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데
공부마저 이 시대의 것을 하기는 싫었어요.
저의 오랜 취미 중 하나가 SF 영화를 보는 겁니다.

이태수 교수
이태수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낯선 것에 자극받고 근원을 탐구하는 것에 끌렸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태수 교수는 어린 시절부터 낯선 것에 자극받고 근원을 탐구하는 것에 끌렸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밤나무 많은 율곡동서 외항선 보며 자라

성장기 왕성하던 호기심 책으로 달래고

박홍규 교수에 영향 받아 독일 유학길

‘우리’ 중요한 한국, 독일서 ‘개인’ 배워

“오랜 취미는 SF 영화… 고전에 끌려요”

아임프롬인천 이번 호 주인공은 서양 고전 연구가인 이태수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다. 이태수 교수는 해방직전인 1944년 율목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인천 사람이다.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낯선 것에 자극받고 근원을 탐구하는 것에 끌렸다고 자신을 설명한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 고전을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을 때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스 사람도 모르는 그대 그리스어를 마치 골목길을 헤매듯 한 글자 한 글자 단어의 원형을 찾아가며 익혔다. 동네 언덕에 올라 인천항을 드나드는 거대한 외항선을 바라보며 마도로스를 꿈꾼 시기도 있었다. 그의 기억 속 율목동은 흐릿했다. 하지만 철학자 이태수를 설명하는데 율목동이 어쩌면 훌륭한 나침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천 율목동에서 태어났어요. 제가 좀 머리가 커지고 난 뒤에 생가를 찾아갔어요. 중학교 때까지만 하더라도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생가도 거리도 모조리 바뀌어서 도저히 그 지역을 찾아낼 수가 없었어요. 집 근처에 일본 사람들 공동묘지가 있었고요. 나중에 어린이 놀이터가 생기기도 했고 그런데 다 없어졌죠. 아쉬워요. 없어지는 건 다 아까워요.”

이태수 교수가 태어난 율목동은 옛 부촌(富村)이다. 지금도 한옥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다. 우리말로 밤나무골 혹은 밤나무굴로 불린 마을이다. 의사이면서 향토사학자 신태범(1912~2001)의 ‘인천한세기’는 율목동에 대해 “야산에 밤나무가 많았던 언덕이 바로 현재 율목동이 자리하고 있는 일대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인천을 개척한 선대는 서슴지 않고 이곳을 밤나무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관가에서는 유식하게 한자로 율목리라고 했음직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고향 율목동의 골목 풍경은 이태수 교수의 기억 속 아스라이 남아있다. 그럴싸한 장난감이나 놀이터가 따로 없던 시절, 골목에 생긴 조그만 자투리 공간, 무너진 집터는 꼬마들의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이태수 교수가 태어난 율목동의 현재 모습. 우리말로 밤나무골 혹은 밤나무굴로 불린 마을이라 전해진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이태수 교수가 태어난 율목동의 현재 모습. 우리말로 밤나무골 혹은 밤나무굴로 불린 마을이라 전해진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자연 발생적인 골목이 많았어요. 행정이 계획을 가지고 기획력을 발휘해 가지고 정비한 구역은 아주 적었던 시기였겠지요. 인프라 구축을 할 수 있는 경제적 힘도 없었을 것이고, 너도나도 도시로 몰려들면서 행정력이 제대로 완비가 안 됐을 때 집을 짓고, 자연스럽게 골목이 생길 수밖에 없었죠. 그 골목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발생한 골목이니 자연스레 쓰레기도 쌓이고, 술 취해 지나가던 사람이 밤에 거기 엎어지기도 하고 토사물도 뱉어내고, 아주 지저분한 곳이지만, 그곳이 꼬마들의 길, 말하자면 우리들의 모임 장소였어요. 반대로 큰길을 우리는 ‘행길’이라고 불렀는데, 행길은 어른들의 길이었던 것 같아요. 행길에 나가서 노는 거는 위험한 일이었고 어른들한테 야단도 맞았죠.”

이태수 교수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동네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언덕에는 율목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이태수 교수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동네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언덕에는 율목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 /김성호기자 ksh96@kyeongin.com

이태수 교수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지난 13일 율목동을 찾아가 이 동네에서 가장 높아 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언덕 위에는 율목도서관이 자리를 잡고 있다. 도서관의 간단한 이력을 설명하는 표지판이 보였다. 율목도서관 일대는 인천항 개항 이후 해관 통역관으로 일하던 중국인 우리탕(吾禮堂)의 과수원 부지였다. 정미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사업가 리키다케가 인수해 자신의 주택 겸 별장을 신축했다. 이곳은 ‘역무별장’이라고도 불렸다. 광복 후 미군이 숙소로 사용했다. 일제강점기 인천부립도서관을 이곳으로 옮겨와 1946년 12월 2일 시립도서관으로 개관했다. 시립도서관은 2008년 10월까지 운영되다가 구월동으로 신축 이전해 2009년 6월23일 미추홀도서관으로 명칭을 변경해 개관했다. 시립도서관이 떠난 이곳은 기존 건물을 고쳐 2011년 7월8일 율목도서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리키다케 별장은 퍽 큰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 도서관 범위를 훨씬 넘어서 주변 주택이나 교회 등을 아우를 정도였다고 한다. 권세가의 별장터여서 인지 인천항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풍광이 퍽 좋았다. 실제로 도서관 주변에는 정원을 장식하는 데 썼던 것으로 보이는 석등이나 조각, 정원석 등이 상당수 남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도서관에서 조근 내려가면 체육공원과 농구장, 어린이 공원이 나타난다. 공원 벤치에 앉아 삼삼오오 휴식을 취하고 있는 어르신들에게서 이곳이 옛날에는 ‘풀장’이었고, 훨씬 이전에는 일본인 묘지가 있었다는 설명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공원 한 켠에는 ‘율목어린이 공원 준공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는데, 기념비에도 비슷한 설명이 쓰여있다. 어르신들의 설명이 아니었다면 지금 공원의 모습에서 풀장의 흔적이나 묘지를 떠올리기는 힘들어 보였다.

공원 아래쪽은 흔히 ‘빌라’라고 부르는 주택들이 밀집해있다. 이태수 교수가 언급한 어린이들만 뛰어 놀 수 있던 차도 다니지 못하던 작은 골목의 차 한대만 겨우 지날 수 있는 좁은 길로 남아있었다. ‘경축, 재개발 후보지역 확정’ ‘도로정비공사’ 현수막으로 현재 마을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태수 교수가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 받은 영향이 컸다고 한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태수 교수가 서울대 철학과에 진학한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 받은 영향이 컸다고 한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태수 교수는 충남 논산 출신 이강우씨와 어머니 구숙희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님 두 분 모두 교사였다. 어머니는 1919년생으로 인천 태생이었고, 아버지는 충남 논산 출신으로 어머니보다 2~3세 많은 연배였다. 아버지는 중등교사 어머님은 초등교사로 일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 아버님은 폐결핵으로 돌아가셨고, 그 이후 어머니는 교사직을 그만두고 남매를 돌봤다. 수예점을 운영했는데, 자수를 놓은 손수건 등이 주요 물품이었다. 미군이 주요 고객이었다. 가내수공업 형태로 직원을 제법 여럿 두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1·4후퇴 직후 신흥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창영초나 신흥초에는 그나마 생활 형편이 괜찮은 학생들이 다녔고, 인근 송림초에는 피란민 가족 아이들이 많았다고 그는 기억했다. 그는 신흥초를 다녔지만 중·고등학교를 거치는 동안 그와 가깝게 지낸 친구들은 신흥이나 창영이 아닌 실향민이 많았던 송림초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한 학급에 학생이 100명이 넘는 게 보통이었어요. 전쟁 직후 교사도 제때 공급이 안 됐고, 교사를 양성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거든요. 교사 중에 상이군인 출신들도 있었고요. 한 반에 피난민, 전쟁고아 등도 많았어요. 그때 뭐 제대로 통계 조사를 할 수 있었던 때도 아니니 내 짐작으로는 반은 훨씬 넘었을 것 같아요.”

이태수 교수는 일반화하기 힘든 얘기라면서도 인천 출신보다 피란민 출신이 더 치열하게 살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인천중학교 제물포고가 인천에서 들어가기 힘든 학교였는데 창영·신흥 졸업생 가운데 한 학급이 넘는 학생이 진학했고, 그리고 송림에서는 그 절반도 안 될 정도의 인원이 입학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서울대 들어가고 보니까 대부분 송림 출신이더라고요.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 보다 더 센 거였죠. 어른들 세계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피란민으로 내려와 생활을 전투처럼 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더 잘 살게 돼. 인천의 원래 본토에서 유복한 정도의 살림을 꾸린 사람들보다는 그 타지에 와서 애써 가지고 집안을 읽은 사람들이 더 크게 성공을 했다 는 걸로 읽힐 수가 있어요”

이태수 교수가 서울대 철학과 진학한 계기는 고등학교 시절 받은 영향이 컸다고 한다.

“이게 철학과라는 데가 또 이게 이게 심상치 않은 학과 아니겠어요. 그렇게 즐겨 가는 학과가 아니잖아요. 문화적 깊이도 있고 잘 사는 유럽을 고교 시절 꽤 동경했어요. 프랑스나 독일에서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어요. 또 많이 읽었던 작가가 독일 작가였어요. 그때 실존주의 철학이나 문학 이런 게 유행하던 시기였고 프랑스 문학도 읽고 그랬더랬죠. 그리고 고등학교 때 독일어를 가리키던 선생님 두 분이 다 서울대 철학과 출신들이었어요.”

이태수 교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평생 사귈 친구를 모두 사귄 거 같다고 말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태수 교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평생 사귈 친구를 모두 사귄 거 같다고 말했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태수 교수는 중고등학교 시절에 평생 사귈 친구를 모두 사귄 거 같다고 말했다. 특히 고교 시절 인연을 맺은 친구들과 오래 만남을 이어갔다고 한다. 유병우 전 외무부 아주국장, 유필우 국회의원이 그의 절친이다. 인천대 시립화 주역인 고 김승묵 변호사는 이태수 교수의 여동생과 결혼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모임 이름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동아리처럼 같이 그룹을 이루고 지냈다. 음악도 듣고 같이 책도 읽고 이야기도 하고 그렇게 지냈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는 새 책을 빌려주는 대여점이 있었다. 몇 푼 안 내고 책을 빌려보는 것으로, 말하자면 정신적 영양 공급을 받았다고 했다. 지금 지금 고등학생들보다는 독서를 참 많이 했던 시절일 거라고 했다. 당시 볼거리, 즐길 거리가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T.V도 없었고 라디오도 모든 집에 있던 시절이 아니었고, 프로그램도 풍성하지가 않았었던 시절이었다.

성장기 학생이 지적인 호기심을 달래주는 수단은 사실상 책이 유일한 통로였다.

“지금은 뭐 이제 책 안 읽어도 재미있는 게 젊은 애들 유혹할 수 있는 게 얼마든지 많아요. 그 시절은 정말 책이 다른 세계로 나가보는, 자기가 살고 있는 그 옹색한 현실 바깥으로 나가보는 유일한 통로였어요. 닥치는 대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

고교 시절 친구들과는 서울대에 입학한 이후에도 만남을 이어갔다. 기차로 통학했는데, 학교를 마치고 서울역에서 만나서 함께 기차로 하교했다. 기차를 타고 동인천역에 내리면서부터 술집 찾아다녔던 시절이 기억이 난다고 했다. 동인천역 일대 저렴한 술집이 친구들과의 만남의 장소였다.

동인천역 주변이나 부둣가나 해변에서
‘카바이트’로 숙성시킨 막걸리와 소주를 마셨어요.
지금 보면 다 악주(惡酒)였네요.

이태수 교수

어엿한 간판 달린 술집이 아니었다. 포장마차 보다 조금 나은 정도일까. 주전자 1개 이상씩은 마신 것 같다고 기억했다. 딱 봐도 단백질이 별로 없는 조악한 안주였다. 부두에서는 이름도 모를 생선으로 생선들이 잔뜩 들어있는 잡어탕을 주로 안주 삼았다. 저렴한 중식당도 많이 찾아갔다. 짜장면 안주에 ‘빼갈’도 자주 마셨다.

이태수 교수의 지적인 호기심을 달래주는 수단은 사실상 책이 유일한 통로였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태수 교수의 지적인 호기심을 달래주는 수단은 사실상 책이 유일한 통로였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태수 교수가 서울대 철학과 학생으로 공부한 시기는 1963년부터 1967년까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의 후폭풍이 이어지던 시기였다. 이태수는 대학 재학시절 한 번도 학기가 제대로 온전히 끝난 적이 없다고 기억했다. ‘데모’ 때문이었다. 매년 5월 말부터는 학교를 거의 못 나갔다. 2학년부터 4학년까지 매번 학교가 폐쇄됐다.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1960년대 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내내 충실하게 강의를 할 수 있는 교수진이 많지 않았던 것 같아요. 서울대도 마찬가지였지요. 그 시절 ‘교수님들’ 세대는 사실은 일제 때 공부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학술 서적도 원문의 언어가 아닌 일본어로 읽는 것을 편하게 여겼던 분들이었죠. 학문을 직접 만나고 수용하는 기회는 갖지 못했던 분들이 많았어요. 일본 사람이 전해준 걸 가지고 학문적 ‘중탕’을 하는 분들이었죠. 영어로 쓰인 책을 직접 번역하는 것보다는 일본 사람이 일본어로 번역한 책을 번역해서 사용하고 그랬던 시절입니다.”

이태수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를 다니면서 “평생의 스승을 만났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평생의 스승은 철학과의 고(故) 박홍규 교수였다. 이태수는 고대 철학을 공부하려고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같은 책을 읽어도 전혀 감흥이 없었다. 고전을 공부하게 된 것은 박홍규 교수의 역할이 컸다. 이태수도 “가르치는 선생님이 또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 사실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한다”고 했다.

박홍규 교수 강의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차츰차츰 동화됐다. 고대 그리스 철학을 공부를 하고 그때 이제 라틴어, 그리스어 교재를 도서관에서 빌려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학교가 아닌 교수님 댁에서 ‘강독’ 공부를 했다. 제자처럼 공부했다.

“교수님이 특명을 주셨어요. 너는 외국에 가면 철학은 물론 한국에서 할 수 없는 고전 문헌학 공부를 해 가지고 와라. 한국에서도 제대로 공부할 수 있게끔 터를 닦는 게 네가 평생 교수하면서 할 일이다 라고요”

스승의 권유로 1973년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가난한 시절, 갑부가 아니면 외국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야 유학을 갈 수 있었다. 이태수는 ‘DAAD’라는 독일 정부가 주는 국가장학금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고대 철학을 공부한 학생이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육을 받은 기록이 없다는 사실에 학교 측이 의문을 가졌다. 그가 선생님 댁에서 이어간 공부는 정규 교육이 아니었기에 기록에 남지 않았던 것인데 학교 측은 수업이 가능할지 확인을 요구한 것이다. 다른 학생보다 빨리 그리스어와 라틴어 교육을 받은 그는 철학과 고전문헌학 공부를 이어갈 수 있었다. 철학과에 적을 두었지만 고전문헌학과에 서 살다시피 했다. 한국에서 공부해 온 경험이 있어 현지 학생들을 빠른 시간에 따라잡았다.

이태수 교수는 독일의 선진적인 복지제도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태수 교수는 독일의 선진적인 복지제도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유학생 신분이었지만 그는 독일의 선진적인 복지제도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독일에서의 대학교 대학원 생활이 한국의 대기업 직원의 생활보다 더 좋을 수 있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복지제도가 촘촘했다. 독일 유학길에 아내와 첫째 자녀가 함께 동행했는데, 유학생 가족이 마음껏 생활해도 부족함이 없을 방이 4개인 기숙사가 주어졌다. 기숙사 비용은 장학금 일부를면 떼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이태수 교수는 한 선배의 이야기라며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당시 독일에 유학하려면 흉부 엑스레이 사진이 필수였다고 한다. 폐질환 환자의 독일 입국을 찾아내겠다는 의도였는데, 폐결핵이 있던 선배가 다른 사람의 엑스레이 사진을 위조해 유학길에 올랐던 것이다. 독일은 1년에 두 차례씩 유학생을 포함한 모든 국민의 엑스레이 검진을 하는데, 입국 후 폐결핵이 발견됐다. 멀쩡한 학생이 학교에 다니다 폐결핵에 걸리니 학교와 보건당국은 비상에 걸렸다. 역학조사에 들어갔지만 원인을 찾을 수 없었다. 해당 지자체는 기숙사가 위치한 곳의 찬바람 때문에 폐결핵에 걸린 것으로 의심된다면서 더 좋은 환경의 집을 구해줬다고 한다.

독일 유학을 통해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돈을 쓴다는 걸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을 하지 못한 우리 또래는 ‘태극기 부대’가 되고 말았죠.

이태수 교수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을 했어요. 개인으로 행복하게 살아갈 국민의 권리가 있다고. 우린 전후 세대였기 때문에 개인은 국가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내어 놔야 한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초등학교 시절 아침 조회에 ‘우리의 맹세’라는 걸 하기도 했거든요. 지금 복지가 부족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국가가 그런 일을 해주리라는 기대조차 하지 않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저는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더 요구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국전쟁 이후 우리 세대에게 ‘영웅’은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치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런 미담이 우리가 아는 전부였어요. 우리 세대가 지금 젊은 세대하고 같은 세상을 살지만 바탕이 다른 겁니다. 저는 독일 유학을 통해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돈을 쓴다’는 걸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을 해보지 못한 우리 또래는 ‘태극기 부대’가 되고 말았죠. 이러다 나라 살림 망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태수 교수는 언제나 낯선 것에 이끌렸고 호기심을 자극받았다고 한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태수 교수는 언제나 낯선 것에 이끌렸고 호기심을 자극받았다고 한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모교 스승의 부름을 받고 1981년 귀국, 이때부터 서울대 교수로 강단에 섰다. 1989년에는 교무부처장이라는 학교 내 보직을 맡기도 했다. 1994년 그러던 중 교육부 고등교육 정책을 담당하는 대학정책실장을 맡으며 공직자로도 일한다. 이태수 교수가 대학정책실장 직을 처음 제안받은 것은 1993년이다. 문민정부 초기 어느 날 오병문 교육부 장관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장관은 전화로 대뜸 “교육부 장관입니다. 할 얘기가 있고 한데 장관실에 놀러 오시죠”라고 했다. 교수직을 그만두고 1급 공무원으로 오라는 얘기였다. 이태수 교수는 “제가 할 수 있는 아니다”라며 거절했다. 이후 또 제안이 왔다. 김숙희 장관 시절이었다. 학교 측을 통해 연락이 왔고, 학교를 휴직하고 딱 1년만 파견하는 조건으로 수락했다. 2008년 서울대에서 명예퇴직하고 인제대 교수 겸 인간환경미래연구원장으로 일하며 연구에 매진했다.

이태수 교수는 언제나 낯선 것에 이끌렸고 호기심을 자극받았다고 한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진로를 선택해야 할 시기에도 경영대학이나 법대에는 관심이 가질 않았다. 한때 마도로스가 되어 태평양을 횡단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낯선 시간에도 이끌렸다. 현재가 아닌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과거나 먼 미래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꼈다.

누구는 절 더러 ‘투어리스트’처럼 인생을 산다고 해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왜 꼭 현실에 갇혀서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하고 살까요.

이태수 교수
이태수 교수의 오랜 취미 중 하나는 SF 영화 보기. 현실 얘기에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이태수 교수의 오랜 취미 중 하나는 SF 영화 보기. 현실 얘기에는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한다. /김용국기자 yong@kyeongin.com

“어차피 현재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데, 공부마저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것을 하기는 싫었어요. 저의 오랜 취미 중 하나가 SF 영화를 보는 겁니다. 현실 얘기는 별로 재미를 느끼지 못해요. 아주 먼 미래 얘기나 아주 오래 지난 과거의 얘기, 상상력을 동원해야 그림이 그려지는 그런 것들 나는 지금도 그런 거에 이끌려요. 고전을 공부하면서도 그랬어요. 고전기를 넘어서 문자 이전의 시대, 더 거슬러 올라가고, 자꾸 자꾸 거슬러 올라가는 게 제 관심사 입니다. 누구는 절 더러 ‘투어리스트’처럼 인생을 산다고 해요.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런 마음을 갖고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왜 꼭 현실에 갇혀서 이것이 전부라고 생각을 하고 살까요. 스스로를 가둬놓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머릿속에는 우주의 시작부터 끝까지 담아낼 수 있는 크기의 호기심이 있어요. 견강부회고 억지인 것 같지만 항구가 있던 도시 인천에서 자란 것이 나의 성향과 연관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