이 달리더라.

브로콜리: 대학생들이 가장 만만하게 쓰는 커뮤니티가 에브리타임인데, 시사·이슈 게시판은 ‘남초화’가 돼서 들어가기가 꺼려지는 것 같아. 여기서 말하는 남초화는 남성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자주 보이는 무지성 여성혐오 같은 글들이 주류가 되는 것. 그런데 남학생이 없는 여대에서는 아예 정반대의 극단적인 모습이 나타나는 것도 특이하달까. ‘애기어’, 그러니깐 문장 끝에 ‘ㅠㅠ’나 ‘했당’, ‘ㅎㅎ’ 같은 유해 보이는 이모티콘과 말투를 쓰지 말라고 압박하는 거야. ‘연애, 남친 얘기 전시 금지’도 있지.

경기도내 다른 대학교의 게시판을 둘러봤지만 같은 대학교인가 싶을 정도로 비슷한 언쟁을 나누고 있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경기도내 다른 대학교의 게시판을 둘러봤지만 같은 대학교인가 싶을 정도로 비슷한 언쟁을 나누고 있다. /유혜연기자 pi@kyeongin.com

기타치는 너부리: 근데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이야기하느냐도 중요한 거 같아. 만약 서울대 N번방 사건에 대해 내 의견을 ‘소신 발언 ㅇㅇ’ 이렇게 제목 달고 지인들이 보는 인스타에 올려라? 아마 대부분 안 올릴걸. SNS는 주로 일상용이나 맛집·여행사진 올리는 용으로 쓴달까. 물론 네이버 블로그에 믿을 수 있는 서이추(서로 이웃)한 사람들 대상으로는 마음 편히 소신의견을 올리는 게 가능해. 결국 SNS에 정치·사회적 발언을 하지 않는다는 건데, 온라인 공론장이 특정 사람, 그러니깐 극단적인 정치 고관여층이 지배했기 때문인 듯. 그런 사람들만 눈에 잘 띄니깐…. 혹시라도 내가 A에 대해 의견을 말했을 뿐인데, 에브리타임 같은 곳에서 봤던 A에 대해 극단적인 이야기를 하던 사람과 겹쳐 보일 수 있을까봐 걱정하는거지.

신문은 경인일보: 공통적으로 ‘부정적인 누군가’처럼 보일까 하는 우려가 있단 거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하면 오히려 그때부터 코끼리 이미지가 머릿속을 지배한다는 데서 나온 조지 레이코프 교수의 유명한 ‘프레임 이론’도 있잖아. 정치권에서 프레임을 만들어 경쟁자를 부정적 프레임에 가두는 보편적인 정치공학적 전략이 일반 시민에게까지 영향을 준 것 같달까. 기성 정치를 무작정 탓하는 건 아니지만, 정당의 책임도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겠네.

국민의힘 경기도당 청년 당직자 7명과의 대화방. 다른 정치성향을 가진 타인과 대화하는 일에 피로감을 표하는 모습이다. /한규준기자 kkyu@kyeongin.com
국민의힘 경기도당 청년 당직자 7명과의 대화방. 다른 정치성향을 가진 타인과 대화하는 일에 피로감을 표하는 모습이다. /한규준기자 kkyu@kyeongin.com

하오카: 난 무당층은 아니고 정당에 활동하는 청년 당원이지만, 그래도 온라인에서는 정치적 이슈에 말을 보태지는 않아. 일단 너희가 말한대로 극단적인 애들이 온라인을 지배했잖아. 모든 게 프레임 안에서 재생산되고, 프레임을 가지고 싸우잖아. 상황이 이런데 익명으로 토론에 참여해서 말도 안 되는 소리에 반박하고 또 재반박하고... 이런 과정이 심적으로나 체력적으로나 너무 소모적인 거 같아. 내 일 하기도 바쁜데 굳이 논쟁적인 글을 써서 피로감을 ‘내돈내산’ 할 필요는 없는 거지.


# 결론이 정해져 있는 이야기 ‘담론의 성역화’

계층, 진영, 성별에 따라서 편을 나눈다. 보수를 피력하자면 일베로 몰이 당하고 젠더 이슈는 ‘잠재적 가해자’ 라는 규정이 입을 막아버리는 형국. /한규준기자 kkyu@kyeongin.com
계층, 진영, 성별에 따라서 편을 나눈다. 보수를 피력하자면 일베로 몰이 당하고 젠더 이슈는 ‘잠재적 가해자’ 라는 규정이 입을 막아버리는 형국. /한규준기자 kkyu@kyeongin.com

기타치는 너부리: 근본적으로는 20대들이 정말로 효능감을 느끼게 해줄 만한 공론장 자체도 없는 느낌이야. 지금은 어떤 의견을 표출했을 때 쓸모없는 언쟁하느라 소모되는 시간이 굉장히 아깝게 느껴지거든. 게다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소통할 수 있는 공간들에서는 어떤 특정한 사회 이슈를 자꾸 성역화하려는 사람들이 보인달까. 계층, 진영, 성별에 따라서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다 보니깐 토론 자체가 안 되는 거지.

하오카: 특히 보수는 ‘일베몰이’당할 위험이 있기도 하고…. 젠더 이슈에 대해 말을 좀 해보려 해도 ‘남성은 잠재적 가해자’라고 규정해버리고 시작하면 이야기를 시작할 수 조차 없는 거지.

브로콜리: 나도 어떤 담론이 성역화되는 것에는 반대해. 아까 나온 ‘서울대 N번방’ 사건이 전형적인 예시 같거든. ‘서울대 N번방’이 보도되고, 며칠 뒤에 또 한편에서는 여성 커뮤니티에서 외국인 남성을 성희롱한 게 드러났잖아. 그런데 상황이 참 이상하게 흘러갔어. 두 사건이 남녀갈등의 연료가 됐달까. 범죄 자체에 대한 고민보다는 피해자, 가해자가 여성이냐 남성이냐를 두고 아주 미세하게 좁혀서 언쟁하고 있어. 결국 싸우고 싶은 사람은 어떻게든 시빗거리를 만들어서 소모적인 논쟁으로 이끌고 가고 싶어하는 거 같아. 상황이 이러니깐 뭐 제대로 된 얘기를 해 볼 수가 없달까. 남녀 간의 어떤 진영 논리로서 모든 정치·사회적인 문제를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과열된 거 같아.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는 상황을 공통분모로 생각하고 방지책을 고민해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한데 말이지.

신문은 경인일보: ‘담론의 성역화’가 건강한 논의 자체를 막아버린다는 거구나. 특히 20대는 젠더를 각각 성역화하면서 대화를 막는 느낌이 크네.

기타치는 너부리: 난 어느 정도 공감해. 만약에 저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은데, 성별 대결식의 저런 댓글들이 주된 분위기라면 특히 저 사건의 피해자격인 여성들은 발언하기를 더 꺼릴 거 같아. 어떻게 보면 정치사회적으로 여성들이 발언을 더 조심하는 느낌이 강해. 누군가가 정치적인 발언을 했을 때 여성이라는 특징만 잡아서, 그 부분에 포커스를 두는 경향성이 보인달까. 꼭 성별 뿐이 아니야. 지역에서도 그렇지. 나는 고향이 전남 광양인데, 고향을 말하자마자 ‘그럼 좌파겠네’라고 하는 말도 들어봤어. 대구라고 하면 덮어놓고 ‘보수꼴통’이라고 하겠지? 그런 식으로 흐름이 이어지는 분위기니깐 대화를 하기 싫어져. 성역화라는 게 자신의 논리를 절대 선으로 두고 그걸 비판하면 안 되는 분위기로 몰아가는 것 같아. 그러니깐 자기를 집단에 환원시키고 상대는 물론이고 모든 개개인을 전부 하나의 집단으로 환원시켜서 ‘나는 여자’, ‘너는 남자’. 이제 너는 우리의 적이다, 라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안타까운 상황이지.


# 나는 복잡한데 선택지는 두 가지 뿐… 차라리 침묵한다

하오카: 가만 보면 현실에서는 온라인 상에 저 게시물이나 댓글들처럼 말하는 사람은 없잖아. 근데 또 반대로 오프라인에서는 아예 이런 대화를 꺼리는 분위기라는 게…. 결국 온라인에서 보이는 극단적인 현상이 실제 현실로 넘어와서 지금과 같은 이상한 현상을 만든 거 같아. 지금 20대들이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기 꺼리는 게 사실 잘못 해석될 여지도 커. 마치 20대는 정치에 무관심하거나, 생각 없는 애들처럼 보일 수 있달까? ‘정치적’이라는 게 나쁜 게 아닌데, 정치적인 이슈에서 정치적으로 발언하면 리스크가 생기는 게 진짜 피곤하지.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할많하않’의 상태가 된 거 같아. 우리가 그냥 침묵하고 있는 게 아니란 거야.

신문은 경인일보: 그렇구나. 그럼 너희들이 말한 문제점을 정리해보면 ① 극단적인 ‘어그로’처럼 보일까봐 정치적인 발언을 조심하게 된다는 것 ② 소모적인 논쟁 속에 ‘전략적인 침묵’을 하고 있다는 것들이네. 그럼 ‘전략적인 침묵’이 20대 무당층과도 연관이 있을까? 지난해 1월부터 12월까지 성인을 대상으로 지지정당을 조사했던 여론조사(한국갤럽)의 평균을 보면, 20대는 무당층이 48%라고 나타났어. 절반가량의 20대는 지지하는 정당이 없는 셈이지.

지지하고 싶은 정당이 없는 것도 문제다. 진보와 보수 두 가지 선택지 안에서 각자의 성향을 다 설명하기란 곤란하다. /한규준기자 kkyu@kyeongin.com
지지하고 싶은 정당이 없는 것도 문제다. 진보와 보수 두 가지 선택지 안에서 각자의 성향을 다 설명하기란 곤란하다. /한규준기자 kkyu@kyeongin.com

기타치는 너부리: 연관성이 있는 것 같아. 20대가 정치·사회 분야에서 ‘전략적인 침묵’을 택한 것과 정치를 전문적으로 하는 ‘정당’을 지지하지 않는 현상에도 분명 상관관계가 있어. 진보와 보수의 양극단에 있는 정치고관여층이 목소리를 크게 내고, 또 여기에 정당이 반응해주면서 우리 같은 사람들이 선택할 게 없달까. 나 같은 경우도 지지하고 싶은 정당이 없거든. 진보면 민주당, 보수면 국힘 이렇게 일차원적으로 나눠서 따라가는 게 (나한테) 맞는 건지도 의문이고. 나처럼 중도인 사람 입장에서는 난감하지.

브로콜리: 한국에서 지금처럼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게 의미가 있나 싶어. 왜냐면 진보라고 해도 진보적인 색채를 명확하게 띠고 있는 정당이 크게 존재하지 않고, 보수라고 해도 (우리가 원하는) 보수의 선택지를 가진 정당이 적잖아. 예를 들어 젠더 이슈에 대해서는 굉장히 좀 미온적인 색채를 띤다고 하더라도 진보적 담론인 보편적 복지 혹은 정부의 적극적인 시장 개입에는 찬성하는 친구들이 분명히 있거든.

하오카: 확실히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굉장히 어려워진 사회인 건 분명해. 보수도 반공과 박정희를 내세우는 시대는 끝났어. 하지만 기성 정당들이 이런 흐름을 빠르게 캐치 못 하는 것 같기도 해. 난 정당에서 오래 계셨던 어르신들 이야기 듣다 보면 답답할 때가 진짜 많아. 청년 당직자들이 어떻게든 바꿔 보겠다고 발버둥치는 게 옛날 보수와 지금 보수의 간극은 어마어마하거든. 당 내부에서 청년 보수들이 더 크게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하는데….

브로콜리: 당직자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네. 근데 사실 한국은 엄밀히 말해 미국처럼 양당제는 아니잖아? 어찌어찌해서 내 성향과 맞는 정당을 찾는다 해도, 그 정당이 과연 유효한지도 의문이 들거든. 그 정당이 ‘과연 제도권 내에서 유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가?’. 누구도 자신의 표가 사표가 되길 바라진 않잖아. 시험 문제에 비유하자면, 보기 자체는 많은데 정답은 딱 한 개로 정해져 있는 거지. 되게 ‘답답한 시험지’ 같은 상황이랄까. 이것저것 골라도 될 거처럼 보이지만, 실은 답은 두 개의 유력한 보기 중 하나라는 거야.

신문은 경인일보: 20대의 ‘전략적인 침묵’과 ‘무당층’, 기타치는 너부리가 이야기한 상관관계를 원인과 결과로는 명확하게 증명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너희가 말한 여러 가지 영향들이 모여서 무당층이란 현상으로 나타난 건 분명하네. 세상이 변했는데도 계속 ‘답답한 시험지’를 내는 출제자는 대체 무슨 생각일까. 이런 현상을 조사한 연구자나 청년 정치인들의 생각은 어떤지도 궁금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