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와 닮은 점 많은 인천, 역외특구 지정 해볼만하다"
부평 출생… 주안서 어린시절 보내
교사였던 아버지, 퇴직후 원목상으로
유복한 환경 덕, 해외문화 많이 접해
제대후 유럽 여행 "설렘 잊지 못해"
대학 마치고 삼성물산서 첫 사회 생활
국내 1세대 벤처캐피털 기업으로 이직
싱가포르서 오랜 근무… 컨설팅社 창업
"여전히 외국서 국내 투자 까다로워"
"시행착오 나로 충분… 길잡이 되고파"
1970~1980년대 인천 남구(현 미추홀구) 주안은 경제활동의 중심지였다. 1900년대 초반부터 주안 일대에 퍼져 있던 대규모 염전은 1970년 매립공사가 시작되면서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는 국가 주도 산업단지인 '주안공단'이 들어섰다. 공단 주변에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주안사거리와 시민회관을 중심으로 도심이 성장했다.
아임프롬인천 서른 번째 주인공 원대로(54) 윌트벤처빌더 대표의 유년 기억은 이곳 주안에서 시작된다. 그는 국내 스타트업의 동아시아 진출 컨설팅과 유망 기업의 금융 투자, 경영 등을 지원하는 벤처캐피털(VC) 스타트업을 이끌고 있다.
한국·싱가포르 벤처 투자 전문가인 원 대표를 만나고 관련 인물·자료를 찾아보니, 40~50년 전 인천 주안의 변모와 활기를 빼놓고 그를 온전히 설명하기 힘들었다. 소년 원대로가 주안에서 세계를 꿈꾸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윤택했던 도시, 주안에서의 삶
원 대표는 1970년 외가가 있는 인천 부평에서 태어났다.
그의 외조부모는 한국전쟁 때 황해도에서 인천으로 내려와 터를 잡았다. 비슷한 시기 그의 조부모도 함경도에서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늦둥이 막내 아들이 귀한 손주를 낳자 고령이었던 그의 친할머니는 '원대로' 다 이루었다며 기뻐했다. 당시엔 순한글 이름이 생소했던 터라 자연스럽게 큰 길(大路)이라는 의미의 한자를 붙였다.
인천에서 태어났지만 원 대표 가족은 충북 청주에서 그가 5살이 되던 해까지 살다 상경했다. 고등학교 역사교사였던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학교로 발령받으면서다.
1977년 주안국민학교(현 주안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그의 가족들은 인천 남구 주안에 자리를 잡았다. 부친은 학교를 그만두고 목재 수입 사업에 나섰다. 아파트 건설 붐이 일기 시작한 때다. 인도네시아에서 원목을 수입해 아파트 건축·인테리어 자재로 팔았다.
공장은 인천 주안역 뒤편 북구(현 서구) 가좌동에 자리했다. 가족은 시민회관사거리 쪽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에는 주안공단으로 출퇴근하는 직장인과 가족들이 모여 살면서 양옥 형태 주택이 많이 지어졌다.
인천시가 집필한 '도시마을 생활사-주안동'에는 '주안공단'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1970년대 북구 가좌동에는 한국제재공단이 조성됐고, 주안지구로 분류됐다. 이 공단에는 나왕·미송 등 목재를 다루는 업체 30개가 입주해 있었다.
5대째 인천 주안국민학교 인근에서 살아온 구본형(61)씨는 1970년대 중반 주안을 '윤택했던 마을'이라고 표현했다.
구씨는 "70년대부터 옛 초가집과 기와집이 헐리고 슬래브지붕으로 된 양옥집이 많이 들어서며 신도시처럼 변해 주안은 잘사는 동네로 인식이 됐다"며 "주안공단에 다니던 월급쟁이들이 주택을 사서 주안사거리쪽에 자리를 잡고 자가용으로 출퇴근을 했다"고 설명했다.
주안에는 자연스럽게 중산층 가정이 모여 살았다. 원 대표는 유복한 가정환경 덕분에 또래에 비해 해외 문화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1970년대 인천 남구에 한국스카우트 미추홀지역대가 설립됐다. 학교 단위로 운영되는 스카우트보다 지역대의 활동이 더 활발했다. 주안에 모여 살던 이웃들은 각 가정에서 비용을 갹출해 매주 일요일 버스를 빌려 스카우트 활동을 했다고 했다.
원 대표는 용산 미군 부대에 방문해 미군 자녀들과 보이스카우트 활동을 함께한 경험도 있다. 그는 "탄산음료가 귀했던 시절에 음료판매 트럭에서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음료들이 펼쳐져 있었고,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금발머리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81년부터 인천에서 스카우트 활동을 해온 최해경(53)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 사무처장은 "당시에 스카우트 활동을 하러 아이들이 미군부대에 들어가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미군부대에 근무했던 박상도 미추홀지역대 초대 단장이 스카우트 단원들과 함께 용산 미군 부대에 방문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에 따르면 인천지역 스카우트는 1923년 조선소년군 인천지부를 뿌리로 한다. 이후 1937년 일제에 의해 보이스카우트 운동은 강제해산됐다. 1947년 인천보이스카우트 재건위원회가 활동을 시작했다.
1970년대 말부터 지역 단위의 스카우트 활동과 초·중·고등학교 단위의 스카우트 활동이 활발해졌다. 1985년 한국스카우트 인천연맹 소속 대원은 2만3천여명에 달했다. 1986년에 경북 경주에서 열린 잼버리대회에는 인천연맹 소속 대원 300명이 참가했다.
■ 배낭여행 1.5세대, 세계로 첫발을 내딛다
원 대표는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91학번으로 입학했다.
국내에서는 1989년 1월 해외 여행 자유화가 이루어졌다. 원 대표는 군 제대 후인 1995년 3주간 서유럽으로 첫 배낭여행을 떠났다. 당시 그는 "해외여행을 다녀오고 공부에만 매진해야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서유럽으로 떠났다. 영국 런던에 도착해 도시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을 때의 설렘을 그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인생 첫 배낭여행 이후 공부에만 전념하겠다는 다짐은 사라졌다. 오히려 다른 선진국을 더 경험하기 위해 해외로 나가는 쪽으로 결심이 섰다. 1997년 IMF로 경기 불황이 이어졌지만, 대기업은 대학생들의 해외 탐방을 대규모로 지원했다.
원 대표는 1996년에는 삼성화재가 주최하는 미얀마· 베트남 해외 봉사활동에 참여했고, 1997년에는 삼성그룹과 한국방송공사가 주관하는 중국 베이징(Beijing), 서울(Seoul), 도쿄(Tokyo)의 앞글자를 딴 '베세토(BeSeTo)' 해외연수에 참여해 한·중·일 각 국가의 도시를 2주간 탐방했다.
그중에서도 원 대표는 1997년 7월 대우그룹의 해외탐방에 참여했던 기억이 많이 남는다고 했다. 당시 대우그룹은 '세계 경영'을 목표로 해외 공장을 인수했다. 그는 영국에 있는 대우자동차 디자인연구소, 대우차가 인수한 폴란드 국영기업, 프랑스에 있는 대우전자 전자레인지 공장을 탐방했다.
그는 "해외에 나가면 애국자가 된다고 하는데 유럽의 엄청난 규모의 공장 앞에 태극기와 대우 마크가 그려진 깃발이 펄럭이는 모습에 내가 다 자랑스러웠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 상사맨부터 벤처 캐피털 스타트업까지
대학 졸업이 가까워 오자 원대로 대표는 해외 생활을 할 수 있는 직업에 대해 고민했다. 최근에는 어느 기업이든 해외에 현지 법인을 만드는 경우가 많아 해외에 나가는 기회들이 많지만, 1990년 말까지만 해도 국내 대기업 그룹도 해외 사업은 종합상사에 맡기는 구조였다.
1999년 삼성물산 국제업무 파트에서 첫 사회생활을 했다. 그가 처음 속한 곳은 정보통신 사업부였다. IT기기 수입과 수출을 하는 부서였다. 그중에서도 원대로 대표는 국내 중소기업의 제품을 해외에 수출하는 일을 담당했다. 삼성전기 계열사 제품을 유럽 쪽에 판매하고, 위성 방송용 수신기기인 '셋톱 박스'를 러시아 시장에 진출시켰다.
1990년 후반에는 '닷컴(.com) 붐'이 불었다. 원 대표는 "IT·인터넷 기기 등을 다루던 중소 기업들이 투자를 받아 코스닥 상장을 하고, 회사 매출이 크게 증가하는 걸 지켜보면서 유망 중소기업에 자금을 대고 투자하는 벤처 캐피털에 관심이 생겨 홀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원 대표는 2000년 상사맨을 그만두고 현재 한국의 1세대 벤처캐피털 전문 기업으로 불리는 KTB 네트워크로 옮겼다. 그간 해외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과 동남아 벤처 기업에 투자를 담당했다.
원 대표는 2006년을 싱가포르 주재원으로 파견을 나갈 기회를 얻었다. 이후 2009년부터 KTB투자증권 싱가포르 법인장을 지냈고, 2013년 현대투자증권(현 KB투자증권)을 거쳐 2016년 벤처기업 컨설팅 스타트업 '윌트 벤처 빌더'를 창업해 사업을 이어오고 있다.
창업 후 첫 컨설팅은 싱가포르에서 만난 아내가 이끌어 온 화장품 e-커머스 사업이다. 이후에는 한국 기업들과 스킨십을 늘렸다. 국내 기업이 싱가포르나 동남아 진출할 때 자문을 구해서 초기에 스타트업 교육을 하고 있다. 창업자와 동업해 초기 스타트업 컨설팅, 자금 투자(벤처캐피털), 기업 육성·성장(액셀러레이터)까지 총괄하고 있다.
■ 출향 이후 싱가포르에서 본 인천
인천은 이민자의 도시다. 지난해 6월 인천에서는 재외동포청이 문을 열었다. 원 대표는 싱가포르 국적의 아내와 결혼 후 2010년 영주권을 취득했다. 시민권까지 취득하면서 싱가포르 국적이 됐다.
해외 투자 환경과 국내 기업의 진출을 위해 일하는 컨설턴트로서 인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원 대표에게 물었다. 그는 "인천을 국내의 역외(off-shore) 특구로 지정하는 아이디어를 제안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여전히 해외 투자자에게 한국 내 여러 규제들로 국내 투자는 까다롭다. 인천에서 국제 기준에 맞춘 회사법, 세금 제도를 적용한다면 국내 자금 유·출입이 훨씬 자유로워지고 국내 투자도 활성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효은기자 100@kyeong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