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학년도 대입 자연계 전국 수석
민주화 시위 참여해 복역한 경험도
전국 1등 비결은 “학교 수업 충실했을 뿐”
언제나 1등은 주목을 받기 마련이다. 누구나 1등을 꿈꾸지만 그 기회가 모든 이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아임프롬인천’은 1등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인천 선인고 출신 서영석(청연한방병원 대표 한의사) 대한원외탕전협회 회장이다. 1983학년도 대입 학력고사 전국 자연계 수석을 차지하며 고향 인천과 자신의 이름을 전국에 알렸다.
지금도 그렇듯 대학입학 전형과 관련된 시험에서 수석 혹은 만점을 차지한 수험생은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전국 자연계 수석을 차지한 서영석 회장의 기사도 당시 여러 일간지에 실렸다. 어렵지 않게 기사를 찾아볼 수 있다. 당시 서영석군은 “수석을 차지하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부족한 과목에 노력을 집중했다”고 자신의 ‘비결’을 밝혔다. ‘개교 이래의 큰 경사’라는 표현도 옛 기사에서 보인다. 2024년 현재 서 회장의 이야기도 당시 고교생 서군의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서 회장은 “내가 재미있고 하고 싶어서 (공부를) 했다”며 “공부가 진짜 재미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17일 서 회장과 함께 미추홀구 도화동에 있는 모교 선인고를 찾았다. 조철수 선인고 교장이 반겨줬다. 조 교장은 “지금의 선인고가 있는 자리는 옛 효열초등학교 운동장 터”라고 설명했다. 서 회장의 옛 기사를 보면 “도시락을 2개씩 싸들고 다니며 학교 수업이 끝나고 밤 11시까지 도서관에 남아 공부에 열중했다”고 했다. “밤새 공부하던 옛 도서관을 한번 보고 싶다”는 서 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조 교장이 현재 선인중으로 안내했다. 서 회장이 공부하던 옛 선인고 건물은 현재 선인중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인중 건물 7층 옛 도서관 자리는 칸막이가 설치된 도서관이 아닌 학생들이 자유롭게 공부하는 특별실로 사용되고 있었다. 수업 중인 모습도 얼핏 볼 수 있었는데, 학생들은 각자 편한 자세로 앉아 수업을 듣고 있었다. 서 회장은 “옛날 생각이 난다”며 감회에 잠겼다.
“2학년 어느 날 갑자기 당시 임공순 교장 선생님이 부르시더군요. ‘이제는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을 학교가 지원해주겠다’면서 ‘부족한 것이 있으면 이야기하라’고 하시더군요. 이후 각자 자리가 정해진 독서실이 생겼고, 밤을 새도 좋고 뭘 해도 좋다는 말씀도 있었죠. 실제 편하게 공부했고, 성적도 눈에 띄게 올랐던 것으로 기억해요.”
선인고가 ‘전국 수석’을 배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성적이 좋은 학생을 집중적으로 지원하는 ‘스파르타식’ 교육 방법이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추첨을 통해 고등학교가 배정되는 ‘고교평준화’(소위 뺑뺑이) 정책과 ‘대입 학력고사’ 제도가 맞물리면서다. 고교평준화 정책은 1974년 서울·부산을 시작으로 이듬해 대구·인천·광주를 포함한 5대 도시에서 실시됐다. 1979년 전국 12개 도시, 1980학년도부터는 전국 20개 도시로 확대된다. 1975학년도 이전까지는 고교 입시가 존재했고 그에 따라 지역마다 ‘명문고’가 존재했다. 인천 대표는 제물포고였다.
대입 학력고사는 1982학년도에 도입됐다. 학력고사 제도는 1980년 제5공화국 출범과 함께 정부가 발표한 ‘7·30 교육개혁’ 일환으로 시행됐다. 핵심 내용은 대입 본고사를 폐지하고, 고교 내신 성적과 학력고사 성적만으로 대학 입학자를 선발하는 것이었다. 예전에는 ‘전국 수석’이라는 말이 존재할 수 없었다. 한국에서 처음 시행된 학력고사의 첫 전국 수석 타이틀은 너무도 유명한 이가 차지했다. 제주도 출신 정치인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이다.
선인고 건물에서 나오려는데, 건물 복도 천장에 배관이 노출된 모습이 보였다. 조 교장은 “학교가 지어지고 한참 후 배관이 설치된 흔적”이라며 “과거에는 건물 안에 화장실이 없었다. 학생들이 건물 밖에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할 정도로 교육 환경이 열악했다”고 설명했다.
비리사학의 대명사… 어수선했던 당시 선인고
선인고가 속해 있던 선인학원은 1994년 시립화됐다. 이전까지 사립 체제였다. 서 회장이 1학년이던 1980년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인천대와 인천전문대 대학생들 때문이었는지 실제 학교 정문 앞에 탱크와 무장한 군인이 보이기도 했고, 선인고 2·3학년 선배들이 폭동 수준의 시위를 일으키기도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선인학원 시립화 성공사 편찬위원회가 1996년 펴낸 책 ‘선인학원 시립화 성공사’의 연표를 보면 ‘1980년 4월 고등학생(운봉·운산·항도·선인 등) 약 1만여명 시위, 학원 민주화’라는 기록이 보인다. 같은 책 9쪽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도 있다.
‘1980년 3월22일 오전 10시경부터 운봉공고, 운산공고, 항도실고 등 학생 1천500여명이 수업을 거부한 채 교내 운동장에 모여 백인엽 축출, 교내 민주화, 실습시간 연장, 보충 수업료 인하, 무능 교사 퇴진 등 8개 항의 요구 조건을 내걸고 농성을 벌이기 시작했다.…(중략)…공업전문대, 인천대, 선화여상 등의 유리창 2천여장을 부수는가 하면 제물포역 앞 도로로 진출해 버스 유리창과 공중전화 박스를 박살내는 등 거대한 폭력사태로 변모한다.’
선인학원은 인천대와 인천전문대 등 2개 대학과 10개 초·중·고교, 유치원 등 무려 14개 교육기관을 거느린 전국 최대 규모의 사학법인이었다. ‘인천 학령인구의 25%를 선인학원이 책임졌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거대했다.
선인학원은 비리사학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예비역 중장 백인엽(1923~2013)이 성광중·성광상고를 운영하는 사학재단 성광학원을 1958년 인수한 이후 학교를 늘려갔다. 1965년 3월 학교법인 명칭을 ‘선인’으로 변경하고 교명도 새로 붙여간다. 재단 명칭은 형 백선엽(1920~2020)과 자신의 이름에서 따왔고 형의 호인 ‘운산’, 자신의 호 ‘운봉’, 어머니 이름 ‘효열’, 아들의 이름 ‘진홍’ 등으로 학교 이름을 채워나갔다. 1988년 인천대학교 승격 인가를 받을 때까지 수많은 학교의 ‘설립’ ‘폐교’ ‘교명 변경’이 이어지면서 ‘우리나라 사학법인 발전사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양적 팽창을 이뤄간다. 1993년 기준 재적 학생 수 3만6천441명, 교원 수 1천111명, 직원 수는 273명에 이르는 엄청난 규모의 사학재단이었다. 그해 인천시 주민등록 인구는 213만8천426명이며, 학령인구는 40여만명이었다.
우주의 본질 알고파 서울대 물리학과 진학
서 회장은 서울대 물리학과에 진학했다. “세계와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고 싶다”는 욕구가 컸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아닐까 싶어요. 진짜 물리학도라면 기본적으로 세상에 대한 이해와 근원적 호기심, 그런 것 때문에 물리학을 공부하겠죠. 당연히 그래야지 재미도 있을 것이고요….”
서 회장은 자신이 “호기심 많은 아이였다”고 말했다. 궁금한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책을 좋아했다. 그는 부평동중학교 출신인데, 도서관은 늘 서영석의 차지였다. 나중에는 사서 선생님의 특별 대우를 받아 ‘폐가식’ 도서관을 혼자 ‘개가식’으로 이용했을 정도였다. 그에겐 더없이 행복했던 시기였다.
“학교에 작은 도서관이 있었어요. 교실 한두 칸짜리 크기였죠. 반 정도는 서가였고, 반 정도가 열람실이었는데 남자 애들이 책을 안 읽잖아요. 도서관이 언제나 한가했어요. 방과 후에 매일 도서관을 갔어요.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았죠. 정규 교사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젊은 여자 사서 선생님이 있었죠. 어느 날부터는 선생님이 ‘영석이 너는 대출 신청을 하지 말고 그냥 읽고 싶으면 들어와서 아무거나 읽고 제대로 꽂아 놓고 가’라고 말하는 겁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를 탐독했고, 애거사 크리스티라는 ‘대단한’ 작가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몇 백 권을 읽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는 말했다.
“5·18 진상 규명하라” 동지들과 횃불 든 그때
서울대 물리학과에 수석으로 진학하며 부모님에게 최대의 ‘효도’를 한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불효자’의 길로 접어든다. 어머니가 공부 잘하는 효자로만 알고 살았던 착한 아들의 옥바라지를 해야했으니 말이다.
1986년 5월19일자 경인일보 (인천)사회면을 보면 ‘횃불 시위를 벌인 학생 등 15명 연행’이라는 제목으로 그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18일 하오 8시5분경 인천시 동구 송림동 현대극장 앞에서 대학생 40여명이 ‘민주정부수립’ 등의 구호를 외치며 횃불시위를 벌이다. 긴급출동한 경찰에 의해 10여분만에 해산됐다. 경찰은 이 중 서영석군 등 15명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연행, 시위 주동자 및 배후세력 등에 대한 조사를 벌이고 있다.’
그는 그날 기억을 비교적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그의 기억에는 함께 나선 동지들이 100여 명 정도였다. 골목길에 숨어서 라이터로 횃불에 불을 붙이고 ‘5·18 진상을 구명하라’고 외치며 차도로 뛰쳐 나갔다. 골목 곳곳에 숨어있던 다른 학생들이 플래카드를 들고 함께 뛰어 나왔다. ‘스크럼’을 짜고 동인천역 광장까지 행진을 벌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경찰이 나타났고, 금세 체포됐다. 그는 “그날 닭장차 안에서 평생 맞을 매를 다 맞았다”고 말했다.
‘인천5·3민주항쟁’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1986년 5월3일은 인천과 전국의 민주화운동단체와 학생 노동자가 당시 인천시민회관 사거리에 모여 하루 종일 군부독재 퇴진과 헌법 개정을 요구하는 민주화운동을 펼친 날이다. 인천시민을 비롯한 5만여 명이 모였다. 광주 5월 항쟁 이후 위축된 민주화운동에 다시 불을 붙이고, 1987년 6월 항쟁을 여는 도화선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 회장은 1986년 5월 횃불시위로 구속 수감돼 1년6개월 형을 받고 1987년 3월 가석방됐다.
대구교도소 복역 당시 ‘교육’을 받으면 가석방을 허가해 준다는 교도소 측 ‘회유’를 수차례 받았다. “복역 기간을 채우겠다”며 회유에 넘어가지 않고 버텼다. 어느 날 대전 교도소로 이감됐다. 새로 지은 최신식 교도소였다고 한다. 교도관도 재소자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 텅 빈 건물에 사흘간 갇혀있다 보니 공포심이 극에 달했다. 그는 “보안과 지하실에서 멍석말이를 당할 때도, 교도관에게 맞을 때도 버텼는데, 아무도 없는 곳이 무서웠다”며 말을 아꼈다.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영상물을 몇 편 감상하고 그렇게 가석방됐다. 그는 “함께 싸웠던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다”고 말했다.
출소 이후 서울대 교수 권유로 즉시 복학했다. 그렇게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공부에 전념했고 1989년 졸업했다.
졸업 후 취직을 시도했지만 집시법 위반 구속 이력이 있는 그를 받아 줄 회사는 없었다. 지인 소개로 학원 강사일을 시작했다. 부평에서 제법 큰 학원도 운영했다. 보증금 사기를 당해 큰돈을 날리는 경험도 했다. 서울에 있는 재수학원으로도 출강했다.
학원 강사일을 오래 할 수 없었다. 자신의 가치관과 맞지 않았다. 사교육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했던 사람이, 심지어 사교육이 대한민국을 망치는 산업이라고 말했던 사람이 사교육 시장에 종사하고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16년 아래 동생들과 경쟁해 한의대 입학
“오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았죠. 물리학을 처음 시작할 당시 막연히 가졌던 꿈이 있었어요. 기초과학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철학이나 사학을 공부하며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생물학이나 의학을 배워 인간의 생명에 대한 공부까지 끝내자 하는 목표가 있었어요. ‘인간의 삶, 우주와 역사를 모두 아우르는 위대한 책을 한 권 쓰고 죽어야지’ 이런 생각을 했었거든요.(웃음)”
1999학년도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에 16년 아래 동생들과 경쟁해 합격한다. 2005년 졸업하며 한의사 면허를 취득했다.
2013년 대한한의사협회 집행부로 활동한다. 당시 집행부의 목표는 한의사들도 엑스레이와 초음파 등 의료 기기를 자유롭게 쓰는 것이었다. 물리학을 전공한 한의사로 양방 의사들과 TV 토론 등에서 맞붙기도 했다. 서 회장은 “논리는 우리가 앞섰지만, 조직력·정치력에서 밀려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의사의 초음파 기기 사용은 최근에서야 합법화됐다.
지금은 청연한방병원 원외탕전실 대표 한의사와 대한원외탕전협회장을 맡고 있다. 원외탕전실은 한의사가 처방을 내리면 한약을 짓는 의료기관의 부속시설이다. 여러 한의 의료기관이 주문한 한약을 납품한다. 한의약의 산업화를 위해 힘쓰며 한의계 발전을 위해 노력 중이다.
서 회장에게 ‘전국 수석’ 타이틀을 안겨준 고향 인천의 후배들을 위한 조언을 부탁했다. 그의 대답은 이렇다.
남을 이기려고 하는 공부는 성과가 생기기 힘들어요.
알고 싶고 배우려고 공부하는 것 그게 정상입니다.
“인천은 오래된 전통의 도시가 아니잖아요. 한적한 어촌이 개항 이후 갑자기 성장했죠. 외부 유입 인구도 많아 고향이라는 강렬한 의식 그런 게 잘 없는 도시였던 것 같아요. 인천이 서울과 가까워 지역색이 흐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 세대부터는 인천에서 태어나 자라고 성장한 친구가 많습니다. 지역 발전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친구도 많고, 나가서도 인천 출신이라는 걸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친구가 적지 않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공부는 즐겁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궁금하게 여기고 알고 싶어해야 합니다. 그래야 재미도 생깁니다. 남들을 이기려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방식의 공부는 성과가 생기기 힘들어요. 알고 싶고 배우려고 공부하는 것 그게 정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