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부터 경기 남부 주름잡던 큰 시장
시대 변화 속 역사 잇기 위해 많은 노력
특색 만들기 위한 ‘역맥축제’ 5년만에 재개
군포라는 지명엔 다양한 유래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조선시대에 성행했던 군포장에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조선 숙종 25년에 간행된 과천현 신수읍지 등의 표기로 미뤄볼 때 현재 군포 옆을 지나는 하천은 예로부터 군포천으로 불렸다. 군포천 일대에 큰 시장이 개설됐는데 이를 군포장으로 칭했다. 상당히 성행해, 조선시대 각종 기록과 지도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1905년 경부선 개통 당시 역사 이름을 군포장역(지금의 군포역)으로 명명할 정도였으니 미뤄 짐작할 만하다. 이후 군포장역을 중심으로 민가가 늘어나고 산업이 활성화되자 군포장역 인근을 아예 ‘군포’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게 여러 유래 중 하나다. 시장이 하나의 도시를 키운 셈이다.
군포의 역사 그 자체인 군포장은 지금의 군포역전시장으로 이어진다. 당초 안양 호계3동 일대에 위치했던 군포장은 안양천 범람을 계기로 군포역 옆으로 이동했고, 세월의 흐름 속 지금의 모습이 됐다. 군포역 1번 출구 앞 좁은 골목 양 옆으로 쭉 늘어선 60여개 점포가 150년 역사를 오늘도 새로 쓰고 있다.
#군포의 역사, 군포 사람의 역사
군포장이 열릴 때마다 주변 지역은 물론, 경기 남부권의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 워낙 인파가 몰리는 상업적 요충지였기에, 일제강점기였던 1919년 3월 31일 무려 2천여명이 참여한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이곳에서 열리기도 했다. 소설가 이무영이 1938년 군포에 거주하면서 동아일보에 연재한 ‘군포장 깍두기’로도 이름을 알렸다. (군포시는 1999년 이를 기념해 이무영 작품비를 건립했지만 그의 친일 행적 논란 이후 2009년 철거했다)
군포장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한 후에도 안산이며, 화성에서까지 물건을 팔기 위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예전엔 저 멀리 서신면에서도 조개를 팔려고 여기까지 왔었어요. 지금처럼 막 정돈된 점포가 있는건 아니고 여러 장사꾼들이 군데군데에서 물건을 파는 그런 형태였는데, 그러면서 여기 집들도 많이 생기고 골목도 나고 한거죠.” 정성순 군포역전시장 상인회장은 그 옛날 시장의 모습을 기억한다.
시간이 흐르며 군포장의 명성은 조금씩 희미해졌다. 역전시장이라는 이름이 더 친숙해진 가운데, 지역 내에 산본전통시장 등 다른 시장이 조성돼 규모를 키우는 한편 대형마트가 들어선 이후로는 아예 전통시장을 찾는 발길마저 줄었다.
그럼에도 군포 사람들에게 역전시장은 일상의 공간이었다. “저는 태어나서 역전시장에서 순대라는 음식을 처음 먹었어요. 와, 세상에 이런 음식이 있구나 싶었죠.” 군포에서 성장한 안동광 군포시 부시장은 지난 16일 군포역전시장에서 이곳의 추억을 이 같이 언급했다. “대부분의 군포 사람들한텐 그럴 거에요. 일상적으로 오가는 공간이니까. 그만큼 다들 여기에 얽힌 추억도 많고, 의미가 있는 곳이에요.”
#여기에 시장이 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명맥만 유지해오던 군포역전시장이 새롭게 태어난 것은 2005년 4월이다. 이 무렵 결성된 상인회는 역전시장을 정식으로 전통시장으로 등록했다. 이를 토대로 정부·지방자치단체의 지원을 정식으로 받을 수 있게 됐다. 비 가림 시설이나 화장실 등을 설치하면서 시장 환경 개선에도 나섰다.
인기 TV 프로그램이었던 ‘백종원의 골목식당’에 출연한 일은 전국적으로 역전시장을 알리는 계기가 됐다. 백종원 더본코리아 대표의 컨설팅으로 새롭게 탄생한 족발, 닭꼬치집 등은 지금도 역전시장을 대표하는 점포로 눈길을 끈다. 올해는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주관하는 특성화 시장(문화관광형 시장) 육성 사업 대상에 선정돼, 콘텐츠가 있는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시장을 살리기 위한 상인들의 노력이 단적으로 나타난 것은 2019년 역맥축제였다. 골목에 테이블을 펼쳐놓고 각 점포에서 판매하는 음식들과 시원한 맥주를 곁들인 축제였다. 역사는 오래 됐지만 이렇다 할 특색이 없던 역전시장에 새로운 상징을 만들기 위한 취지였다. 정성순 회장은 “다른 시장에서 비슷한 축제를 하는 걸 보고 ‘우리 시장도 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작정 시작을 해봤다. 날씨도 덥고 휴가철이라 사람이 올까 싶었는데, 생각보다는 굉장히 많이 왔다. 의왕, 안양에서까지 올 정도였다”며 “매출도 제법 오르고 시장에 새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런데 다음 해에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돼서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지난 16일 무려 5년 만에 역전시장 골목에 테이블이 길게 늘어섰다. 삼삼오오 모여드는 사람들로 어느새 자리가 가득 찼다. 감자전이며 닭꼬치, 양꼬치 등 시장에서 판매되는 다양한 음식들이 테이블을 메웠다. 축제를 위해 상인들은 기꺼이 팔을 걷어붙였다. 채소가게에선 당근이며 오이를 썰어 입가심에 좋은 안주 세트를 만들어 판매했고, 홍어 가게에선 홍어회 뿐 아니라 더위를 달랠 팥빙수와 대하 소금구이도 함께 내놨다. 무엇보다 가격이 저렴한 게 특징이었다. 감자전은 3천원, 순대는 4천원, 팥빙수는 5천원이었다. 다수의 지역 축제 등에서 ‘바가지 요금’이 논란이 됐던 가운데, 축제를 준비하면서 ‘없어요 캠페인’을 벌이며 터무니없이 높은 요금을 받지 않도록 상인회가 신신당부한 결과물이었다. 소방 훈련 등도 사전에 철저히 실시하고, 손님 맞이를 위해 시장 구석구석 대청소에 나서기도 했다.
군포지역엔 전체 외국인 주민 중 베트남 주민 거주 비율이 경기도 평균보다 높은 편인데, 역전시장 내에도 베트남 상점들이 곳곳에 있다. 역맥축제 현장에선 족발이며 부침개를 판매하는 상인들 틈에서 베트남식 바게트 샌드위치인 반미와 사탕수수 주스 등도 만날 수 있었다. 지난 17일 저녁에 방문했을 땐 한 쪽에선 노래자랑이 한창이었다. 열대야를 잠시 잊은 채 상인들도 웃고, 노래하는 사람도 웃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웃고,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도 웃고 있었다.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던 한 상인이 말했다. “축제를 한다고 해서 엄청 매출이 많이 오르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일단 음식 가격이 비싸지 않으니까. 그런데 중요한 건 그래도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여길 보잖아요. 아, 여기에 시장이 있었지. 시장에서 이런 것도 하네. 새삼 그렇게 느낄 수 있잖아요.” 시민들에게도, 상인들에게도 늘 일상의 공간으로 머무르려는 노력들이 모여 오늘도 역사를 만든다.